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1975/11/7 금요일

aurorepark 2010. 9. 11. 05:30

레비나스의 두 강의록이 책으로 묶여있다. 하나는 이미 그 번역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타자』로 1946-47년 장 발의 초청으로 콜레즈 프랑세에서 있었던 강의들이며, 다른 하나는 거의 30년 후에 1975-1976년 솔본느에게 행한 강의들이다. 이 강의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쟈크 롤랑의 편집으로 1993년 출간되었다. 이 강의들는 그의 주요저작, 『전체성과 무한』(1961), 그리고 『존재와 다르게』(1974) 출간 이후에 행해진 것으로 그의 후기의 저서에 속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지시하듯이 이 강의의 주제는 <시간>이다. 시간은 여기서 <죽음>을 통해서 이해되며, 이러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존재에 전염되지 않은, 탈-존재-신학적인 <신>의 이념에 접근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의 한 중심에는 시간의 문제가 놓여있다. 그가 존재로부터 탈출을 말했을 때, 다시 말해 그가 존재로부터의 넘어섬 excendance을 말했을 때, 그것은 오랜 서양 철학의 시간에 대한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그의 초기의 글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그리고 『시간과 타자』에서 말하듯,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만이 존재로부터의 넘어섬을, 타자에의 접근을, 새로운 초월성을, 새로운 신의 이념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Dieu, la mort et le temps
 


『시간과 타자』서문에서 레비나스는 이 책의 주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과 타자』는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의 지평으로서가 아니라, 존재 너머의 양태로서, 다시 말해 사유와 타자와의 관계로서 - 다른 인간의 얼굴을 직면한 사회의 여러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  예감하는 데에 있다: 마치 전적인 타자, 초월하는 것, 무한과의 관계로서 간주되는 에로티즘, 형재애, 이웃에 대한 책임. 관계 혹은 종교 그것은 지식(savoir), 다시 말해 지향성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지향성은 표상을 드러내고, 타자를 현전으로 공현전으로 이끈다. 반대로 시간은 통-시성(dia-chronie)에서, 사유와의 관계가 무관심성이 아님을 보증하면서, 타자의 타자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위의 인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오랜 서양 철학의 시간의 이해에 대한 비판을 전제한다. 그것은 또한 지향성, 지식으로서의 철학, 반-철학의 테제가 걸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관계 혹은 종교 그것은 지식(savoir), 다시 말해 지향성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관계 혹은 종교라는 말은 종교에 대한 레비나스의 어언적 기원을 생각해야 한다. religion이라는 말은 유럽의 언어 안에서 서로 갈라지는 어원들을 가진다. 그 기원들 중의 하나는 religare로 relier 연결하다, 인간들 사이의 연결, 관계를 의미한다. 레비나스가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실증종교의 차원이 아닌 인간사이의 관계, 그가 말하는 윤리적 관계에 근거한 그런 관계를 지시한다.


이 강의록은 두 학기에 걸쳐서 행해진 것이다. 롤랑은 이 강의를 강의 날짜대로 묶지 않고 두개의 주제, <죽음과 시간>, <신과 존재-신-학>으로 나눠서 강의를 배치했다. 전자는 이 책의 전반부를 차지한다. <죽음과 시간>에서 레비나스는 철학사에서 드러나는 시간과 죽음의 관계들을 다룬다. 하이데거, 헤겔, 칸트, 더 가까이는 블로흐를 다룬다. 그리고 뒤의 것은 그의 다른 저서, 『이념으로 오는 신』(1982)을 예비하는 글들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역시 하이데거와 칸트의 이름은 자주 언급된다.


첫 날의 강의는 1975년 11월 7일 금요일에 있었다. 그의 강의는 75년에는 금요일 10시에서 11시에, 76년에는 금요일 12시에서 13시에 있었다.


1975/11/7 금요일 ㅡ 질문들


- 강의 첫 날, 모든 강의가 대부분 그렇듯이, 강의의 주제, 그 주제와 관련된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 강의는 시간, 특히 시간의 지속에 대한 것이다. "지속"이라는 말을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선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시한다. 『존재와 시간』 출간 이전, 한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우리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존재로서의 시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롤랑의 주) 여기서 레비나스가 언급하는 하이데거의 강의는 "시간의 개념"(1924)이다.] 지속이란 개념은 시간의 수동성에는 어떤 종류의 능동성도 없다는 것, 시간의 수동성은 인내 그 자체 (이것은 시간에 대한 지향적인 해석에 반대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드러낸다. 지속이라는 단어는 마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물처럼 실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흐름>(flux, écoulemment)이라는 이념을 회피하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시계처럼 측정되는 시간은 진정한 시간이 아니다). 시간화(temporalisation, Zeitizung)라는 말처럼, 지속이라는 말은 시간 안에서 흐르는 것과 시간 그 자체 사이의 모든 혼동과 오해를 피하는 것을 허락한다. 특히 이 말은 시간을 그 자신의 고유한 양태 하에서 드러내는 것을 허락한다."


- 위에서 레비나스는 시간을 지속의 개념으로부터 접근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이 베르그손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 개념은 이미 레비나스 안에서 많은 변형을 겪는다. 그에 시간에 대한 접근은 순간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순간은 자기정립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한에서 순간은 자신 안에 마치 자기에 자기에 대한 관계 같은 하나의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는 순간 안에 일종의 지속, 일단의 시간의 길이, 인내를 만든다. 여기서 그가 시간의 통-시적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열린다. dia-chronie에서 dia는 분리, 즉 시간적인 흐름과의 분리를 의미하면서 시간의 수평적 흐름에 수직적 깊이를 제공한다. 나와 자기 사이에 열린, 순간 안에 열린 일단의 시간의 길이, 지속은 그의 표현을 빌면 "비일치의 언제나(toujours de la non coïncidence), 영감과 기다림의 관계의 언제나"의 시간을 말한다. 이것은 이 전에 "사이의 시간(entretemps)"(실재와 그림자), "죽은 시간(le temps mort)"(전체성과 무한) 그리고 "일단의 시간의 길이(le laps du temps)", 혹은 "인내" 혹은 "늙어감의 시간"(존재와 다르게)이라고 다르게 불린다. 그 이름이 달라도 이 모두는 순간, 현재 안에 열리는 시간의 언제나, 지속을 말한다. 이로부터 레비나스에게 시간은 세계의 시간 밖에 놓이게 된다. 이 시간의 언제나는 앙리가 인용하기를 즐겨하는 에크하르트의 진술과 멀지 않다: "어제 일어난 일도 나에게는 일만전 전에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멀다." 이 말은 반대로 일만전 전에 일어난 일은 오늘 어제 일어난 일처럼 가깝다는 말이기도 하다. 흐름으로서 시간의 탈자적 이해에 대한 레비나스와 앙리의 거부는 구성적, 지향적, 초월론적 현상학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이끈다. 


"우선 지속이라는 개념은 마치 인간의 궁극적인 시간에 대한 의미있는 접근이라고 생각되는 존재와 무라는 쌍에 의해서 생각되어져서는 안되다. 이 시간의 지속 안에서 죽음은 시간이 자신의 인내를 유지하는 점이다. 이 기다림은 기다림의 지향성을 거부한다. - "인내와 시간의 길이"라고 금언은 말한다. 인내, 시간의 수동성의 최상급으로서의 인내, 여기에 이 강의의 방향이 놓여있다: 시간의 인내로서의 시간."


- 레비나스가 죽음을 통해 접근하는 시간은 죽음에 이를 수 없는, 그것이 도래할 수 없는, 그 불가능성, 그 기다림, 인내에서 드러난다. 특히 그의 철학이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말하듯 하이데거적인 철학의 분위기를 떠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확히 그의 시간의 대한 이해를 지배하는 죽음의 사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반대하는 세 개의 개념은 존재, 죽음 그리고 초월성으로서의 세계의 개념이다. 결국 그의 철학의 중심적인 이 세 개념에 대한 반박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다.


"시간의 관점에서 죽음을 탐구하는 것 (존재의 지평 혹은 존재의 본질로서가 시간이 아니라) 이것은 죽음을 향한 존재의 철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죽음의 탐구는 하이데거와의 사유와 구별된다. 하이데거와 연관된 모든 현대의 탐구들이 그에게 진 빚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빚은 자주 후회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만일 죽음을 향한 존재가 무에 대한 존재의 관계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기된다면, 이것은 시간 안에 죽음을 정확히 정립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죽음을 존재와의 관계에서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렇다고해서 보다 쉬운 다른 방식으로 영원으로의 의존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ㅡ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irréversible)이다."


- 시간의 관점에서 죽음을 다룬다고 해서 그것이 하이데거적인, 즉 존재의 지평, 혹은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명시적으로 밝힌다. 레비나스에게 시간은 존재의 지평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 대한 현대철학의 빚에 대해서 말한다. 그가 여러번 반복해서 말하듯, 그 빚은 항상 후회스러운 것이다. 시간 안에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뒤에서 다시 볼 것이다.


"죽음과 더불어 열리는 것은 '무'인가 혹은 '미지의 것(l'inconnu)'인가? 죽음의 순간은 존재론적인 존재-무로 환원되는가? 이것은 바로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이다. 죽음을 존재와 무의 딜레마로 환원하는 것은 뒤집힌 도그마티즘 - 민중의 아편이라고 불리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실증적인 도그마티즘에 대한 모든 세대의 불신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 이다." 


- 죽음은 레비나스에게 미지의 것(l'inconnu)이 아닌 알려질 수 없는 것(inconnaissable)이다. 때때로 레비나스는 '신비'(시간과 타자)라고도 부른다. 죽음을 존재와 무의 딜레마에서 빼어내는 것이 우선 우리가 할 일이다.


"죽음, 피할 수 없는 만기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선 우리는 죽음을 간접적(de seconde main)으로만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들리는 소문으로 혹은 경험적인 지식을 통해서 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아는 것은 모두 언어를 통해서, 그것을 명명하고 그것을 진술하는 - 그것이 상식적인 진술이든, 금언적인 진술이든, 시적인 혹은 종교적인 진술이든 - 언어로부터 우리에게 온다.


이 지식, 이 죽음에 대한 지식은 다른 인간들에 대한 경험과 관찰로부터, 그들의 죽어가는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을 아는 그리고 그것을 잊어버리는 죽음의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다(죽음을 잊어버리는 것은 여기서 오락(divertissement)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락이 아닌 죽음의 망각이 존재한다). 죽음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죽음의 부정적인 성격(무화)은 미움과 살인의 욕망 안에 기입되어 있다. 우리가 죽음을 그것의 부정성에서 생각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혹은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가진다. 죽음은  존재들 안에서 그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표현적인 운동의 사라짐이다 - 이 운동들은 항상  대답들(réponses)이다. 죽음은 무엇 보다도 먼저 이 자율성 혹은 누군가의 얼굴에까지 이르는 운동의 표현성을 건드린다.  죽음은 대답-없음(sans-réponse)이다. 이 운동들은 식물적인 운동을 가리고 알려준다. 죽는 것은 덮고 있는 것을 벗기는 것이고 그것에 의학적인 진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언어로부터 혹은 다른 인간의 죽음에 대한 관찰로부터 이해되는 그러한 죽음은 이 운동의 정지이며, 누군가를 더 이상 구성할 수 없는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 부동화(immobilisation). 변형은 더 이상 없고 다만 무화, 한 존재자의 종말, 앞서서 무수한 신호였던 운동들의 정지이다(파이돈 117e-118e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라.) 비록 분해와 분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잔여를 넘어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얼굴) 존재 양태의 무화. 죽음은 마치 존재에서 더 이상 연장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이행으로, 마치 논리적인 조작처럼 이해된다: 부정."


- 죽음에 접근은 레비나스에게 우선 그가 말하듯 간접적, de seconde main으로만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고유한 죽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이 간접성, 즉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죽음에 접근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나의 죽음으로부터, 이 나의 죽음의 확실성에서부터, 다자인의 개별화의 원리인 이 나의 죽음으로부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나의 죽음으로부터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는 것과 구분된다. 이러한 타인의 죽음을 통한 접근은 대답-없음으로 요약된다. 죽음이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살인, 타인의 무화의 욕망과 연결될 때에 죽음의 부정적인 성격이 드러날 뿐이다.


"동시에 죽음은 떠남이다: 그것은 떠나는 것(décès)이다. (이 떠남 혹은 출발의 이념 안에도 여전히 부정성이 머문다.)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떠남, 돌아옴이 없는 떠남, "주소를 남기지도 않고" 떠난 떠남, 죽음 - 타인의 죽음 - 은 이러한 극적인 성격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탁월한 감동, 탁월한 정서이다. 파이돈의 처음과 끝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언급들을 보라. 이 죽음에서 모든 종류의 희망의 이유를 발견하고자 하는 자들 옆에, 어떤 이들 (아폴로도르, "여자들")은 한 없이, 측정할 수 없이 운다: 마치 인간의 인간성이 척도에 의해 고갈되지 않는 것처럼, 마치 죽음 안에 어떤 측정할 수 없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죽음은 단순한 떠남, 단순한 이행일 수 있다 - 그런데 그것은 모든 위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동의 원천이다."


- 우리가 죽음을 떠남이라고 말하듯 불어에서 죽음을 표현하는 여러 표현 중에 déccès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라틴어 decedere로부터 온 것으로 s'en aller 가다, 떠나다, 의 의미이다. 떠남은 항상 동시에 출발을 의미한다. départ, 이것은 기차의 떠남이면서 출발이기도 하다. "주소를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남, 이런 극적인 타인의 죽음의 성격은 단순한 이행, 여기에서 저기로의 이행 이상으로 측정할 수 없는 감동, l'émotion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에게 이 감동/감정이란 단어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는 정립, 자리에 반대되는 것은 공중에 매달린 자유가 아니라 "감동"이라고 말한다. 이 감동은 주체의 주체성을 문제삼은 전복을 말한다. 이것은 정서적 촉발 affection의 문제이기도 한다. 이 말은 병원균이 우리의 신체의 영향을 비치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말이기도 한 이 말은 그것이 지적인 것이든 감성적인 것이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촉발해서 어떤 변형을 가져오는 것이다. 감동은 부동의 자리를 들어 올려 그것이 움직여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레비나스사가 말하는 psychisme, 마음의 운동이 생겨난다.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의 죽음과의 관계는 간접적인 지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그의 <존재와 시간>을 보라) 죽음은 탁월한 확실성이다. 거기에는 죽음의 선험성이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이 확실성에서 확실성 그 자체의 기원을 보는 관점에서 확실한 죽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확실성이 타인들의 죽음의 경험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죽음이 확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그것이 무화의 의미를 가지는 지는 더욱 확실하지 않다. 의 죽음과의 관계는 또한 타자들의  죽음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오는 감동적이고 지적인 재울림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이 관계는 간접적인 경험과의 관계에 의해 그 균형이 깨진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겨난다: 두려움 혹은 불안 안에서 감지되는 죽음과의 관계, 죽음이 우리의 삶의 충격을 주는 방식, 우리가 사는 시간의 지속에 가해지는 충격, 시간 안에서 죽음의 용출 - 혹은 시간 밖으로의 용출 - 은 여전히 지식과 동일화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경험과 드러남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죽음을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 불가능성, 죽음에 대한 경험의 불가능성의 이 명백성, 삶과 죽음의 불관계의 확실성은 트로마티즘보다 더 수동적인 어떤 정서적 촉발을 의미하지 않는가? 마치 여기에 충격 이상의 수동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현전보다 더 촉발적인, 선험성보다 더 선험적인 균열이 존재한다. 예고로 환원되어질 수 없는 시간의 양태로서의 사멸성은 수동성, 경험, 무의 이해로 환원불가능한 양태이다. 너무 서둘러서 어떤 철학에서처럼 무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다고 서둘러서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 철학은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그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질문함이 없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자신을 고집스럽게 지속하는 존재해야 하는 한 존재자인 인간을 말한다.


여기서 죽음은 즉음의 경험과 다른 의미를 취한다. 타인으 죽음으로부터 오는 의미. 경험 없는 어떤 죽음, 그런데 두려운 것, 그것은 시간의 구조가 지향적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파지(미래지향)와 기지(과거지향)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 이것들은 경험의 양태들이다 - 의미하지 않는가?"


- 죽음의 확실성은 물론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견해를 지시한다. 경험으로, 지식으로, 예고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멸성은 죽음의 확실성과 트로마티즘보다 더 수동적인 정서를 촉발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 수동성은 타자에 대한 체험이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식으로서의 죽음은 간접적인 경험, 즉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알려져 오는 죽음에 의해 그 균형을 잃어버린다. 거기에는 더 이상 회복되는 시간도 예비되는 시간의 지향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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