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초월론적 변증론> 한 구절을 일단 읽어보자.
"사람들은 우주론적 이념들에서 드러나는 이율배반이 다만 변증적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다만 사물 그 자체의 조건으로서의 가치만을 가지는 절대적인 전체성의 이념을 표상으로서만 존재하는 현상들에, 그리고 이 현상들이 일련의 퇴행 안에서 연쇄를 구성할 때, 그것은 전혀 실존하지 않는 그런 현상들에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가상적 갈등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우리는 이 안티노미로부터, 독단적인 방식이 아니라, 비판적인 방식으로, 진정한 유용성을 끌어낼 수 있다: 만일 초월론적인 감성론이 제시한 직접적인 증명이 어떤 사람들에게 대단한 만족을 주지 못했다면, 나는 여기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현상들의 초월론적인 이념성(idéalité transcendantale des phénomène)에 대해서 앞서 말한 것 이상을 말하고자 한다." (A 506/B 534)
칸트는 어떤 면에서 "순수이성의
이율배반"는 간접적으로 그런데 "초월론적인 감성론"보다 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그의 비판의 토대인
"현상들의 초월론적인 이념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현상의 초월론적인 이념성" 은 칸트의 인식론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인식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상의 현상성, 즉 우리가 칸트적 의미에서 대상(Gegenstand)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적 조건들 하에 놓여있는 - 형식이라는 말이 지시하듯이 실재적인 아니고 단지 이념적인 - 직관에 의해
주어진 질료, 소여가 경험의 법칙을 따르는 오성의 규칙에 의해 결정되는 방식을 말한다.
칸트가 위에서 말하듯 <초월론적 감성론>에서 현상들의 초월론적인 이념성에 대한 설명이 모든 사람들을 다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듯이, 특히 직관의 형식에서 외감인 공간의 문제는 칸트를 내내 가장 괴롭히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수학의 기하학과 연관된 공간론에 의존한 이성론, 특히 라이프니찌의 공간론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칸트의 공간론은 감성론에서 우리에게 현상과 물자체가 어떻게 구분되는 지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제 칸트는 이율배반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말한다.
칸트에서 이율배반의 배열은 우리가 잘 알듯이 계사로 연결된 A, non-A의 형태로 모순(Widerspruch)처럼 보인다.
그런데 안티노미의 배열에는 문법적인 부정이 알지 못하는, 그 이전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떤 구분이 알려져 온다. 그것은 모순이 아닌, 자기 자신과 대면한 이성의
자기 자신과의 갈등(Widerstreit)을 드러낸다. (칸트는 이율배반의 두 명제의 관계가 모순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그는 갈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실 이 단어는 아주 새로운 것으로, 기존의 익숙한 논리학의 언어가 아니다.) "만일 내가 세계는 공간적으로 무한하거나 무한하지 않다라고 말할 때, 그때에 만일 첫 번째 진술이 거짓이면, 그것의 모순된 대립, 즉 세계는 무한하지 않다는 참이어야 한다..."(A 504, B 532) 모순에서는 하나의 판단의 진리는 다른 판단을 제거한다. 모순은 논리적 관점과
초월론적인 관점을 구분하지 않는다. 모순이 아닌 이율배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성을 이성에 정면으로 대립시키면서 어느 하나도 진리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이상한 대립적 갈등에서 테즈가 안티테즈를 반박하는 같은 순간에 안티테즈는 같은 방식으로 테즈를 반박한다. 변증론의 7장,
안티노미에서 칸트는 모순의 부정적 판단과 다른 유형의 부정적 판단, 그의 초월론적인 철학의 토대를 제공하는, 그가 비규정적
판단 혹은 무한판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룬다. 같은 장에서 칸트는 우선 일상적인 경험에서 드러나는 이런 종류의 판단의 한 예를 제시한다.(A 503, B 531)
"누군가 모든 물체는
좋은 냄새가 나거나 나쁜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세 번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아무 냄새도 가지지 않는
물체를 생각할 수 있다. 이로부터 앞선 두 진술의 갈
등(Widerstreit)은 거짓으로 판정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모든 물체는 냄새가 있거나 없거나라고 말한다면(vel suavelolens
vel non
suavelolens), 두 판단은 모순적으로 대립한다. 첫 번째
판단이 거짓이라면, 그것의 모순적 대립, "모든 물체는 냄새가 없다"는 진술은 앞선 제 삼의 진술, 즉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물체를 포함한다. 앞선
대립에서(per disparata), 물체라는 개념에
연루된 우연적 조건(냄새)은 대립된 판단
안에 여전히 남아있으며, 결국 이 판단에서
제거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첫 번째 판단은 두 번째 것의 모순적(widersprüchlich) 대립항이 아니다"(B
531, A 503)
위의 문장을 좀더 보기 쉽게 정리해 보면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우선 갈등적 판단의 진술에 대해서, 2>그리고 이어서 모순적 판단의 진술에 대해서 기술하고, 3>마지막에 칸트는 갈등적
판단에서 드러나는 두 명제가 왜 모순적이 아닌 가를 설명한다.
1>갈등적 진술 :
모든 물체는 좋은 냄새가 나거나 나쁜 냄새가 난다. (Tout corps ou sent bon ou sens
mauvais) 즉 이 진술은 다음의 두 진술로 떼어서 쓸 수 있다. 1/모든 물체는 좋은 냄새가 난다. 2/모든 물체는 나쁜
냄새가 난다. 이 진술들은 제 삼의
가능성ㅡ 아무 냄새도 가지지 않을 가능성 - 을 유발한다: 3/물체는 아무 냄새도 없다. (il ne sent rien de tout) (모든 대상은 <감성적> 직관의 대상이거나 <지적> 직관의 대상이다. 직관의 대상이 아닌 것(사물 자체)이 존재한다. 앞의 두 진술은 대상이 지닌 우연적인 요소(직관)를 배재하지 않는다. 구체적 진술도, 형식적이자도 않은 물자체는 비-현상이다. 사물자체는 감성직 직관의 대상이거나 지적직관의 대상이다. 감성적 직관의 대상도 지적 직관의 대상이 아닌 어떤 것, 즉 직관의 대상이 아닌 것을 술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2>모순적 진술 :
모든 물체는 냄새가 있거나 없거나이다.(Tout corps ou est parfumé ou n'est pas
parfumé) 즉 1/모든 물체는 냄새가 있다. 2/모든 물체는 냄새가 없다. 여기서 첫 번째 진술이 거짓이라면, 두 번째
진술, "모든 물체는 냄새가 없다"는 앞의 갈등적 진술의 제 3의 가능성을 자신 안에 포함한다. (모든 대상은 직관의 대상이거나 아니거나이다. 전자를 부정하면, 후자는 모든 대상은 직관의 대상이 아니다는 앞의 진술의 제 3의 가능성, 즉 직관의 대상이 아닌 것도 포함한다. 전체성 totalité. 사물 자체는 현상이 아니다. 사물자체는 직관의 대상이거나 아니거나이다. 전자의 부정인 후자는 '비-직관적인'(갈등적 진술에서 배재된 제 3의 진술)을 자신 안에 포함한다. 사물 자체는 직관의 술어 안에 들어간다. 전체를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3> 첫 번째
진술, 즉 갈등적 진술에서 드러나는 대립은 두 번째 진술과 비교해서 물체라는 개념에 연루된 우연적인 조건, 즉
<냄새>(직관)라는 우연성은 이 판단에 남아있으며, 제거되지 않는다.
위의 정리로부터 몇
가지 결론들을 끌어내 보자. 모순적 진술에서 두 판단의
술어는(냄새가 있거나, 냄새가 없거나 est parfumé, n'est pas parfumé) 우리가 생각할 수 모든 경우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에 갈등적 진술에서, "냄새 없는
신체"는 위의 모순적 진술에서처럼, 두 번째
진술 (모든 물체는 좋은 냄새가 난다)에 의해서 포함되지 않는다. 냄새라는 개념은 이 이접적인 진술(좋은 냄새이거나 나쁜 냄새,
ou (or) vel) 외부에 놓여 있으며, 이
우연성은 이 진술에 남아있으며, 이 진술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냄새
없는 신체(직관의 대상이 아닌 것)라는 개념은 결국 이 진술 밖에서 이 진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놓는다 (어떤 물체는
냄새 없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 진술은 모든 물체는 좋은 냄새이거나 나쁜 냄새이다"라는 진술을 가능하는 조건으로 머문다.
(제 3번째 가능성은 모든 물자체는 감작적 직관의 대상이거나 지적직관의 대상이다라는 진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머문다) 다시 말해 이 갈등의 논리적 규정 밖에 있는 이 외재성은 칸트에서 새롭게 정의된
논리, 혹자가 믿듯이 형식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실존으로 이해되는 <초월론적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레비나스가
<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실존을 발견했을 때, 그 "놀랍고 동시에 괴물적인 (merveille/monstrieuse) 실존"의 의미에서 말이다. 이
갈등은 칸트가 <논리학>에서 말하는 "비규정적 판단(혹은 무한판단)에 일치한다. 이 판단은 어떻게 논리적인 것이 형식주의 이상인지를 잘 보여준다.
<논리학>
(1765-1766년 강의, 1800년 출판)의 § 22에서 칸트는 비규정적(혹은 무한) 판단을 긍정, 부정 판단과 더불어 다룬다. 이 장은
길지 않다. 읽어보자.(Vrin, trad. Louis Guillermit, 113-114),
"질에 따라서, 판단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비규정적이거나이다. 긍정직 진술에서 주어는 술어의 영역 아래서 생각된다. 부정적 판단에서 주어는 술어의
영역 밖에 놓인다. 비규정적 판단에서 주어는 술어의 영역 밖에서 발견되는 어떤 개념의 영역 안에 위치한다.
부가 설명: 비규정적
판단은 주어가 한 술어의 영역 아래에 표함되지 않는다는 것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술어의 영역 밖에 놓인 비규정적 영역 안에 어딘 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판단은 한정된 것으로서(comme limitée) 술어의 영역을 드러낸다.
모든 것은 A이거나 non-A일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내가 어떤 것이 non-A, 예를 들어 "인간의 영혼은 불-사라고"(l'âme humaine est non-mortelle),"어떤 사람은 비-학자라고"(certaines hommes sont non-savants), 등등 말한다면, 이것은 비규정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영역 A를 넘어서 어떤 개념 아래에서 대상이 정돈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영역 A 밖에 놓인 어떤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실 영역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비규정적으로(무한히) 연장된 영역의 이웃(contiguïté,접선 angrenzung)이다. 다시 말하면, 한계지움 그 자체(limitation, délimitation Begrenzung)이다. 그런데 비록 배재가 부정이라고 할지라도, 한 개념의 제한은 긍정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한계들(Grenzen)은 제한된(beschränkter) 대상들의 긍정적인 개념들이다."
다시 위의 논의로 돌아가서, 실존은 바로 이 비규정정 판단(혹은 무한판단)에서 남겨 놓은 영역에서 발견된다. 즉 갈등의 논리가 남겨 놓은 제 3의 영역, 한계에 의해 정해진 <외재성>에 자리한다. (위의 갈등의 논리에서, 좋은 냄새가 나거나 나쁜 냄새가 나거나의 영역 밖에 놓인 냄새가 없는 어떤 체quelque corps sans ordeur 라는 외재성의 영역을 남긴다. 반면에 부정의 판단의 체의 우연적인 조건을 그 판단 밖에 위치지운다. 그로부터 논리는 물체의 물체성을 냄새와 관련해서 정한다. 비규정적 판단은 부정적 판단에 비해 더 논리적으로 주체와 술어 사이의 관계에서 그 경계를 더 엄격하게 적용한다. 칸트는 <비판>에 비규정적(혹은 무한) 판단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보다는 변증적 갈등 혹은 실제적 갈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비규정적 판단이라는 말이 드러내지 못하는 초월론적인 것의 내기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실존.
결론적으로, 모순(Widerspruch)의 경우, 두 진술에 의해서 도입된 규정들은 모든 경우, 전체를 덮는다. 반면에 갈등(Widerstreit)의 경우, 두 진술이 포함하지 않는 외재성, 실존을 남긴다.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의 부재에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라고 썼을 때, 그 외재성은 바로 칸트가 말하는 이 비규정적 판단으로부터 길어진 실존의 영역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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