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가 자신의 글쓰기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언급하기를 그치지 않는 "현상학은
그에게 우선 탁월한 방법론으로, 본질적으로 열려있는 것이다." (EDE, 111) 그렇다고 해서 "칸트주의가 칸트주의자들을 모으는
것처럼, 스피노자주의가 스피노자주의자들을 모으는 것처럼 현상학이 철학자들을 모으는 것"(112)에 저항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현상학은 현상학의 기술(technique)에 따라서 현상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현상학의 방법론적인 열림은
표상적인 사유와의 단절에, 그리고 대상들의 나타남에 동반하는 함축적인 것에 주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벙법은 레비나스에게
"사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것"
이라는 공식으로 반복된다.
"지향성은 대상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그 안에, 본질적으로, 함축적인 어떤 의미를 지닌다. 사물의 현전은 그것이 모르는 사물의 다른 현전,
함축적인 지향의 상관적인 다른 지평을 함축한다."(EDE, 130)
이 "지향 이상의 것", 후설이 <데카르트적 성찰> § 20에서 "Mehrmeinug" 이라고 말하는, 의식의 본질적인 수동적인 상관자는(후설의 이 수동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에게 현상학의 가르침 그
자체이며, 현상학적 방법의 탁월함 그 자체로 드러난다.
"후설의 현상학은 우리에게 의식의 상태들을 존재 안으로 던지는 것도, 객관적인 구조를
의식의 상태로 환원하는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현상학은 모든 객관성보다 더 객관적인 주관적인 것의 영역을 발견했다. 순수한 자아는 이 영역에서 자기 자신에 의해서 구성된 "내재성 안의 초월성"이다.(EDE, 131)
이러한 후설의
읽기로부터 이제 레비나스의 사유는 동일성의 사유에서 타자의 사유로 이행한다. 이러한 전향은 후설과의 단절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비-지향적인 사유, 즉 비-대상적이 사유를 말하면서, 여러번 "더 이상 여기서는 현상학이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듯이 그는 후설과의 단절을 선언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는 다른 한편 자신이 현상학자임을 고집한다. 그것의 알리바이는 "어떤 한 철학자를 이해하는 것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혹은 "씌어진 후설을 넘어서 후설을 읽는 것"이다. 혹은 메를로-퐁티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듯, "사유되어진 것에서 사유되지 않은" 철학자의 그림자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제스추어들은 모두 후설의
글쓰기 안에서 드러나는 긴장을 그 한계에 머물면서 그 한계의 가능성을 극단으로까지 사유하는 것이다. 그 한계의 머뭄 안에서 후설의 지향적인 사유에서 드러나지 않는 비-지향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변명,
알리바이들을 넘어서 후설과 레비나스를 그 유산에서 연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레비나스가 후설의 글에서 처음부터 그 자신의
탐구의 중심으로 삼았던 현상학의 의미의 구조이다. 레비나스가 읽는 후설은
논리연구에서부터 그가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의 구조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결여된"(Husserl, 내적 시간의 의식, puf, p. 99, Derrida, <목소리와 현상>, puf,
p. 94, 주 1) 것이라고 후설이 부르는 것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이름을 주고자 하는 시도이다.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명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사유에 대해 후설은 시간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이름이 결여된"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유는 하나의 기호가 대상화되기 전에, 이것을 이것으로서 의미하기 전에 그 기호가 의미하는 것을 의미화한다. 레비나스가 <의미, signifiance>, <흔적의 의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철학사에서 동일자 안의 타자라는 이 보이지 않는 기입에 주의할 때 우리는 하나의 이름과 만난다. 그 이름은 칸트이다. 레비나스가 인용하기를 그치지 않는, "칸트는 후설보다고 더 대담하다"(EDE, 139)고 말한다. 후설 위에 놓는 이 칸트의 대담함은 무엇인가?
" 후설 현상학의 기여는 지향성 혹은 타자성과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두 극으로 나누면서 고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있다. 물론 후설이 초월론적인 현상학에 의해 객관적인 지향성이 극복되는 것에 대한 분석과 해석의 방식이 초월론적인 지향성을 다른 직관들로, 마치 [라이츠니찌의]"작은 지각들"로 이끄는 것에 있다. 그런데 환원은 절대로 완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은 지각들 각각은 한 초월론적인 지평을 또 다른 초월론적인 지평으로 무한히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초월론적인 활동을 직관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비록 이 거부가 초월론적인 것을 주체의 내재성 안에 가둔다고 할지라도, 칸트는 초월론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 밖에 놓는다. 초월론적인 활동의 타자는 봄의 대상으로서 고정하는 대신에 종합 혹은 연결의 결과로부터 솟아 오른다는 사실은 표상과 대상의 보편적인 지배의 종말을 알린다."(EDE, 250)
위의 인용에서 레비나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칸트는 <표상의 붕괴>에 있어서 , 그것의 실천의 있어서 후설보다 철저하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데리다의 <목소리의 현상>과 관계된 후설을 언급하면서 레비나스는 "존재의 철학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철학도 존재의 철학을 위해 직접성에
호소하면서 초월론적인 가상은 시작된다.(...) 직접성은 다만 명상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초월론적인 가상이다." (De dieu qui vient à l'idée, p. 181.) 초월론적인 가상과 관련하여 레비나스는 다시 칸트를 불러낸다. 왜냐하면 위의 진술은 칸트에게도 가능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길지만 다 읽는다.
"우리의 철학의 전통에서, 진정한 사유는 참인 사유, 인식, 존재와 관계하는 사유이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자를 지시하며, 또한 존재의 운명과 그것의 과제인 존재자들에 의해 완성을 표현하는 동사로서 이해되는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존재 없이는 우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인식할 수조차 없다. 칸트는
이념과 개념,
이성과 오성을 구분하면서, 그는 사유(la pensée)와 인식(connaître)을 분리해 낸 최초의 사람이다. 그리고 존재와
결합하지 않는 의미작용들(significations)을 발견했으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성의 범주와 이 범주들과 상관적인
실재에 복종하지 않는 의미작용들을 발견했다. 이 존재와 구분되는 사유는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insensé, 부조리한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이것은 칸트에 의해 사유가 지향하는 사물 그 자체의 공허로서 이해되어 졌다. 사유는 여전히 그에게 결여되어 있는
존재에 따라서 측정된다. 이념들은 따라서
변증적 - 칸트가 그 말에 부여하는 멸시적 의미를 가지고 - 지위를 가진다; 초월론적인 가상은 - 이념들에서 일어나는 - 바로 이
존재를 호흡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드라마이다. 모든 것은 마치 존재의 가상과 인식이 이성성과 정신에 대응하는 듯이,
마치 의미의
의미작용 - 알려질수 있음성(intelligibbilité) - 이 존재의 현시에서 유지되는 듯이, 그것이 존재론인 듯이, 그것이
의지와 존재의 향수의 지향성에 의해서 일어나는 듯이 일어난다. 물론
존재론의 이러한 재봉기를 거쳐서 칸트는 결국 보다 근본적인 구분, 즉 사유와 지식의 구분에 이른다. 그는
순수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 존재와 상관없는,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한 상황(une intrigue 복잡한 사건들이 얽힌 드라마)을
발견한다. 존재로부터 그에게로 올 수 있는 정보들에 귀가 멀어 있으며, 그 주장들에 무관심한 (정보들과 주장들은
기술technique과 가정적인 명령에서 중요하지만, 실천과 범주적 명령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선의지 - 유토피아적인 - 는
존재 위에, 그리고 지식과 무지
아래 놓인 자유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한 순간의 분리
이후에, 존재론과의 관계는 <순수 이성의
요청들postulats>에서 다시 회복된다. 마치
이것이 그의 모든 대담한 모험 한 가운데 잠복하고 있었던 듯이: 이념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비판의 언어로 말하면, 덕성과 행복의
일치를 보증하는 혹은 헤르만 코헨의 말을 따르면 자유와 자연, 그리고 인식 없이 결정되는 실천의 효용성의 일치를 보증하는 신의
실존 안에서 존재와 결합한다. 순수한 이성의 이상이라는 절대적인 실존, 즉 최상의 존재의 실존은 결국 자유가 그 건축의 주축돌이
되어야 하는 그 건축 안으로 도입된다."(De dieu qui
vient à l'idée, 189-191)
위의 칸트의 철학에 대한 긴 문장을 읽다보면 우리는 칸트 철학과 존재론과의 관계에서 칸트의 존재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는 칸트의 사유의 전진과 후퇴의 운동에 정신이 아찔할 수도 있다. 어디에 칸트는 자리하는가? 이러한 칸트 읽기는 또 무엇인가? 칸트에 대항한 칸트 읽기.
이제 우리의 칸트 읽기는 레비나스로부터 출발해서, 현상학을 경유해서, 칸트를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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