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 세계에는 삶을 위한 자리가 없다!

aurorepark 2009. 11. 9. 01:19

Il n'y a pas de place pour la vie au monde!

세계에는 삶을 위한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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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상학자들 중에 가장 근본적이라고 불리는 미셸 앙리의 현시의 본질(L'essence de la manifestation, (EM), 1963), 9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une ontologie phénoménologique universelle)"의 구상이라는 이름 하에,  초월론적(transcendantal)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는 하나의 주장 - "초월성의 본질은 내재성 안에 근거한다" - 을 전개하는 데 바쳐진다. 이 책은 사실 이 한 주장을 위해 쓰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드러나는 것이 초월성의 운동 안에서 파악된다면, 다시 말해 자기 밖으로 나아가는 운동 안에서 규정된다면, 실재(réalité)는 자신을 스스로 근거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내재성만이 실체적인 실재(la réalité substentielle),  실질적인 실재(la réalité effevtive)라고 앙리는 말한다. 사실,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은 그의 철학의 여정의 초기부터 하나의 질문, "무엇이 진정으로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재하는가?"에 의해서 이끌린다. 그의 또 다른 대작 『맑스』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일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내재성의 주장을 더 극단화하면서 앙리는 그가 "나타남의 이중성(la duplicité de l'apparaître)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이라고 부르는 것의 관계를 기술한다. 여기서 세계의 탈-자적(혹은 탈-존적) 나타남은 그가 '삶'이라고 부르는 자기의 내재성의 '자기-나타남(auto-apparaître)'과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세계의 나타남, 지평은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 빛 안에서 사물들은 마치 흰 바탕에 검은 네모가 들어나듯이 비로소 자기를 드러낸다. 여기서 빛은 순수한 외재성으로 빛 안에 모든 존재를 자기 밖으로 끌어내는 외재화의 힘을 가진다. 앙리는 이러한 빛에 의한 외재화는 실재를 비실재화(déréalisation)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현상학이 그리스의 기원에 의존해서 "나타나는 만큼, 존재가 있다"는 것만을 주장한다면, 현상학이 세계의 나타남만을 안다면, 그 때 현상학은 더 이상 존재하면서 동시에 실질적으로, 진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술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실존의 비실재화에 참여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때에 앙리에게 문제는 현상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현상학을 위해 현상학의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그리고 동시대의 현상학 내에서, 즉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메를로-퐁티까지  현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는 앙리에 의해 우선 "존재론적인 일원론(le monisme ontologique)"(EM, §11, 91)이라는 말로 정의된다. 그리스 이래로 "나타나는 만큼 존재가 있다"는 주장은 철학의 역사 안에서 "존재의 지평"이라는 현대의 "존재론적 일원론"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어떤 것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낼 수 있다면, 이어서 그것은 우리에 의해 발견된다"는 일원론은 존재와의 관계의 유일한 틀을 제공한다. 여기에 이 일원론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현상학에 주어진다고 앙리는 말한다.

 

"이와 다른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형식은 생각되어질 수 없는가? 의식의 철학은 (...)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의식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실존과 본질에 대한 이전과 다른 영역에로의 열림 안에 있지 않는가? 이 영역은 인간에게 그에 대해서 그 안에서 다른 영역의 경험, 다른 양태의 현실의 출현이 아닌가?" (EM, 91-92)

 

그의 이러한 희망은 특히 현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로부터 명시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위의 책의 3부의 "내재성의 구조와 현상학적 규정의 문제: 보이지 않는 것"은 현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새로운 관계 - 초월성과 내재성의 새로운 관계 - 를 조명하는 데 핵심을 이루는 장이다. 특히 그의 현상학을 하이데거의 Zähringen의 세미나(1973) "드러나지 않는 것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inapparent, Phänomenologie  des Unsichbaren)"과 이어서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5)의 현상학과 구분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을 읽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의 철학적 노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 보이는 것에 의존함이 없이, 눈 없이, 시선 없이, 보이는 것으로 이끄는 데 있다. 처음 보기에 이 불가능한, 이 광기 앞에 나의 글쓰기는 자주 멈춘다. 그도 이 주장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삶이 원리상 모든 생각되어질 수 있는 보여주는 힘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어떤 이론 안에서, 다시 말해 보여지는 것 안에서 그것을 들어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은 그 말자체가 모순적인 아닌가? 정념적(pathétique)인 자기-촉발로서, 그리고 그 자체 근본적인 내재성으로서 삶의 자기에의 도래 그 안에서,  자기(un Soi)는 탄생한다. 그리고 이 자기의 현상학적인 물질성은 정념(pathos)이다."(PM, 8) 현상학의 현상성이 열수 있는 가능성, 그 장을 극단까지, 한계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프랑스의 일단의 현상학자들은 "현상학의 제한된 엄격한 한계"를 주장하는 최소주의(minimalisme) 현상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가 도미니크 자니코(Dominique Janicaud)일 것이다.

 

현상의 현상성의 탐구는 현상학의 내적 역사 안에서 이미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의 가능성을 연다. 왜냐하면 현상의 현상학은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후설이 시간의 문제에서 의식이 어떻게 스스로를 드러내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후설이 주체성의 자기-현시를 자기-구성으로 이해했을 때, 그리고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통해 보이는 것을 해명했을 때, 앙리가 볼 때, 그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현상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보이는 것과 보이는 않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둘을 연결하는 형이상학적인 전통적인 방법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것의 결과로서 보이는 것으로의 이행이거나, 반대로 보이는 것에서 그것의 근거로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 방향이 어떠하든 간에 두 경우 모두 두 양태 사이의 변형의 연속성, 다시 말해 한목소리를 가정한다. 이러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동질성은 일단의 현상학 안에서 반복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같은 세계에 속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세계'그 자체에 속해야 한다. 앙리의 전 철학적 노력은 이 존재의 한 목소리, 전체성을 반박하는 데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그에게 보이는 것은 세계에서만 주어지며, 세계에로만 열린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것은 세계로 열리지 않으며, 세계와 더불어 세계를 형성하지고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더 나아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이동을 전제하며, 이 두 항은 같은, 유일한, 동질의 현상성 안에 머문다. 메를로-퐁티가 60년 5월이라는 날짜가 붙은 노트에서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은 현실태적으로(actuellement)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여지게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에 상관적인 것으로 그것은 사물처럼 보여질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이러한 전통에 자신을 기입한다. 현실태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사물의 감춰진 혹은 비-현실태적인, 즉 잠재적인 사물의 측면을 말한다 - "저기(ailleurs)에 감춰져 있는 - 여기와 저기(Ici et aillleurs)". 이것은 감각경험(quale) 그 자체를 객관적인 현전에서 잠재적인 것(latence)으로, 다시 말해 명백하면서 어두운 감각의 이념으로 이해하면서만 가능하다. 두번째 진술은 감각적인 것의 "보여질 수 있음(visibilité)"이라는 선험성에 의존한다. 이 모든 경우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의 이동은 "상관적인 부정성(négation-régérence), ...의 제로(zéro de...)로, 보이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존재의 영역(dimensionnalité de l'Etre)"이라는 유일한 영역에 전적으로 속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같은 초월성의 양태일 뿐이다."(『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Galimmard, 310-311)         

 

이러한 전통은 후설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데거, 메를로-퐁티까지 이어지는 현상학적 전통 안에서 굳건히 유지된다.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 비현실태적인 것, 혹은 함축적인 것의 영역은 현대의 무의식의 개념과 조우하는 이 이념은 이념의 역사 안에서 "괴물스러운 혹은 위대한(monstruosité ou merveille) 발견"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여기서 절대적인 깨어있음, 지적인 명증성과 일치하는 현실태의 개념은 익명적이며 모호하고 어두운 삶에, 잊혀진 풍경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후자는 의식에 의해 대상으로 회복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새로운 심리학이 아닌, 새로운 존재론이 시작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존재는 사유의 상관자로서 자신을 정립할 뿐만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사유 그 자체를 근거지우는 것으로 발견된다."(EDE, 130-131) 이 존재의 구성하고 구성되는, 근거지우고 근거지워지는(fondant-fondé) 이 역설적인 구조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의 전 작품에서 드러나는 구조이다.  

 

후설의 지향성의 함축적인 것, 잠재성(potentialité, 메를로-퐁티의 언어로 latence)의 지평은 주체의 상황, 즉 상황 안의 주체로 하이데거에 의해 세계-안의-주체로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된다. 지향성이 표현하는 사물들 곁에서의 의식의 현전(la présence quprès des choses)은 하이데거에게 처음부터 세계 안의 역사를 지닌 초월성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함축된 지평의 개념은 마치 구성된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구성을 조건지우는 것처럼 드러난다. 존재자로 향하는 모든 사유는 이미 존재자의 존재 안에, 다시 말해 모든 자리를 결정하는 지평, 풍경을 밝히는 빛 안에서 유지되며, 이 빛은 이미 주체의 모든 자발성과 동기를 인도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적인 노력은 바로 이 영역, 전통적인 철학의 객관주의 입장에서 보면, 주관적인 이 영역, "모든 객관적인 것보다 더 객관적인 이 주관적인 것"(EDE, 133)의 영역을 탐색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재(Sein)라는 이름을 준다. 

 

레비나스, 앙리 그리고 데리다의 철학적인 노력은 이러한 닫힌 지향성의 구조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지향성 내에 균열을 제공하는 것이다. 후설의 위대한 발견 - "지적인 명증성과 일치하는 현실태의 개념이 익명적이며 모호하고 어두운 삶에, 잊혀진 풍경에 의존한다는 사실" -  을 그들의 유산으로 해서 그것이 열어 보일 수 있는 그 한계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열 린 듯이 보이는 지향성의 구조가 제한된 경제 안으로 다시 자신을 닫을 때, 그들이 주목하는 잠재태의 영역은 현실태로, 존재로 환원되어지지 않는 그 자신의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낮으로 이어지는 밤이 아니라, 표상을 기다리는 전술어적인 영역이 아니라, 구성하는 지향성으로 환원되는 영역이 아니라, 또 다른 밤으로 열리는 익명적인 영역, 비환원적인, 한번도 현재 해 본적이 없는 과거로, 밤으로, 심연으로 열리는 밤을 생각한다

 

이제 앞서 말한 앙리의 『현시의 본질』의 3부를 읽어보자. 내재성의 본질을 밝히는 이 부분은 그의 책의 핵심을 이룬다. 왜냐하면 1부에서 앙리는 초월성(transcendance)으로만 사유되는 현상성(phénoménalité)의 일원론을  비판한다. 이어서 2부에서 그는 내재성에 의해 이 전제, 즉 초월성으로서의 현상성을 해체하는 데 집중한다. 이어지는 이 3부에서 앙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첫 눈에 보기에 모순적인 듯이 보이는 두 개념, 즉 내재성과 현상성으로 규정한다. 바로 이 역설에 보이지 않는 것의 모든 수수께끼가 놓여있으며, 모든 현상학적인 논쟁은 여기로 집중한다. 이어지는 4부는 3부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정감성(affectivité)을 통해 밝히는 것에 있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단연 3부는 이 책의 핵심을 이루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 50장 "본질의 얼굴-없음(le non-visage* de l'essence)" (*visage는 불어 텍스트 안에서 희랍어 eidos 형상, 모습의 번역어로 종종 쓰인다. 이 말은 원래 그 기원적으로 가시적인 것을 지시한다. 그런 이유로 후설은 『이념 I』에서 "경험적인 직관은 본질의 봄(la vision de l'essence, Wesen-Schauung)으로 전환되어질 수 있다"(§3)고 말하면서, 후설은 '본질의 ', 즉 본질 직관의 가시성을 강조해서 본질(Wesen, Essence)을 'Eidos'로 부른다.)과 5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visible et invisible)"을 중심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에 대한 앙리의 주요 주장들을 끌어내 보자. 특히 보이지 않는 것과 현상성의 관계를 살펴보자. 그로부터 앙리는 하이데거적인 초월성과 다른 초월성의 개념에 이르며, 초월과 내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 이른다. 이 접근은 그 언어와 표현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레비나스의 후설로부터 가져오는 "내재성 안의 초월성"의 개념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우선, 50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현상성의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근본적이며 최초의 규정이다"(550)...."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상성의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557) 이 두 주장은 보기에 모호하기 그지 없다. 마치 현상성의 일원성에 의해 마치 보이는 것이 규정되듯이 보이지 않는 것이 규정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앙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에 단순히 반대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과 함께 현상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혼자 보이는 것의 현상성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점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현상성은 보이는 것에서만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에게 문제는 남는다. 어떻게 현상성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것으로부터 생각되어질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보이는 것의 본질, 현시의 본질(현상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l'invisible)은 그 자체로 자신 안에 자신을 현상화한다(se phénoménalise). 그것은 전적으로 현상이며, 드러냄(révélation)이며, 더 나아가 이 드러냄의 본질이다."(550) (*révélation이라는 단어는 감춰져 있는 것, 비밀을 드러냄, 폭로를 의미한다. 계시라는 무거운 의미를 피하기 위해 드러냄으로 옮긴다)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에 앞선 어떤 보이지 않음과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 현상성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은, 오랜 철학의 전통을 따라서(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까지 포함해서), 보이는 것의 잠재태의 자격으로 현상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그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그 자체 현상성의 현상이며, 현상성의 본질로서 발견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앙리는 현상의 개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그 개념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앙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현상성의 현상이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현상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보기에 전적인 말의 모순 - 현상과 보이지 않음 - 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앙리, 레비나스, 데리다를 읽을 때 부딪치는 이런 개념의 모순들은 일단 다음의 한 가지지 사실로부터 완화되어질 수 있다. 그들이, 이 경우, 앙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현상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 여기서 현상은 세계의 현상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워야 한다.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를 말하면서 앙리는 "...이 세계의 부재, 세계의 빛의 부재는 현상성의 부재가 아니다"(554-555)라고 말한다.

 

앙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스스로 현상화한다"고 했을 때, 이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지는 것으로 되는 것도, 사물의 빛 아래에서 세계화되는 존재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현시의 본질 그 자체이다.

 

"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드러냄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드러냄의 본질을 규정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특수한 현상학적인 실제성(effectivité)의 가능성 안에서 이 드러냄의 본질의 드러냄의 "어떻게"를 구성한다."(551)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현상성은 스스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현상화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본질은 보이지 않는 것"(549)이라고 그가 말할 때, 이 말은 현상성의 본질은 자신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더더욱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좀더 읽어보자.

 

50장의 제목이 "본질의 얼굴-없음", 즉 "본질의 보이지 않음"(l'essence est invisible)(549)이 세계 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을 의미할 때, 다시 말해 초월성에 의한 지평의 열림 안에서 솟아나는 을 결하고 있을 때, 세계의 빛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밤이 본질의 실재"가 된다고 앙리는 말한다. "어떻게 본질은 밤의 지배에 복종하는가? 어떤 힘으로 본질은 밤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자신을 밤에 던지는가? " 그것은 앙리가 밤의 작업(l'oeuvre de la nuit)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완수된다: 어떤 빛의 지평도, 조금의 그 가능성도 없이 근본적인 자신의 내재성과의 절대적인 일치 안에서, "밤의 작업", 밤의 작품은 완성된다. 

 

"밤은 자신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se révèle)것으로 그것이 존재하는 바로서 드러냄의 본질(l'essence de la révélation)을 운반한다. 밤은 이 드러냄의 본질의 드러냄이다. 밤은 특수한 현상학적인 자신의 내용의 실제성을 구성하며, 그것을 규정한다."(550)

 

보이는 것은 유한한 존재자가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한에서만 보이는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빛이 비추는 세계 안의 존재자들만이 빛 안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반면에 현시의 본질이 문제가 되는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 내 존재자도, 세계적인 빛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닌 현상의 현상성 그 자체이다. 여기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은 세계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가시성으로부터, 세계 내 존재로부터 자신을 떼어낸 '여기'로부터만 열려진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 내의 본질의 현시는 그 자체 부조리한 개념이다. ...어둠은 초월성에 의해 열린 지평에서 솟아나는 빛을 결하고 있으며, 세계의 빛에 근본적으로 낯선 개념이다."(549)

 

노발리스로부터 앙리가 끌어내는 "밤의 작업"은 세계의 빛 안에서 현상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말이 세계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밤은 어두움 그 안에서 빛의 세계가 방해하고 제거하는 것, 다시 말해 세계의 현시가 아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시의 본질', 즉 "드러냄의 어떻게"를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것은...드러냄의 본질에서 드러냄의 "어떻게"를 구성하며,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규정한다....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 그 자체로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 본질은 자신의 드러냄 그 자체 안에 감춰져 있다."(551-552)

 

본질의 감춰진 상태(l'état caché de l'essence)는 본질의 본질적인 규정이라고 앙리는 말한다. 그런데 이 "본래적인 옷은, 키에르케고르가 들판에 대해서 정확히 말하는 것처럼 - "들판의 옷과 그 존재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 본질을 덮거나 본질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것"(552)이다.

 

"본질의 감춰진 상태는 본질의 장식(parure)이며, 자신을 주는 방식이며, 결국 자신의 현상성 그 자체이다. ...절대적인 본질의 발견은 그의 것이며, 그에 의해서 구성된 감춰진 상태 안에 존재한다. 빛 안에 본질의 통각이 아니라, 밤 안에서, 이 본질의 본질적인 밤 안에서 그 자체로 본질의 감춰진 상태는, 노발리스가 말하듯 "비록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할지라고 진정한 빛이 어둠 안에서 빛나는 것처럼" 자신의 드러냄과 자신의 현상성의 실제성과 자신의 진리를 드러낸다."(552)

 

이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성의 역설은 모든 본질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가 만나는 것이다. 이미 후설이 현상학은 단지 현상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현상의 보이지 않는 "어떻게"를 동반한다고 했을 때 이미 예감되고 말해진 것이다. 다만 앙리는 이 "어떻게"를 더 근본적으로, 머 멀리 끌고 간다.

 

"밤의 작업, 밤에 의해, 자신의 가능성과 자신의 실제성 안에서 드러냄의 작업에 의한 완성,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밤의 보이지 않고 본래적인 빛으로서의 밤의 결정, 이것들을 이름하는 것은 시의 진정한 말하기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명은 드러냄의 본질을 규정하기 때문이다."(554)

 

시인의 언어는 이 밤에 작업에 의존한다. 시인은 이 성스럽고 신비한 밤을 찬양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밤은 다만 낮의 빛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이 빛의 단순한 제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대립시키는 밤은 세계의 현시로서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빛과의 대립을 통해서 그 빛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작업, 다른 빛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노발리스는 밤의 본질을 생각한다. "세계로부터 아주 먼, 나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을 향해 돌아선다. ...밤. 세계는 멀리 있으며 - 심연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이 세계의 부재는 빛의 부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성의 부재가 아니다."(554-555)

 

밤은 모든 사물들이 잊혀지는 그런 망각이 아니며, 무와 무의식의 잠도 아니다. 반대로 그 안에 진리가 빛나는 것이라고 앙리는 말한다. 그런데 "반짝이는 별보다 다 신적인 것, 그것은 밤이 우리 안에 열어놓은 무한의 눈들이다". 왜냐하면, "밤은 다만 보이지 않는 것의 빛도, 우리를 보게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빛을 산출하는 힘이다. 다만 현상성의 실제성만이 아니라, 그 본질을 산출하는 힘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노발리스는 밤을 어머니라고 부른다."(555)

 

노발리스는 이어서 "밤은 이로써 드러냄을 낳는 풍요의 젖이 되었다"고 노래한다. 이 드러냄의 근원, 드러냄을 낳는 힘은 밤 밖에 있지 않으며, 그것의 실제성으로 오지 않으며, 밤은 이것을 구성한다고, 밤 안에서 밤의 작품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밤은 자신의 작품, 그가 "수정의 샘"이라고 부르는 것을 완성한다. "이 드러냄의 힘 안에 존재의 힘, 의 본질이 자리한다."(556)

 

보이지 않는 것이 순수한 "어떻게"로 남아있기 위해, 다시 말해 그것이 대상이나, 존재자, 혹은 다른 용어로 명명하는 대신 앙리는 이것을 ''이라고 부른다. 삶은 그 자체 하나의 대상으로, 하나의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결정되지 않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삶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지 않음은 삶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실재와 삶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자기를 완성하기 때문이며, 세계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어떤 것도 삶을 담을 수 없으며, 삶을 현시하지 않는다."(565)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은 전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도, 전혀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의 본질로 절대적인 내재성의 영역 안에 완수된다. 그것은 절대로 초월성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것 안에서 더 이성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568)  

 

삶이 전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에 접근할 수 있는가? 삶은 우리가 책을 보듯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그것을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다. 삶은 단지 부정적인 방식으로 밖에는 말해질 수 없다. (사실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그런 부정으로) 삶은 자신을 감추지 않으며, 물러서지 않으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삶은 접근 불가능하며 낯설다 등등. 왜냐하면 나의 삶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가까이 나에게 붙어있어서 나는 나의 삶과 조금의 간격도 가질 수가 없다. 이 간격이 없이는 초월성도 지향성도 지평도 작동할 수가 없다. 더욱이 그것이 무엇인지 들어낼 수도 없다. 나는 그것을 볼 수도 없다. 그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삶 안에만 존재한다. 삶은 우리가 그것 안에서 사는 그런 것이다.

 

나의 삶은 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레비나스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지향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50장의 제목 "본질의 얼굴-없음"은 삶은 얼굴이 없다는 것을, 삶은 지향할 수 있는 얼굴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신을 감추거나 물러서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삶은 나에게 너무 가까이 앙리의 표현대로하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조여오기 때문이다.(étreinte de la vie par elle-meme) 나는 삶을 지향할 수 있는 어떤 거리도 가질 수 없다. 세계에 속하는 것만을 나는 지향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향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에 접근한다. 왜냐하면 삶은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한에서 자신을 현상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기를 현상화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삶은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은 그래서 자기-촉발 안에 있다."(De la phénoménologie, 79) 왜냐하면 삶은 자신이 받은 것을 자신 안에서 촉발하고 느끼고 구성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도 내가 느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엄격히 말해서 "누구도 감정을 본적이 없으며, 감정은 아무것도 보여주는 것이 없다."(680) 왜냐하면 그것은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느껴질 뿐이다. 마치 차가움, 사랑, 고통이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부조리하듯이 말이다. 사랑은 사랑은 느끼는 나에게 느껴질 뿐이며, 차가움은 나의 손에 그 차가움이 느껴질 뿐이다. 나는 이 차가움을 본적이 없으며, 나는 미움을 본적이 없다. 그 미움을 미움을 느끼는 나에서만 느껴질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성의 역설은 - "결국 근본적인 현상학의 모든 탐구를 결정하는 역설(552) -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현상학적이다. 왜냐하면 그 역설은 일단의 명백한, 자명한 일단의 현상들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와 즉각적으로 일치하는 것들 - 나의 삶, 나의 고통, 나의 쾌, 나의 불쾌 ...등등 - 은 보여지지 않으면서 자신을 현상화하는 데에 있으며, 단지 그것들을 느끼는 데에서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향 없이, 다시 말해 가시성 없이 드러나는 현상들, 다만 느낌의 촉발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현상들을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하거나, 그것을 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이 현상들을 죽이는 것이 된다. 삶은 그래서 밤의 현상으로 남는다.

 

                                                     ***

 

현상성의 애매성, 다시말해 두 목소리, 보이는 세계의 현상성과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성의 구분은 앙리의 『현시의 본질』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의 사실이다. 현시의 본질은 우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조적인 이질성"(562)을 정립한다. 이 이질적인 구조는 "극복될 수 없고 규정적인 존재론적인 이질성"(563)을 확립한다. 보이지 않는 것과 세계 사이의 대립은 존재와 존재자의 대립도, 어떤 종류의 영역적인 존재적 차이의 영역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대립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환원되는 것의 불가능성"(562)을 극단적으로 지시하고 확인시킬 뿐이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과 보이는 지 않는 것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이행되어질 수 없으며, 어떤 통로, 어떤 시간도 그 둘을 연결할 수가 없다. 이 둘은 절대적인 간격(écart)으로 남는다."(561) 이 둘 사이의 간격은 둘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한다. 하이데거나 헤겔과 달리, 차이는 소위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해서 어떤 관계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두 현상성 사이에는 망각도 갈등도 없다. 다만 "차이에 대한 무관심성(indifférence de la différence)"(561)만이 존재한다.  바로 이 무관심성은 차이를 중성화하면서 근본적인 두목소리, 애매성을 현상성에 부여한다. 이 무관심적인 차이은 동시대의 다른 현상학자들로부터 그를 차별지우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어떤 현상학자도 이런 극단적인 차이에 이른 현상학자를 만난 적이 없다. 레비나스도 데리다도 사르트르도 앙리만큼 극단으로 달리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데리다가 말하는 타협(négotiation)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가 프랑스 현상학자들 중에 극단적, 근본적이라는 사르트르도 『존재와 무』에서,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 절대적인 구분을 세우면서도 이 둘 사이의 구분은 현상들 간의 전이적 존재(l'être tranphénoménal des phénomènes)(『존재와 무』, Gallimard, 1943, 29)의 내적 영역 안에서의 구분으로 말해진다. 이 존재의 형식적인 한 목소리, 단일성은 한 존재의 현상성의 양태들의 한 목소리로 전이된다. "우리가 현상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존재의 두 영역으로, 즉자의 영역과 대자의 영역(이 관점으로부터 하나의 현상만이, 세계만이 존재한다)"(사르트르, 719). 세계만이 유일한 현상성의 양태가 될 뿐만 아니라, 현상성의 두 양태들(즉자와 대자) 사이의 연속적인 이행을 설립한다. 왜냐하면 즉자의 파괴, 무에 대응하는 대자,...이러한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두 양태, 즉 있는 바의 것이어야 하는 대자의 양태, 다시 말해 있지 않은 것인, 있는 바의 것이 아닌 것과 있는 바의 것인 즉자의 양태"는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자와 즉자는 대자 그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닌 종합적인 연결에 의해 결합"(711)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에게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존재의 두 양태의 근본적인 구분은 이행, 변형을 완성한다. 반면에 『현시의 본질』은 둘 사이의 어떤 종류의 이행도 불가능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1964년 출판되었지만 그 쓰여진 연대는 1959-1960 사이이다. 따라서 그가 이 책을 쓰는 동안 1963년 출간된 앙리의 책을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앙리와 유사해 보이는 진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59년 11월>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는 글에서 "감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 보이는 것에 모순이 아니다: 보이는 것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 것의 한 구성요소(une membrure, *한 신체를 구성하는 사지 중의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l'in-visible) 보이는 것(le visible)의 비밀스런 상관자(contrepartie)이며, 전자는 후자에 속할 뿐이다. 그것은 Nichturpräsentierbar(몇 페이지 뒤에 메를로-퐁티는 이 단어를 "un originaire de l'ailleurs, un Selbst qui est un Autre, un Creux, 저기에 존재하는 원천, 타자인 자기, 구멍"(308)라고 말한다)로 다만 세계 안에 그 자체로 나에게 현전할 뿐이다 - 우리는 그것을 세계 안에서 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거기서 보기 위한 모든 노력,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 그런데 그것은 보이는 것의 에(dans la ligne) 존재하며, 그것은 보이는 것의 잠재적인 임시적인 머뭄이며, 그것은 보이는 것에 기입된다."(메를로-퐁티, Le visible et l'invisible, Gallimard, 1964,  269) 메를로-퐁티는 앙리와 유사하게 놀랍게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에 모순되지(contradiction) 않는다"라고 말한다.(앙리는 위에 본 것처럼 "반명제(antithétique)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메를로-퐁티는 결국 사르트르와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절대적인 부정성이다. ...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만지는 것-만져진 것(touchant-touché)은 사유 혹은 의식에 의해서 행해진다: 사유 혹은 의식은 세계 혹은 존재 ....의 신체성의 열림(Offenheit)이다."(308) 메를로-퐁티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앙리와 마찬가지로 다만 보이는 것으로 지양되는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즉자의 우선성"을 상기하라.) 그 자체의 현상성을 가지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현상성을 보이는 것, 다만 그것에서 빌려온다. "내가 모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때, ... 가시성(la visibilité) 그 자체가 비-가시성(la non-visibilité) 전적으로 동반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300) 따라서 메를로-퐁티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곧 다가오는 것(immminence)으로 보이는 것에 환원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현상성을 지니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단지 "보이는 것이 상관적인 것"으로, 직관에 형상을 부여하는 칸트적 개념 혹은 선험성의 요청을 따라서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한 구성요소일 뿐이며,,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발을 은밀히 집어넣으면서(empiétement)"(269) 현상화한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산출하기 때문이다."(269) 결국 메를로-퐁티의 보이지 않는 것의 분석은 앙리의 것을 뒤집는다: 보이는 것에 매달려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현상성 없이 세계 혹은 존재의 신체성으로부터 들어 올려진다. 무수히 반복되는 메를로-퐁티의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상기하면 이러한 결론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 안에서 나에게 현전한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동일한(même)이 세계 안에서".... "이 유일한(seul) 세계 안에서"...혹은 "보이는 것과 같은 선 상에서(dans la ligne)" ...보이는 것의 상관자(contrepartie)....일 뿐이다. 레비나스와 앙리가 모두 메를로-퐁티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바로 이 존재 혹은 세계의 현상성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환원한다는 사실이다. 지젝이 정확히 헤겔과 하이데거의 변증론에 의존하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입장에서, 레비나스와 데리다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라캉을 읽는다. 라캉이 여기에 머무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후설, 누가 뭐라고 해도 후설로부터 모든 글쓰기의 기원을 찾는 앙리에게, (물론 그는 레비나스보다 한층 후설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 이름은 레비나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상 이중적이다. 후설은 물질적 현상학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대상의 본래적인 대상성(objectitié originelle Urgegenständlichkeit)을 위해 항상 뒤로 물러선다. 51장의 한 주에서 밝히고 있듯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보다 일반적인 공통의 유(genre commun,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에게 존재 혹은 세계)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그것에 수렴되지도 않는다".(561) 앙리가 후설에서 받아들이는 유일한 것은 "현상성의 순수히 형식적인 개념"이다. 그것의 일반성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혼동함이 없이 같은 지위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각각의 개념은 다만 "형식적인 존재론"이라는 이름에 의해서만 그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 이 형식적인 존재론에 대한 비판은 후설 이후의 거의 모든 현상학자들, 하이데거를 포함해서, 레비나스 엉리가 비판하는 것이다. 반면에 데리다는 앙리나 레비나스, 하이데거처럼 후설의 형식존재론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리에 자신을 기입한다. 최소주의자들이 데리다를 비판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앙리의 이 형식 존재론의 비판은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추상성, 이론성으로 인해 현상성의 현실(réalité), 즉 그것의 현실성 혹은 사실성 혹은 실제성(effectivit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인 혹은 구체적인 존재론의 영역에 이 현상성에 뿌리를 내리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둘을 혼동함이 없이, 하나를 다른 하나로 이행함이 없이, 각각이 근본적인 본질들을 구성한다. 결국 두 목소리(équivocité*나는 이 말을 여기서 애매성이라고 옮기지 않는다. 이 애매성은 섞임을 의미하는 애매성이 아니라 현상성이 두 목소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애매성도 메를로-퐁티의 것과 구분되면서, 앙리의 의미와 일치한다)의 현상성을 구성한다. 이 애매성, 이 두 목소리, 이중성을 형식적인 존재론은 이 둘 사이의 존재적 차이(différence ontique)를  모르기 때문에, 잠재울 수도 피할 수도 없다고 앙리는 말한다.

 

하이데거, 그 이름은 프랑스 현상학자들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레비나스가 그에 대한 빚, 후회스러운 빚이라고 말하는 그 빚은 프랑스 현상학자들의 얼굴에 들인 그늘과 같다. 그가 돌려 놓은 후설의 현상학에 의존하면서 한편으로 하이데거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 그가 후설을 넘어서면서 이른 그의 기여를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그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명백히 들어내야 하는 프랑스 현상학자들에게 그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현상학의 역사에 기입하는 데에 있어서 분명 그렇게 쉽게 부정되지고 반박되어질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앙리의 주된 비판은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후설이라기 보다는 하이데거로 향한다. 그런데 그 비판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그로부터 받은 어떤 영감, 그가 현상학의 역사 안에서 열어 놓은 현상학적인 새로운 지평을 자신의 철학의 전제로 삼으면서 행하는 비판이라는 사실에서 그 두 철학자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은 말보다 쉽지가 않다. 『현시의 본질』 51장의 한 주, 다른 한편, 『질료적 현상학』(특히 2장, "현상학적인 방법")에서 그리고 그의 사후에 출간된 유고집(Tome I, 『현상학에 대하여』, 2장 "삶의 현상학")에서 보이는 하이데거와의 문제는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7장에 대한 앙리의 의존과 동시에 비판을 보여준다.

 

『존재와 시간』의 7장을 잠시 읽어보자. 하이데거는 여기서 현상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ce qui se montre)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현시한다". 따라서 현시와 현상성은 열림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혹은 현상은 "자신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라는 정의에서 보듯이 현상학의 과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놓인다. 따라서 현상은 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자기로부터의 자기-현시는 칸트적인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앙리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현상학의 출발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출발점, 이 결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이 결정이 가지는 애매성(ambiguité)에 대해서 말한다. 본질의 현시 2부에서 앙리는 "존재는 자신을 스스로 들어내야 한다는 이 진술은 애매하다"(165)라고 말한다. 그 애매성은 물론 보이는 것과 현상성, 보이지 않는 것과 현상성을 다루는 하이데거의 방식의 애매성을 지시한다. 하이데거는"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 자신을 감추고 있으며(est en retrait, vervogen ist), 그것은 동시에 ...우선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속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드러나지 않은 것,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드러나는 것에, 아직 현상이 아닌 것이 현상되는 데에 이른다. "현상학의 현상 뒤에는 감춰져서 이러서 현상이 될 것과 다른 것을 본질적으로 지니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현상들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 현상학의 과제가 주어진다. 감춰진 존재는 현상의 상관(반대)개념(contre-concept)이다. 앙리는 여기서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반명제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ne se montre pas)자신을 드러내는 것의 첫번째 계기이며, 그것의 원초적인 결정이며, 동시의 그것의 한정된 양태"(558)이다.이 모든 것은 결국 현상학적 방법의 질문으로 향한다. 현상학적 방법 - 감춰진 것을 열어보임, 빛을 비춤 - 필연적으로 그것이 드러내고자하는 현상과 일치하는가? 어떤 일단의 경우에, 현상학과 그 방법의 대상의 동일성은 그 자신의 명증성을 상실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삶의 현상화가 문제가 되는 경우, "삶은 보이는 것의 영역을 회피한다면, ...이 경우 이 대상의 동일성은 그 방법의 동일성은 갑자기 단절되며, 그것은 우선 사유에 심연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이질성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물질적 현상학』,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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