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본질과 의미
그런데 전-기원적인 것과의 관계는 회복되어질 수 있는가?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책임 있는 자의 대답은 이 통시성을, 마치 그것이 잊지 않은, 다시 기억된, 혹은 역사적으로 다시 구성된 그런 것처럼, 주제화하지 않는다. 이 대답은 주제화 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대답하는 자의 허약함, 그것을 자신 안에 담을 수 없는, 그것에 대응할 능력이 없음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비-현재는, 그 자신의 광대함 혹은 그 자신의 “최상의” 미천함 혹은, 최상급 그 자체의 보기인 그의 선성으로 인해 내 안에 전부 끌어안을 수 없음(in-compréhensible)1이다. 비-현재는 여기서 보이지 않으며, 분리된(혹은 성스런)2, 그리고 이로 인해, 비-기원, 비-원리이다. 주제화할 수 없음의 그 불가능성은 통시적인 것의 선성(la bonté)에서 유지된다. 선(le Bien)은 현재화될 수 없으며, 표상의 질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현재는 나의 자유 안에서 그 시작을 가진다면, 선은 자유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 내가 그를 선택하기 전에 그가 나를 선택한다. 누구도 의지적으로 선하지 않다. 그런데 선을 선택할 시간을 가지지 않는 주체성은 선의 선함 그 자체이며, 그로 인해 주체성은 자기도 모르게 선의 광선에 의해 침투된다. 비-자유의 형식적 구조를 그리고 있는 주체성은, 예외적으로, 선의 선성에 의해 이 비-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본다. 예외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의지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누구도 선의 노예가 아니다3.
기억 불가능한, 표상 불가능한, 보이지 않는 과거, 그것은 현재 없이 일어나는 것이며, 대과거이며, 일단의 무상(無償)의 시간으로서의 과거 안으로 떨어진다. 상기를 통해 이 과거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척도로 잴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그것은 시작하고 끝마치는 본질이며, 주제화할 수 있는 결합 안에 모아진 시작과 끝이다- 는 이런 자유와의 관계에서 유한한 것이다. 통시성, 그것은 이 결합의 거부이며, 전체화할 수 없음이며, 그리고 바로 이 의미에서 무한이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책임에서 -다른 의미의 자유에서- 이 비 원리의 부정성, 현재에 대립된 이 거부의 그리고 기억 불가능한 이 부정성은 -그 나타남에서- 나를 명령하고, 그게 누구든지 간에 타자에로 향하도록 하며, 나를 그에게 접근시키며, 나를 그의 이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부정성은 존재뿐만 아니라, 무와도 거리를 유지하며, 나의 기호에 반해서 책임성을, 다시 말해, 나를 타인의 볼모로 대신 할 것을 촉구한다. 나의 모든 내면성은 나의 기호에 반해서 타자에로 전향된다. 나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위함 -이것은 가장 탁월한 의미이며, 자기의 의미 그 자체이며, 재귀 대명사 ‘se’의 의미이다- 의 대격은 어떤 주격에서도 유래할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실 그 자체이다.
이렇게 자신을 알려오는 방식의 예외성은 타자의 얼굴로 나를 향하도록 명령하는 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신적인 질서로서의 이 명령은 부정신학의 형태가 아닌 무한의 비-현전을 통해서 드러난다. 본질 너머에서 기술되는 모든 부정적인 술어들은 책임성 -비주제적인 촉구에 응답하는 대답, 그로써 나의 기호에 상응하는 천직이 아닌, 트로마티즘- 안에서 긍정성이 된다. 모든 오성에 앞서서, 모든 자유에 앞서서 모든 의식에 앞서서 모든 현재에 앞서서 대답하는, 마치 현재 없이 일어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이 이 현재 없이 일어남 그 자체에 의해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일어난다. 내가 대답해야 하는 내 앞에 있는 누군가 (또는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의), 내가 책임져야 하는 누군가의 애매성 안에서, 이웃의 얼굴에서 빛나는 흔적, 수수께끼 또는 얼굴의 예-외성, 판정자, 결정자.
책임성의 긍정성은 본질 밖에서 관계들과 원리들을 질서를 뒤집는, 또 존재사건의 질서를 전복하는 무한의 번역이다: 책임성이 생겨나는 그 정도에 따라서 책임성은 배가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상으로서의 무한에서 도출되는 명령하는 의무(Sollen)가 아니다. 빚을 청산하면 할수록 그 빚은 반대로 증가한다. 이 간격, 그것은 아마도 영광이라는 이름에 적합할 것이다. 무한의 긍정성은 책임성으로의 전향, 타인에의 접근으로의 전향, 비-주제적인 무한에 대한 대답으로의 전향이며, 이 긍정성은 자신의 척도에 복종하는 모든 능력을, 이웃에의 접근 안에서 역으로 자신의 척도를 넘어서는 것을 드러내면서, 신의 영광으로 극복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자유와 비-자유의 대립 이전에, 이 대립을 넘어서 있는 -이웃에 의해 의무가 주어지는- 주체성은 무한에 의한 이 본질의 넘어섬이며, 이 본질과의 단절이다.
이 단절은 동시에 엮임이다. 흔적의 빛남은 현상의 현시와는 구분되는 다른 의미에서 수수께끼와 같으며, 다시 말해, 애매하다. 이 빛남은 내재성과 본질로 피할 수 없이 이끌리는 증명의 출발점으로 사용되어질 수 없다. 흔적은 말하기로서의 얼굴의 애매성 안에서 그려지고 지워지며, 그로부터 초월자의 양태 그 자체가 드러난다4.
따라서 무한은 사냥꾼이 사냥감의 흔적을 쫓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흔적과 관계한다. 무한에 의해 남겨진 흔적은 현전의 잔여가 아니다; 흔적의 빛남 그 자체가 애매하다. 그렇지 않다면, 흔적의 긍정성은 부정성이 보존하는 무한의 무한성과는 다른 그 이상의 것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무한은 자신의 흔적들을 가린다. 그것은 그를 따르는 자를 따돌리기 위해 간계를 쓰기 때문이 아니라, 무한은 그가 나에게 명령하는 현재를 초월하기 때문이며, 이 명령으로부터 나는 그를 연역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명령하는 무한은 권리를 형사하는 원인이 아니며, 자유에 의해 이미 지배되는 주제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로 향할 때에만 알려져 오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삼인칭성(illéité)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얼굴로부터 출발한 이 우회 그리고 흔적의 수수께끼 안에서의 우회에 대한 우회이다5.
“너”와 대상의 주제화를 배제한 이 삼인칭성 -삼인칭 주어 그(il) 또는 그(ille)로부터 형성된 신조어- 은 나와의 논리적인 연접 안으로 들어옴이 없이 나에게 관여하는 방식을 지시한다. 물론, 이 관여함이 발생하는 요소를 지시해야한다. 그런데 삼인칭과의 관계가 의식과의 관계라면, 이 삼인칭(il)은 아마도 부버의 나-너의 관계 안에서의 “너”처럼 하나의 주제를 지시할 것이다. 내가 ‘아마도’라고 말한 것은 부버는 나-너의 관계가 산출되는 어떤 정신적인 요소를 긍정적으로 표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 너머의 삼인칭성은 그가 내게로 옴이 나로 하여금 이웃에로 향하는 운동을 완수하도록 하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이 출발의 긍정성, 그로 인하여 이 통시성은 부정적인 신학의 용어가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나의 책임성이 된다. 또는 만약 내가 이러한 사실을 원한다면, 그들은 얼굴 안에서 드러난다, 이 책임의 역설은, 마치 나의 의식 안에서 어떤 명령이 도둑처럼 내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처럼 밀수처럼 아무도 모르게 침투되는 것처럼, 또는 플라톤의 정해지지 않은 원인처럼, 타인에 대한 의무가 나로부터 시작함이 없이 나에게 의무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이 의식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우리는 더 이상 의식의 요소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의식 안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의식의 사태는 받은 명령이나 계약과의 관계에서 책임과 복종의 앞섬 그리고 비기원적인 전복을 의미한다. 마치 이것은 책임의 최초의 운동이 명령을 기다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는 형식적인 절차이전에 이 명령에 복종하는 데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일어난다. 또는 이것은 가능한 모든 현재 이전에, 그것을 기억함이 없이, 기억으로 회복됨이 없이 복종하는 현재 안에서, 이 명령을 따르는 자에 의해서 형식화 되면서 드러나는 어떤 과거 안에서 형식화되는 것처럼 그렇게 일어난다.
아마도 여기에 아직도 이야기와 서사를 통해 말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나는 얼굴을 통해서만 자신의 명령을 전달할 정도로 직접성이 결여되어 있는 이 무한의 대화자인가? 사팔뜨기의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이 삼인칭성은 물론 그 말이 지시하듯이 어떤 인칭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야 한다. 무한은 이웃에로 향하라는 명령을 통해서 이미 다 이뤄진 주체성에게 자신을 알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타인을 대신하면서 본질을 해체한다. 다른 하나를-위한-하나(l'un-pour-l'autre)로서 주체성은 의미로, 말하기로 또는 무한의 동사로 흡수된다. 의미는 본질에 앞선다. 의미는 직관에 의해 채워지는 인식의 단계도, 불가능한 동일성을 지시하는 비-동일성의 부조리도 아니다. 그것은 초월성의 영광이다.
대신함-의미. 말해진 것에서 주제화되는 항들로서 한 항을 다른 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대신함은 회피할 수 없는 이 책임성 안에서 주체의 주체성 그 자체이며, 본질의 되돌릴 수 없는 동일성과의 단절이다. 여기서 나의 유일성(unicité)은 그 의미를 획득하며, 더 이상 대문자로서의 나(le Moi)의 문제가 아닌 소문자로서의 나(moi)의 문제가 된다. 더 이상 여럿 중의 하나인 내가(un moi) 아닌 -나는 나인(je suis moi)- 일반화 되어질 수도, 주체 일반도 아닌 주체는 대문자 나(le Moi)로부터 절대로 타자일 수 없는 나로서 소문자 나(moi)로 이행하는 데에서 드러난다6. 여기서 주체의 동일성은 책임성, 다시 말해 타인을 짊어져야 한다는 회피할 수 없는 사실 안에서 드러난다. 의미, 말하기 -나의 표현성, 나의 기호의 의의(ma signifiance de signe), 나의 동사의 동사성은 존재의 양태로서 이해되어질 수 없다. 탈-존재사건은 본질의 운동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함 -나-인간- 은 실체들 간의 이행이 아니다. 나는 다른 이의 동일성 안에 나를 가두지 않으며, 나는 실체의 또 다른 변형 안에 의존하지 않는다. 의미, 근접성, 말하기, 분리, 나는 이것들 중의 어떤 것하고도 혼돈되어질 수 없다. 그런데 주체성으로 파악된 의미의 관계에 어떤 이름(nom)을 부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하지 않을까? 희생이라는 단어를 말해야 하지 않을까? 주체의 주체성, 희생으로서의 존재와 다르게를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가 의미로서의, 다른 하나를-위한-하나로서의 주체성이 나의 상처받을 수 있음으로, 소통불가능성으로, 개념화가 불가능한 감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 한에서 이러한 시도는 너무 대담하고 설익은 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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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노트: 『존재와 다르게』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의미를 레비나스는 주체의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의미는 주체의 본질과의 단절 혹은 중단을 통해 들어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후설의 지향적 분석에 따르면,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서 가지는 이 관계는 내가 너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지평으로 작동한다. 내가 너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는 레비나스에게 『전체성과 무한』 이래로 언어적인 관계이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언어적인 관계(discours)만이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자들이 다른 존재자 안에 자신의 뿌리를 옮김이 없이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관계라고 말한다(cf., TI,28-29). 이 언어적인 관계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기호와 의미의 관계로 이 나와 타인 사이의 언어적인 관계를 조건지우는 더 근원적인 지평으로 접근한다. 이미 읽은 "3° 말하기와 말해진 것"에서 레비나스는 "말하기는 보다 자세히 말하면, 유희가 아니다. 말하기가 조합하는 언어적 기호들 이전에, 언어적인 체계와 구문적인 변화 이전에
- 언어들에 앞선 제안(avant-propos) - 말하기는 하나와 다른 하나의 근접성이며, 접근의 참여이며,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이며(l'un pour l'autre), 의미의 의의 자체(signifiance même de la signification)
이다"(AE, 17)라고 말한다. 주체 혹은 인간의 의미가 드러나는 지평으로서의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로서의 기호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호에 대한 그의 『기독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호란, 그것이 감각들에 드러내는 외형을 넘어서, 그것으로부터 사유에 그것과 다른 어떤 것(aliud aliquid)을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떤 흔적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동물이 여기를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론에 대해서 De doctrina christiana, livre II, chap. I, §1) 다시 말해 기호는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보내는 그러한 관계이다. 여기서 하나는 다른 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아우구누티누스가 다른 곳(De magistro 의 첫번째 장인 "말의 의미에 대해서 Disputation de locutionis significatione")에서 말하듯이 기호는 반드시 존재하는 대상(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상이 부재한 기호로 라캉은 세미나 I의 20장에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사라진 고대유적들을 예로든다. 이것들은 사라졌음에도 여기에 현전하고, 부재하는(qui restent là présentes, absentes, Lacan, Sémianaire I, p. 384) 어떤 것이다. 이러한 기호는 그것의 본성이 잊혀졌으나, '흔적'으로 어딘가에 남아있는 기호 혹은 '기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의 단어의 의미가 다른 단어들의 의미로 보내지듯이,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들로 보내진다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기호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하기처럼, 기호는 - 현전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 타인에의 노출(exposition 열림), 타인에의 종속의 탁월한
사건이다. 다시 말해 주체성의 사건이다. 그것은 다른 하나를-위한-하나이다. 이것은 단순히 직관과 현전의 부재에서 그 의미를
고갈하지 않는다. 우리는 묻는다: 이 자신에의 현전이 결여된 기호 혹은 창조성으로 이뤄진 모여질 수 없는 통시성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그것은 말해진 것처럼 시초를 가지지 않는다. 대체, 대신한, 다른 하나를-위한-하나는 대자(le pour-soi)의
정지 안에서 타인를 위한 나의 책임의 타자에 대한 존재(le pour-l'autre)가 되는 것이 아닌가?"("Tout
autrement", in Noms propres, p. 88)
- 『전체성과 무한』에서 이미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무한의 이념을 다루면서, 이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성찰에 대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데카르트는 “...mon entendement, qui est fini, ne peut comprendre l'infini. 유한한 나의 오성은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해하다’(comprendre)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전체(com-)로서 무한을 ‘내 안에 전부 끌어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 희브리어에서 ‘kodosh’는 ‘분리’라는 의미로 ‘성(聖)’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 (원주) 선이 자유를 수여한다 - 내가 그를 사랑하기 전에 그가 나를 사랑한다. 이 앞섬으로 인해 - 사랑은 사랑이다. 선은 만족시킬 수 있는 욕구라는 용어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 선은 성적인 욕구나, 선과 너무 닮아서 혼동되는 - 자신의 타자가 아닌 자신의 닮음일 뿐인 - ‘유혹하는 것’과의 관계의 용어가 아니다. 선은, 마치 무한처럼, 그 밖의 다른 것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전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선이고, 아무 것도 그의 선성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원주) 『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실존을 발견하면서』에 실려 있는 “수수께끼와 현상”의 203쪽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원주) 같은 책, 187-203쪽. [본문으로]
- (원주) 나, 자아(le moi)는 영혼의 가장 일반적인 개념의 정식화가 아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의 초월론적인 변증론(B 405, A 354)에서 한 주체에서 다른 주체로의 이행이 주체를 정의하는 긍정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이러한 사실을 보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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