레비나스의 "해석학과 너머"("Herméneutique et au-delà")는 <이념으로 오는 신>, De dieu qui vient à l'idée과 <우리 사이>, Entre nous 두 책에 실려있다. 이 글은 1977년에 발표된 글이다 (in Herméneutique et philosophie de la religion (Aubier, 1977), Actes du Colloque organisé par le Centre International des Etudes Humanistes et par l'Instituiton d'Etude philosophiques de Rome).
이 글은 길지 않은 글이다. 짧은 서론과 5개의 장으로, 각각 번호가 붙어있다. 이 글에서 레비나스는 자신의 초월성의 개념, "너머"의 의미에 대해서, 종종 잘못 이해되는 이 초월의 의미에 대해서 현상학적인 탈자적 초월(자기 밖으로의 초월)과의 차이를 통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초월이 특히 종교적 해석학 안에서 이해될 때, 해석학과 자신의 초월을 구분한다.
아주 간결한 서론이다. 일단 읽어보자.한 단락이지만 문장으로 나눠서 읽는다.
Que la pensée éveillée à Dieu se croie aller au-delà du monde ou écouter une voix plus intime que l’intimité, l’herméneutique qui interprète cette vie ou ce psychisme religieux ne saurait l’assimiler à une expérience que cette pensée pense précisément dépasser.
신 안에서 깨어난 사유는 세계 너머로 간다고, 그리고 내밀성보다 더 내밀한 목소리를 듣는 다고 믿는 것, 이러한 삶, 혹은
이러한 종교적인 마음의 운동을 해석하는 해석학은 이러한 사유(앞의 que 이하의 사유)가 정확히 초월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경험과
이러한 사유를 동화시킬수(일치시킬 수) 없다.
- "신 안에서 깨어난 사유는 세계 너머로 간다고, 그리고 내밀성보다 더 내밀한 목소리를 듣는 다고 믿는 것", 이러한 사유는 레비나스가 스스로 자신의 "psychisme"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le psychisme de la connaissance, et de la positivité c'est-à-dire du monde"(Positivité et transcendance, p. 24), 즉 "인식과 실증성 즉 세계의 psychisme"과 구분되는 것으로 "psychisme de l'inquiétude et de l'éveil", 불-안과 깨어남의 psychism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sychisme, 이 말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적자면, la vie psychique, "심리적 삶"을 의미한다. 현상학이 문제인 경우, 이것은 의식의 삶, 주체의 삶, 그 내용과 그 운동을 지시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 말을 "마음의 운동"이라고 혹은 "의식의 운동"이라고 옮긴다. 특히 이 심리적인 것이 후설, 하이데거 그릭고 레비나스에서 감성적인 것, 감정, 혹은 정조와 관계될 때, 이 말은 정확히 affectivité, 하이데거의 용어로는 Befindlichkeit (이 말은 번역자에 따라서 affectivité로 혹은 disposition으로 옮겨진다.)를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affectivité도 disposition도 아닌 아주 오래된, 아주 일반적인 단어인 psychisme은 사용한다. 이 말은 자기와 자기와의 내적인 의식, 마음, 정서, 감정의 삶, 운동을 지시한다. affectivité라는 개념이 앙리에서 항상 affect와 force를 다시 말해 dynamique et pathétique를 동시에 지시하듯이, psychisme은 그 내용과 그 운동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정신분석도 이러한 psychisme, 의식의 삶을 분석한다. 정신분석이든, 레비나스이든, 앙리이든, 하이데거이든, 후설이든, 의식의 내적 삶에 접근하는 모든 이들은 이러한 의식의 내적인 삶과 관계한다. 문제는 이들이 각각 그 삶을 설명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 접근의 방식의 차이가 그들의 사상의 차이를 밝힌다. 물론 이들은 조금끽 다른 언어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이 내적인 삶을 분석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해석학은 이러한 삶, 이러한 종교적인 마음의 운동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해석학은 특히 종교적 해석학을 지시한다. 이 진술을 받아들인다면, 레비나스의 psychisme을 해석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여기에 덧 붙인다. 이러한 해석학은 앞서 진술한 이러한 사유의 운동이 정확히 초월하는 어떤 경험과 이 사유를 일치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불일치는 이어지는 글에서 정확히 다시 말해진다. 그것은 이러한 사유의 초월과 지향적인 초월, 즉 자기-의-밖으로 나아가는 운동으로서의 초월의 차이를 지시한다.
Cette pensée prétend à un au-delà, à un plus-profond-que-soi – à une transcendance différente du hors-de-soi qu’ouvre et traverse la conscience intentionnelle. Que signifie ce dépasser? Que signifie cette différence? Sans prendre aucune décision de caractère métaphysique(note1), on voudrait ici seulement demander en quoi, dans sa structure noétique, cette transcendance rompt avec le hors-de-soi de l’intentionnalité. Cela demande une réflexion préalable sur la façon propre de l’intentionnalité dans sa référence au monde et à l’être.
Note1) Elle n’a peut-être aucun sens dans la version ontologique qu’on en donne alors qu’il s’agirait d’un au-delà-de-l’être.
이 사유는 너머, 자기-보다-더-깊이-내려감 - 지향적 의식이 열고 길을 내는 자기-의-밖과는 다른 초월을 주장한다. 이 넘어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형이상학적 결정(주.1)을 앞서서 취함이 없이, 우리는 여기서 다만 어떤 점에서 이 초월이, 그것의 의식작용적 구조에서, 지향성의 자기-의-밖과 결별한(구분되는) 초월인지를 물을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세계와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지향성의 고유한 존재 방식에 대한 반성을 예비적으로 요구한다.
주.1)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존재 너머"라면, 이 형이상학적 결정은 사람들이 종종 그렇게 하듯이 존재론적 해석 안에서는 어떤 의미도 없을 것이다.
- 레비나스의 "au-delà", "너머"는 항상 "en-decà", "이전"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un plus-profond-que-soi 자기-보다-더-아래로-내려감, 자기-보다-더-깊이 내려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향성의 탈자적, 자기-의-밖으로의 초월과 다른 초월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세계 안으로의 초월이 아닌 세계의 밖으로의 초월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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