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레비나스, 쓸데없는 고통(3)

aurorepark 2010. 10. 30. 04:00

이 글의 1장, "현상학"이라는 제목이 붙은 곳의 마지막 단락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몇으로 나눠 읽는다.


1) Haute pensée qui est l'honneur d'une modernité encore incertaine, encore clignotante, qui s'annonce à l'issue d'un siècle de souffrances sans nom, mais où la souffrance de la souffrance, la souffrance pour la souffrance inutile de l'autre homme, la juste souffrance en moi pour la souffrance injustifiable d'autrui, ouvre sur la souffrance la perspective éthique de l'inter-humain.


아직도 불확실한, 여전히 껌벅이는 근대성의 명예인 이 고양된 사유는 이름 없는 고통의 한 세기를 통해서 알려진다. 그런데 여기서 고통의 고통, 다른 인간의 쓸데없는 고통을 위한 고통, 내 안의 타인의 정당화되지 않는 고통을 위한 정당한 고통은 고통 위에 인간 -사이의 윤리적 전망을 연다.



- 고양된 사유, 혹은 최상의 사유, 타인을 생각하는 사유는 인간의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의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너머, 자기의 보존을 너머, 타인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아니기에 그것은 사유의 최상의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사유의 가능서에 대해서, 생각되지 않은 것에 대한 사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쓴 사람이다. 그의 존재에 대한 사유는 이 고양된 사유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사유는 여전히 자기 안에,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존재의 질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무엇을 한다고 하자. 이 노력에 따르는 고통은 보상이 있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에는 그래서 어떤 희열도 따른다. 그런데 앞서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들려준 탈무드의 한 이야기에서도 말하듯, 어떤 고통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없는 쓸데없는 고통도 존재한다. 많은 경우에 고통은 이런 것들이다. 이렇게 정당화되지 않는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상처받음으로 인해 겪게되는 내 안의 고통은 앞선 타자의 정당화되지 않는 고통에 비해 정당한 고통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보통 우리가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희생도 고통이 따른다. 그런데 이 고통은 쓸데없는 고통도, 정당화되지 않는 고통도 아니다. 이 눈물은 정당한 눈물이다. 바로 이 마르지 않는 눈물에서 인간-사이의 윤리적 전망이 열린다.  

2) Dans cette perspective se fait une différence radicale entre la souffrance en autrui où elle est, pour moi impardonnable et me sollicite et m'appelle, et la souffrance en moi [note 1] , ma propre aventure de la souffrance dont l'inutilité constitutionnelle ou congénitale peut prendre un sens, le seul dont la souffrance soit susceptible, en devenant une souffrance pour la souffrance, fût-elle inexorable, de quelqu'un d'autre.


이런 관점에서, 타자 안에서의 고통내 안에서의 고통(주 1)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생겨난다. 전자는 나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나를 요청하고, 나를 부른다. 그리고 후자는 나의 고유한 고통의 모험으로 이것의 구성적인 혹은 타고난 쓸모없음은 어떤 의미를 취할 수 있다. 그것은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이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의 고통 -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도 굽힐 수 없는 것인데 - 을 위한 고통이 된다.


- inexorable, irrémissible, impardonnable, inflexible, implacable, 이 단어들은 모두 유사한 의미들을 가진 동의어들이다. 레비나스가 자주 쓰는 말들이다. 특히 inexorable, in-ex-orable, exorare, ex-orare, orare는 주문이나, 기도를 발설하는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소망을 말로 불러 오는 행위이다.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의 방향을 돌리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여기에 in이 붙었으니, 기도로도, 마술로도 이미 온 어떤 것의 방향을 돌릴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ocer라고 하면 기도나 주문을 통해 소원을 말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 주 하나가 달려있다. 여기에 옮긴다: 주1) 내 안의 고통 souffrance en moi은 근본적으로 나의 것이어서 그것은 어떤 술어의 주어가 될 수 없다. 인류의 정신적 전통 안에서 인증되고 환영받는 bienvenue 이 고통이 진정한 이념을 의미할 수 잇는 것은 나의 고통souffrance en moi으로서이지 고통 일반souffrance en génénral으로서가 아니다: 타자를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정당한 희생적인 고통, 빛을 발하는 고통, 도스토엡스카의 인물들에 의해 찾아진 고통, 나는 또한 나에게 익숙한 유대적 전통을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가>편의 "사랑으로 나는 아프네"와 같은 구절, 또 탈무드에서 발견되는 타자를 위한 희생과 엮겨있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의 이야기 등등.    


Attention à la souffrance d'autrui qui, à travers les cruautés de notre siècle - malgré ces cruautés, à cause de ces cruautés - , peut s'affirmer comme le nœud même de la subjectivité humaine au point de se trouver élevée en un suprême principe éthique - le seul qu'il ne soit pas possible de contester - et jusqu'à commander les espoirs et la discipline pratiques de vastes groupements humains. Attention et action qui incombent aux hommes - à leur moi - si impérieusement et si directement qu'il ne leur est pas possible sans déchoir, de les attendre d'un Dieu tout-puissant. De Dieu la conscience de cette obligation sans dérobade possible rend, plus difficilement certes, mais plus spirituellement proche que la confiance en une quelconque théodicée. 


우리 시대의 잔인성을 거쳐서 - 이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잔인성으로 인하여 - 타인의 고통에 대한 주의는 최상의 윤리적 원리 안으로 고양되는 지점에서,  희망과 인간집단의 실천적 규율을 명령하는 데까지 이른 지점에서 인간의 주체의 매듭 그 자체로서 긍정될 수 있다 - 그것은 유일하게 반박되어질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인간에게 - 인간의 각각의 자아에게 -부여된 주의와 행위는 아주 급박하고 아주 직접적이어서 전능의 어떤 신으로부터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그들에게 인간의 인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이 회피할 수 없는 이 의무의 의식은 신에 대한 어떤 신정론에 대한 신뢰보다 더 어렵게 그런데 보다 정신적으로 가깝게 신의 선성과 정의에 대한 신뢰를  돌려준다.


- 타인에 대한 주의, 존중, 타인의 고통에 대한 주의, 인간에 대한 주의, 주체에 대한 주의, 이것은 진정한 레비나스의 철학의 주제이다. 그리고 고통받는 타인의 급박함 앞에서 신을 기다리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성의 세속화. 


이어지는 장들은, 2. La théodicée 신정론, 혹은 변증론. 3. La fin de la théodicée, 신정론의 종말, 3. L'ordre interhumain, 인간사이의 질서이다. intersubjectif가 상호주관적인 혹은 상호주체적이듯이 상호인간적인 질서라고도 옮길 수 있지만, "인간사이의 질서"라는 말이 더 나아 보인다. 이어서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