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레비나스, 쓸데없는 고통(1)

aurorepark 2010. 10. 27. 23:55

레비나스의 <쓸데없는 고통, La souffrance inutile>은 1982 잡지 Giornal di Metafisca, n° 4에 발표된 것으로 우리 사이, Entre nous(biblio essais, p. 100-112)에 실려있는 길지 않은 논문이다. 4개의 소제목이 붙어있다. 1장은 <현상학>이라는 제목을 갖는다. 



1)La souffrance est, certes, dans la conscience, une donnée, un certain «contenu psychologique», comme le vécu de la couleur, du son, du contact, comme n'importe quelle sensation. Mais dans ce «contenu» même, elle est un malgré-la-conscience, l'inassumable. L'inassumable et l'«inassumabilité». «Inassumabilité» qui ne tient pas à l'intensité excessive d'une sensation, à un quelconque «trop» quantitatif, passant la mesure de notre sensibilité et de nos moyens de saisir et de tenir; mais un excès, un «de trop» qui s'inscrit dans un contenu sensoriel, pénètre comme souffrance les dimensions de sens qui semblent s'y ouvrir ou s'y greffer. 2)Comme si au «je pense» kantien, capable de réunir en ordre et d'embrasser en sens, sous ses formes à priori, les données les plus hétérogènes et les plus disparates, la souffrance n'était pas seulement une donnée réfractaire à la synthèse, mais la façon dont le refus, opposé au rassemblement de données en ensemble sensé, s'y oppose; à la fois ce qui dérange l'ordre et ce dérangement même. 3)Non seulement conscience d'un rejet ou symptôme de rejet, mais ce rejet même: conscience à rebours, «opérant» non comme «prise», mais comme révulsion. Une modalité. Ambiguïté catégoriale de qualité et de modalité. Reniement et refus de sens s'imposant comme qualité sensible; voilà en guise de contenu «expérimenté» la façon dont, dans une conscience, l'insupportable précisément ne se support pas, la façon de ne-pas-se-supporter, laquelle, paradoxalement, est elle-même une sensation ou une donnée. Structure quasiment contradictoire, mais contradiction qui n'est pas formelle comme celle de la tension dialectique entre l'affirmatif et le négatif se produisant pour l'intellect; contradiction en guise de sensation: dolence de la douleur, mal.


- 위의 긴 한 단락을 그 논리적인 전개의 방식을 따라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장의 수사의 방식을 따라서 셋으로 나눠서 읽는다. 여기에는 강화, 강조, 과장의 수사가 들어온다. 그것은 레비나스의 글쓰기의 방식에 낯선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장을 놓고 그것에 대한 반복의 형식으로 "마치...인 것처럼" 비유의 방식으로 표현해 주고, 이어서 이 "마치...인 것처럼"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첫 번째 주장의 결론에 도달한다. 이어지는 다음 단락들은 이 첫 단락에서 말한 것들을 다시 풀어서 말할 뿐이다. 위의 글에서 고딕의 나의 강조이고 이태리체는 레비나스의 것이다. 나는 레비나스의 철학적인 글쓰기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의 글쓰기는 탁월하다. 그 자신의 언어, 모국어가 아닌 그에게, 사실 그에게 모국어가 있는가? 물론 그는 러시아어와 희브리어를 모국어로,그리고  학교에서 독일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사용했다. 18세 때 프랑스에 스트라스부르크로 유학오면서 그는 불어를 라신느를 읽으면서 배웠다고 한다. 그는 언어는 그에게 장애였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2차 대전에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하면서 그는 "프랑스어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가 사랑했던, 모국어가 되어버린 그의 불어는 그의 글들 안에서 빛난다.    


1) La souffrance est, certes, dans la conscience, une donnée, un certain «contenu psychologique», comme le vécu de la couleur, du son, du contact, comme n'importe quelle sensation. Mais dans ce «contenu» même, elle est un malgré-la-conscience, l'inassumable. L'inassumable et l'«inassumabilité». «Inassumabilité» qui ne tient pas à l'intensité excessive d'une sensation, à un quelconque «trop» quantitatif, passant la mesure de notre sensibilité et de nos moyens de saisir et de tenir; mais un excès, un «de trop» qui s'inscrit dans un contenu sensoriel, pénètre comme souffrance les dimensions de sens qui semblent s'y ouvrir ou s'y greffer.


1) 고통은 물론 우리가 겪는 색과 소리와 접촉의 체험처럼,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처럼, 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심리적 내용물"이다. 그런데, 이 "내용물" 안에서, 고통은 의식에 반한 것,  즉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과 "감당할 수 없음". "감당할 수 없음", 그것은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그것에 대한 파악과 유지의 수단들의 척도를 넘어서는 과도한 긴장에서, 양적인 "과잉"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내용 그 자체 안에 기입된 위반, "과잉"은 고통으로서 서로에 대해 열리고 서로 다른 것에 접목하는 듯이 보이는 감각의 영역들을 변형한다.



- 글쓰기에서 따옴표 " ", 아니 괄호에 넣기는 우리가 알듯이, 우리가 그렇게 말하듯이 그 의미가 쓰여진 그대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상태를, 의미의 일시적인 중단, 잠정적인 중단을, 혹은 그와 유사한, 그런데 그것이 아닌 상태를, 아직 그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잠정적인 상태를 지시한다. 위의 글에서 레비나스는 "심리적인 내용물", "내용물"과 "감당할수 없는것", "감당할수 없음"을 괄호 안에 넣는다. 고통은 "일종의 심리적 내용물", 소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꼭 심리적 내용물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그것과 유사하지만 꼭 그것과 같은 카테고리 같은 폭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감당할 수 없음", "책임질 수 없음"은 감성과 오성의 척도로 환원되지 않는 위반, 과잉으로, 감각의 폭과 질을 변형한다. 이 첫 문장에서부터 레비나스는 칸트의 감성론을 불러온다. 칸트의 종합의 한계로부터 열리는 감성론. 레비나스의 칸트 읽기는 하이데거의 칸트 읽기를 반해서, 후설을 후설에 반해서 읽듯이 칸트를 칸트에 반해서 읽는다. 위에 고딕은 나의 강조이다. 우선 처음의 강조, un malgré-la-conscience, 여기서 이 표현은 레비나스 철학을 요약하는 다른 표현, malgré soi, 혹은 malgré moi에 대한 다른 표현 방식이다. "...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그것이 가진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기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의 지난한 자기를 보존하려는 의식의 욕구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법칙에 반한 권리에 대한 레비나스의 질문을 의미한다. 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있는가에 대한 탁월한 존재론적 질문 만큼, 혹은 그 보다 더 오래된, 더 늙은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나의 존재의 정의에 대한 질문이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은, 긴 철학사의 역사에서, 아닉시만드로스의 질문 이후에 오랫동안 잊혀진 이 질문은 인간의 인간됨의 가능성, 다른 인간의 휴머니즘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첫 문장에서부터 하나의 테제를 던진다: 고통은 의식의 내용 안에서 이 의식에 반한, 이 의식의 본성에도 불구하고이다. 의식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밖의 것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이다. 지각하고 파악해서 표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의 활동은 나의 능력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의식의 표상의 활동에 잡히지 않는 것은 나를 조용한 삶을 방해한다. 그것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것은 나의 편안함을 방해한다. 나를 깨우는 것, 조용한 나의 삶을 방해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 안에서내가 느끼는 몸소 겪는 이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체험이다. 레비나스가 고통의 현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의 체험들 중에서 가장 명백한, 눈에 보듯이 명백한 더 이상 긴 증명이 필요 없는 하나의 사실, 살면서 삶에 대해서 느끼고 것으로 삶, 생명 그 자체이다. 세상에 몸을 드러낸 살아있는 것들의 지난함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철학이 행복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 삶의 본질이 고통이기 때문이 아닌가?



2) Comme si au «je pense» kantien, capable de réunir en ordre et d'embrasser en sens, sous ses formes à priori, les données les plus hétérogènes et les plus disparates, la souffrance n'était pas seulement une donnée réfractaire à la synthèse, mais la façon dont le refus, opposé au rassemblement de données en ensemble sensé, s'y oppose; à la fois ce qui dérange l'ordre et ce dérangement même.


2) 그러한 위반 혹은 과잉은, 마치 가장 이질적인, 가장 분산적인 소여들까지도 자신의 선험적인 형식들 아래에서 하나의 질서로 모으고, 하나의 의미로 끌어안을 수 있는 칸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에서, 고통의 현상이 종합을 방해하는 하나의 소여일 뿐만 아니라, 소여 전체를 의미있는 것으로 모으는 것에 반대되는, 그러한 종합에 대립되는 거부의 방식 그 자체인 것처럼 일어난다; 질서를 방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방해 그 자체.


- 1)에서 사용한 용어들의 동의어들을 먼저 지적하자. 1)의 "의식"은 2)에서 "칸트의 코기토"로 대체, 반복된다. "의식의 반한 것 un malgré-la-conscience"은 2)에서 "종합을 방해하는 소여 une donnée réfractère à la synthèse"로, 그리고 이어지는 3)에서 "거스르는 의식 une conscience à rebours"로 다시 다르게 말해진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것과 감당할 수 없음, L'inassumable et l'«inassumabilité»"은 "방해하는 소여와 거부의 방식 그 자체"로, 그리고 다시 한번 "질서를 방해하는 것과 방해 그 자체"로 다르게 반복된다. 이러한 다른 반복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어떤 한 의미에 조금씩 다가간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현상학적 소여와 그것이 주어지는 방식, 즉 "대상의 어떻게"에 대해서, 즉 현상의 현상성에 대해서 말한다.


고통은 여러 의식의 내용들 중에서 예외적이라고, 의식에 반한 것이라고 1)에서 레비나스는 말했다. 이 의식의 내용 그 자체 안에서 위반, 혹은 과잉이라고 레비나스가 부르는 것은 대상, 의식 대상의 질료성, 그 물질성의 과잉, 위반을 말한다. 철학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의식의 물징성의 과잉를 절재하고자 하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아리스트텔레스가 질료, 형성을 이미 입은 질료가 아니라, 순수 질료를 말하면서 그가 부딛쳤던 난제는 바로 이것이다. 또한 희랍의 비극을 다루면서, 비극의 hybris(ubris)를 다루면서 그가 말하는 카타르시스는 바로 이 의식의 위반, 과잉 혹은 고통이 어떻게 관객에게 쾌로 드러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칸트의 고통에 대한 언급은 그의 제 1 비판에서 "사물 자체"에 대한 언급과 그리고 그의 "근본 악"에 대한 논의와 또 그의 제 3 비판에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 앞에서 느끼는 불쾌 혹은 고통, 오성의 척도를 넘어서는 "괴물스러운 것 Ungeheuer"와 연관된 것이다. 레비나스는 <쓸데없는 고통>에서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혹은 칸트의 숭고의 체험을 실험한다. 이 숭고는 지젝이 비웃듯이 비극의 마지막에 오는 해피엔딩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향성이다. 악을 악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이 아니라, 고통에, 악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다고 신정론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인 삶에 어떤 의미도 없다면, 우리의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고통을 고통으로 내버려 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임에 대한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다. 인간의 실존, 물질의 물질성의 과잉, Un-혹은 Ur-가 지닌 그 과장의 인간적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숭고는 한 주체가 자신 안에서 느끼는 어떤 절대적인 한계에 대한 경험이며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주체성 안에 자리한 'Un-' 혹은 'Ur-'로의 '열림'이기도 하다. 우리는 또한 이 Un, Ur의 인간 안에서의 열림은 칸트의 제 2 비판에서 "법"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이 모든 열림은 세계로의 열림이 아니라, 그 세계 이상으로의 열림이다. 그런데 그 이상은 세계 저 너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레비나스에게 타인에로의 열림을 지시한다.

   

3) Non seulement conscience d'un rejet ou symptôme de rejet, mais ce rejet même: conscience à rebours, «opérant» non comme «prise», mais comme révulsion. Une modalité. Ambiguïté catégoriale de qualité et de modalité. Reniement et refus de sens s'imposant comme qualité sensible; voilà en guise de contenu «expérimenté» la façon dont, dans une conscience, l'insupportable précisément ne se support pas, la façon de ne-pas-se-supporter, laquelle, paradoxalement, est elle-même une sensation ou une donnée. Structure quasiment contradictoire, mais contradiction qui n'est pas formelle comme celle de la tension dialectique entre l'affirmatif et le négatif se produisant pour l'intellect; contradiction en guise de sensation: dolence de la douleur, mal.



3)거절의 의식 혹은 거절의 증상일 뿐만 아니라, 이 거절 그 자체: 거스르는 의식, "작동하는" 의식, 그런데 "파지"의 방식이 아니라, 방향의 전향으로서. 일종의 양태. 질과 양태의 범주적 애매성.  감각의 부인과 거부는 감각적인 성질로서 자신을 정립한다; 여기서 의식의 내용은, 의식 안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이, 보다 자세히 말하면,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그런 방식이, 자신을-견딜-수-없음의 방식,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 감각이 되는 혹은 소여가 되는 방식으로 "실험된다". 거의 모순적인 구조, 그런데 오성에서 일어나는 긍정과 부정 사이에 존재하는 변증적 긴장처럼 형식적이 아닌 모순; 감각에서 일어나는 모순: 고통의 고통스러움, 악.


- 거절 rejet은 앞에 거부 refus에 대한 반복이다. 거절의 의식과 거절 그 자체는 앞의 소여와 그것의 주어지는 방식, 질서를 방해하는 것과 방해 그 자체의 반복이다. 거스리는 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이미 말한 의식에도 불구라고, 의식에 반한 것이다. à rebours는 짐승의 털을 반대로 쓰다듭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 있는 본성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한 상태로 다루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작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작동은 의식의 파악이라는 작동의 의미가 아니라 레비나스가 자주 말하듯, 방향의 전향, version을 의미한다. 여기에 어떤 양태의 반향전환이 있게된다. 그것은 거부 그 자체가 하나의 감각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견딜 수 없음" 그리고 그것의 방식 드 자체가 감각이 되는 일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일종의 변증적인 과정이 존재한다. 이미 『시간과 타자』에서 시도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여기서 반복한다. 이것은 오성의 변증법이 아닌 감각에서 일어나는 모순이라고 말한다. 이 운동에 대해서 감각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변증법에 대해서, 악의 변증법에 대해서 이어지는 글에서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