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 물질 현상학

aurorepark 2009. 10. 29. 05:58

미셸 앙리(Michel Henry, 1922-2002), 프랑스의 현상학자들 중에 서 가장  '근본적'이라고 불리는 그는 후설의 현상학이 지닌 가능성을 그 근본으로까지 이끌고자 한다. 앙리는 후설의 『이념 I』 § 85에서 처음 등장하는 질료 현상학 (phénoménolgie hylétique)의 가능성, '형상 없는 질료의 현상학'의 가능성을 진단했던,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던 후설의 그 불가능성을 다시 질문한다. 사실 이 두 말(hyléthique, matérielle)은 씌어진 글자가 다르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하나는 희랍어 üλε에서 다른 하나는 라틴어materialis에서 그 어원을 각각 가진 것으로 같은 것을 지시한다. 앙리는 질료와 형상의 쌍 개념이 그리스 이래로 항상 질료가 형상에 종속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을 벗어나서, 형상의 개념의 쌍이 아닌 후설이 다만 인식의 비실재적인(irréel) 계기라고 부른 질료의 비독립성을 제거하고 이 질료에 독립성과 실행성(effectivité)을 부여하면서, 현상학에 질료적 (hylétique)라는 말 대신에 물질적 (matériel)이라는 이름을 준다. 이것은 명명을 통해 한 전통과의 단절이면서 하나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이 명명으로부터 새로운 현상학, "물질 현상학"이라는 고유명이 탄생한다. 이 가능성은 독일의 본질 현상학과는 다른 프랑스의 일단의 현상학자들 - 레비나스, 블랑쇼, 데리다, 앙리 - 을 특징지운다.


후설의 『이념 I』의 비밀을 여는 열쇠인, 한 구절 - "나는 존재한다, 이 삶은 존재한다, 나는 산다: 나는 생각한다"(§ 46) - 를 인용하면서, 앙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의 삶인 이 삶은 나의 나(mon Je)이며, 그것은 나의 본질이며, 그것은, 후설의 눈에도 궁극적인 실재, 근원적인 영역(Urrégion)을 규정한다. 존재의 다른 특수한 영역들 - 감성적, 지적, 상상적, 기호적, 문화적, 미적, 윤리적 - 모두는 이 영역과 관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삶은 보편적이며, 나의 것이기 때문에, 생각되어질 수 있는 모든 실재(réalité)의 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삶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초월론적인 삶 (la vie transcendantale)"을 지시한다."(Incarnation. Une philosophie de la chair,( I ) <육화. 살의 철학>, Seuil, 2000, p. 94) 


코기토(Cogito), 이 삶, 이 장소, 자기성 (ipséité)이 머무는 '장소', 절대적으로 주체적인 삶의 "살아있는 현재 (le présent vivant)", 여기는 삶이 자기를 앉히는 자리이며, 자기를 시험하고 체험하는 장소이며, 삶이 삶을 낳는 장소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며, 나의 신체이며, 나의 살이며 피며, 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이 머뭄, 집 (la demeure) 안에는 무수한 자리들이 존재하게 된다" (I, p. 91) 이 머뭄, 집은 앙리에게 절대적인, 그 말이 지시하듯이 섞이지 않는 내재성의 영역을 지시한다.


삶, 머무는 것으로, 끝없이 지나가면서 지나가지 않는다. 근원, 마르지 않는 샘처럼 모든 것이 생성되는, 세계의 근원, "삶의 내적 본질 안에는 더 이상 탈-자 (l'ek-stase), 즉 과거도, 미래도 없다. 이 말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에크하르트(Eckhart)가 "어제 일어난 일은 나에게 만오천년 전에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멀다"라고 말했을 때, 이러한 삶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1996 대담, "예술과 삶의 현상학" in Phénoménologie de la vie, Tome III, De l'art et de la politique, Puf, p. 308)라고 앙리는 진술한다. 앙리에게는  죽음도, 따라서 세계도 없다. 죽음의 사유는 탈자적 사유와 세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블랑쇼, 데리다 그리고 앙리를 함께 읽도록 해주는 이 '머뭄', '집'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들이 각각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같은 사유의 흐름 안에 놓여 있다. 데리다의 '유령'은 순수한 삶도 죽음도, 그 둘의 섞임도 아니다.  그것은 "살아 남은 것 (survivance)", 잔여, 흔적이다. 모든 삶은 "원천적으로" 살아 남은 것(sur-vie)이다. 현상학의 원천적인 소여의 전적인 현전에 대한 비판은 그의 현상학적인 줌(don), 존재가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주는 줌에 대한 기술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줌, 그것은 남김없이 자기를 주는 전적인 관대함을 표현한다. 데리다에게 모든 현상은 블랑쇼가 말하는 원천적인 부재로부터만 주어진다. 그런데 이 부재는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부재자로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부재와 현전의 전적인 분리에 위기를 가져오는 전염을 말한다. 부재도 현전도 남김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현상학의 "원리들 중의 원리"인 원천적 줌, 혹은 증여(la donation originaire)(이념I § 24)가 불가능하다면, 현상학은 그 자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불가능성 그 자체, 현상학적인 요구와 방법과 결합할 수 없는 이 불가능성 그 자체는 역설적이게도 현상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이중구속의 상황은 현상학의 상황 그 자체를 구성한다. 프랑스 현상학자들 중에 가장 근본적이라고, 그래서 근본적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앙리는 바로 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이들이 이 가능성의 불가능성 안에서 알려져 오는 가능성을 말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뉴앙스"라고 부른다.          


"후설은 코기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드러나고, 나는 나에게 드러난다. 이 자기-나타남(auto-apparaître)은 삶과 일치한다. 그런데 후설은 더 이상 멀리 가지 않는다"고 앙리는 말한다. 후설에서 시작해서, 그 안에서 현상학의 가능성을 더 멀리 더 깊이 밀고 파는, 그래서 고정된 원리와 규칙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지도 않는 그래서 프랑스 현상학은 "살아있다"고 말해진다. 그래서 앙리에게 진정한 현상학적인 질문은 "어떻게 이 나타남이 나타나는지, 이 나타남의 현상학적인 재료, 질료, 물질(matière)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어떻게 이 나타남이 정확히 나의 것인지, 이 나타남이 자신 안에 "나(je)"를, "자아(moi)를 동반하는지, 그리고 이 나타남이 자기성(ipséité)과 자기(Soi)의 관계인지를 아는 것이다."(I, 94)


앙리는 후설의 현상의 개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세계로, 자기 밖으로 열리는 탈-자의 방식이 아니라, 나타남의 이중성의 다른 측면, 즉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현상이 스스로 자신을 현시하는 운동과 나의 관계로 이행하는 것이다. 앙리는 나타남의 두 측면을 근본적으로 대립시킨다: 세계의 탈자적인 나타남, 즉 초월성(transcendance)과 앙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내재성(immanence)의 자기-나타남을 대립시킨다. 그에게는 이 둘 간의 섞임이 없다. 말하자면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키아즘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능동과 수동이 섞이는 애매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삶의 현상학은 세계 밖에서, 세계라는 지평 없이, 단지 삶의 내재성 안에서만 정의되는 삶, 우리가 초월론적(transcendantal)이라고 부르는 삶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데에 있다. 이 내재성만이 그에게는 실제적이고 실체적인 실재, 실행성(effectivité)이다. 세계가 자신의 탈자적 운동에 의해서 자기 밖으로 모든 존재를 내쫓는 것이라면, 그로 인해 세계는 자기의 내재성을 피괴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자기 안에서 존재하고 동시에 나타나는 것,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자기 안으로 가져오는 것 그것만이 실재적이고 실질적인 실재이다. 이러한 실재는 그의 "모나드적 형식"(L'essence de la manifestation, (EM, Puf, 1963), p. 53)으로 나타난다.


모나드, 자신의 존재의 원리를 내면에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창문이 필요 없는 모나드적 존재자와 다른 방식으로, 다자인, 아니, 차라리 하이데거가 그렇게 쓰기를 선호하듯이, 다-자인(Da-sein)은 '거기'에서, 존재자 인간이 존재의 의미의 현시에 열려있는 장소로 따로이 열리기 위해 창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장소는 처음부터 이미 '자기 밖'으로 열려 있는 , 자기의 자기성의 열려있음(apérité) 그 자체로 다자인은 대면으로서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본래적으로 "세계-내-존재"이다. '거기'는 마치 창고처럼 존재가 자신의 위탁물을 내려 놓는 장소로 여기서 인간은 존재에 전적으로 열려있다. "인간 안의 다자인(Dasein en l'homme)"( 『1929년 Davos에서의 하이데거의 연설과 대담』, Dialogue sur le kantisme et la philosophie, Beauchesne, 1972, p. 40) 이라는 카시러의 탁월한 공식이 보여주듯이 "철학자의 의무는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떼어내서 인간을 존재자의 전체(le tout de l'étant, 이 전체, 하이데거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로 인도하는"(하이데거의 발언, 위의 대담 중에서, p. 46)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의 다자인의 초월성", 인간 실존의 탈-존(l'ek-sistence), 외-재성, 즉 인간의 다자인의 무(né-ant), 즉 전혀 존재자가 아님(rien d'étant)을 해방하는" 데에 있다.


미셸 앙리에게 존재의 줌, 증여(donation)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초월성이 아니라, 초월론적인 규정내재성의 자기-촉발(auto-affectivité)의 '어떻게'에서, 그 실행성, 즉 현상성의 현상화에서 주어진다. 자기-촉발은 데카르트가 제 2 성찰의 "videre videor " "내가 보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 같다(il me semble que je voir)" 고 진술했을 때, 이 "...과 같음(semblance)"에서 나는 내가 보는 것을 보는(sentimus nos videre)것처럼 내가 나를 느끼는 것을(se sentir soi-même) 말한다. "이러한 자기 안에 주체성의 도래, 이것은 '자기-촉발'이다. 이것은 개념도, 어떤 본성의 전제도 아닌 스스로 자기를 느끼는 원초적인 사실이다. 이 안에서 현상의 현상성이 자기 안으로 퍼진다." ("철학과 주체성", Tome II, De la subjectivité, Puf, p.52) 앙리가 여기서 말하는 촉발은 존재를 주는 삶의 "원초적인 형식(la forme primitive)"(위의 책, 52)으로 어떤 것, 우리에게 익숙한 경험적인 정서적 감응(affection)과 혼동되지 않는다. 그래서 촉발은 - 비록 그것의 근본적인 나타남의 양태가 고통과 향유에 있다고 할지라도 - "모든 존재하는 것의 줌, 증여에 속하"는 것으로 초월론적인 규정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나타나는 모든 것, 그것이 세계로부터이든, 영혼으로부터이든, 주체로부터이든 대상으로부터이든, 나타나는 모든 것은 이 촉발 안에서, 이 촉발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촉발은 감각, 상상, 개념, 의지, 의심, 확실성 등등과의 심리적인 겹침에 의한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 각각의 양태들이 우선 자기에 도래하고 이어서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겪는 근본적인 어떻게(comment)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체험하는 순수히 현상학적인 물질성(matérialité)이다. 이로부터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자기로부터 촉발(auto-affection)되어 나오는 모든 과정, 스스로 자기에게 주는, 모든 것이 주어지는 과정, 어떻게를 앙리는 삶의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현상학의 근본적인 문제, 누가?, 어떻게?, 존재가 주어지는 가의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이다. 물질 현상학』(1990) 처음에서부터 앙리가 밝히고 있듯이, 현상학은 후설과 하이데거가 잘 보여주듯이 다만 드러나는 것(ce qui apparaît), 즉 현상들을 기술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타나는 양태, 어떻게, 즉 현상의 현상상(phénoménalité)을 밝히는 데 있다. 이 현상상을 밝히는 데 있어, 앙리는 앞의 둘과 다른 방식으로 대답한다. 이 책의 제목, matériel은 순수한 현상학의 물질성, 즉 형상의 옷을 입지 않은 '제일 질료', 현상학자들이 가공되지 않은 원료, 천(étoff)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확히 감각적 인상들을 지시한다. 앙리의 이 용어 '물질적'을 '비물질적'이라는 용어에 대립으로, 다시 말해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이라는 이 철학사의 거인들의 싸움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그의 글을 읽는 데 길을 잃는다. 이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대립은 현상학 내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대립으로, 내재성과 초월성, 인상성과 지향성의 대립이다. 다시 말해 의식의 가지는 두 측면, 의식의 내재성, 즉 의식의 흐름으로 내적 소여, 질료적 물직적 소여, 내용, 인상, 다른 한편 초월성, 형식으로 의식의 내용이 드러나는 지평, 빛, 지향성을 지시한다. 이러한 현상학 내의 경제 안에서 앙리는 후설의 지향성의 우선성과 이로부터 발전한 하이데거의 배려(souci), 즉 세계로의 열림을 위해 주체를 자기로부터 떼어내는 탈-자의 방식에 반대한다. 앙리에게는 내적인 것만이 근본적인 것으로 존재를 주는 것이다. 모든 현시는 지평을 여는 행위, 즉 자기를 밖으로 던지기 이전에, 세계로 열리기 이전에 자기 안으로의 열림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현시의 본질』에서 "내재성은 초월성의 본질이다"(EM, 312)라는 진술을 얻는다. 물론 이러한 근본성은 후설 그 자신이 제공한 것이다. 앙리는 후설이 지향의 시선으로 인해 의식의 존재, 내재성, 그가 열어 놓은 내재성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물질 현상학(PM) 의 1장에서 앙리는 후설의 질료적 현상학(phénoménologie hylétique)을 다룬다. 여기서 앙리는 주체의 주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비지향적인 질료인지, 지향적인 형상인지를 질문한다: "인상의 인상성, 즉 인상의 촉발이 자기 안에서 자기에 의해 현시의 기능, 즉 현상학적인 기능을 이미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21) 후설처럼 지향성이 의식의 존재를 규정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인상의 인상성이 의식 그 자체를 규정한다"(33)고 말한다. 후설처럼 "의식은 인상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앙리는 이 주장을 더 밀고 나가서 "의식은 인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재가 주체성, 즉 삶이 자기를 스스로 체험하는 데에 있다면, 인상이 스스로 느끼는 데 있는 한에서만 삶의 실재는 나에게 주어질 수 있다. 고통을 느낄 때, 어떤 지향적인 의식이 이 고통을 현재로 지향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고통에 의해 고통으로 실려간다."(36) 마치 물의 흐름에 내가 실려가듯이 나는 여기서 전적으로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떤 거리도 없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숨막힘, 더 이상 물러 설 자리가 없는 곳까지 몰린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통은 존재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망이나 물러섬의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지시한다. ...극심한 고통은 삶에 존재에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까지 밀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무의 불가능성이다."(TA, 55-56) 레비나스는 앙리와 마찬가지로 고통은 죽음의 불가능성 안에서  혼자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se sauver soi-même tout seul), 다시 말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불가능성 그 자체이다. 반면 앙리에게 인상은 자기-촉발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최소한의 지향성,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차이, 간격도 없다.


"봄이 자신을 자신에게 드러내는 이 드러내는 힘(le pouvoir de la révélation)은 삶의 지식, 삶이다. 봄이 자신의 보는 것, 즉 대상을 발견하는 그러한 드러내는 힘은 인식의 지식이다. 여기에 이어서 과학과 인식 일반이 자신을 근거짓는다. 여기서 두 힘은 후자가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이 관계를 궁극적으로 근거짓는 것 - 최초의 간격의 출현, 지평과 거리두기, 탈-자 - 안에서 자신을 고갈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힘을 설립하는 현상성은 초월론적인 외재성의 현상성이다. 모든 종류의 외재성과 객관성, 그리고 물론 과학적 세계의 객관성이 형식을 취하는 것은 모두 이 안에서이다. 반대로 삶을 계시하는 힘 안에는 간격도 차이도 없다. 삶은 거리 없이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이 체험의 현상성은 촉발성이다."(『야만』, 28)   


후설에게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의 질료는 현상성의 타자이다. 이제 앙리에게 현상, 질료는 현상성의 본질 그 자체가 된다. 다시 말해 질료, 현상은 스스로 자기에게 의미를 준다 : "현상은 더 이상 현상학의 "어떻게 안에서 파악하는 대상"이 아니다. 현상은 새로운 땅에서 더 이상 세계의 법칙들이 아닌, 사유의 법칙들이 아닌, 삶의 법칙에 의해 존재한다."(PM, 58-59) 이로써 현상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