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서』의 1 장의 3° '말하기와 말해진 것'에 대한 번역이다.
3° 말하기와 말해진 것
존재의 타자에 대한 진술을 만나자마자, 그것을 곧바로 자신 안에 가두는 존재의 출구 없는 운명은 말해진 것(le Dit)이 말하기(le Dire)에 대해 행사하는 전적인 지배에서 그리고 말해진 것이 그대로 석화되는 신탁에서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가? 이 경우, 초월성의 실패는 단지 로고스 안에 초월을 주제화하는, 초월성의 이행에서 한 항을 지정해 주는, 그리고 그 항을 “저편의 세계”로 고정하는, 이어서 초월이 의미하는 것을 존재가 자신의 존재사건 안에서 엮는 운명의 피할 수 없는 양태들인 전쟁과 물질 안에 정착시키는 신학의 실패일 뿐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본질 안에서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으로서의 본질 -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 또는 존재사건 - 은 단순한 말장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말하기는 정확히 말해 유희가 아니다. 말하기가 조합하는 언어적 기호들 이전에, 언어적인 체계와 구문적인 변화 이전에 - 언어들에 앞선 말(avant-propos) - 말하기는 하나와 다른 하나의 근접성이며, 접근의 참여이며,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이며(l'un pour l'autre), 의미의 의의(signifiance) 자체이다. (그런데 참여를 접근에 의해서가 아니라, 접근을 참여에 의해서 규정해야하는가? 접근이라는 말이 쓰이는 통상적인 도덕의 규칙을 따르면, 우리는 아마도 근접성이나 접근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들이 주는 놀라움을 포기해야할 지도 모른다.) 본래적인 또는 전-본래적인 말하기 - 앞선 말의 말(le propos de l'avant-propos) - 는 책임성의 드라마와 엮인다. 존재보다 더 무겁고 존재에 앞선 명령. 이 명령과 비교해서 존재는 유희가 갖는 모든 모습을 지닌다. (모든 것이 가능적으로 허락되는 책임성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의 유희 혹은 존재의 편안함.) 그런데 유희는 존재사건으로부터 나오는가? 곧이어 유희는 내기와 - 돈이나 명예 - 결합한다. 탈-존재사건 - 아무런 보상 없는 - 영원한 삶의 약속이나, 행복의 즐김 없는 - 다시 말해, 전적인 줌은 유희의 거짓된 가벼움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심각함과 관계하는 것이 아닌가? 세세한 전개에 앞서서, 우리는 미리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존재의 본질이 전복되는 이 심각함은 전-기원적인 언어와,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 책임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함(substituiton)과 그리고 그로 인해 그려지는 ‘볼모’의 조건 (혹은 비조건)과 관계하지 않는가?
사정이 어찌 되었든 이 전-기원적인 말하기는 말하기와 말해진 것이 서로 관계하는 언어의 형태로 드러나며, 여기서 말하기는 주제(thème)에 종속된다.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도 이 말해진 것의 애매성(amphibologie)에 의해서 - 구분이나 애매성이 말의 작위성으로 환원됨이 없이 -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기와 말해진 것의 상호관계, 다시 말해, 말하기의 말해진 것에의, 언어의 체계에의 그리고 존재론에의 종속은 현시(manifestation)가 요구하는 대가이다. 말해진 것으로서의 언어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 앞에 해석된다. 그런데 이것은 배반의 대가일 것이다. 그래서 시종의(ancillaire) 언어는 필수 불가결하다. 이 언어는 동시에 -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의 타자가 - 자신에 불충실하게 - 이미 자신을 존재의 본질로 들어내는 주제들 밖에서 -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의 타자에 대한 탐구에 사용된다. 마치 존재의 타자가 존재의 사건인 것처럼, 언어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의 밖, 존재의 예-외를 말하는 것을 - 그것은 동시에 언어를 배반하면서 일어나는데 - 허락한다. 존재와 존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존재가 드러나는 말해진 것은 존재와의 관계에서 예-외를 형성하는 말하기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 예-외와 그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 것은 말해진 것 안에서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외가 드러나고 진리가 형성되는 것이 말해진 것이라는 사실이 말하기의 - 시종의 혹은 천사의 -애매한 경사(la péripétie)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위한 충분한 핑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시녀 혹은 천사로의 경사 - 그것은 숭고한 것일 터인데 - 인 말하기는 단지 매개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본질이 우리 앞에 해석되는 주제화, 이론, 사유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것들은 말하기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은 사실 말하기의 전-기원적인 부름에 의해 그리고 책임성 그 자체에 의해 근원적으로 동기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질문은 뒤에서 보다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이다.1
그런데 말하기는 부정적 진술(apophasis)2에서 고갈되지 않는다. 부정적 진술은 책임성에 대답하는 언어를 전제하며, 이 대답의 심각성은 존재에 의해 측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 그 불가능성은 이 거부에 앞서거나 이어서 오는 회의 혹은 후회 안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재의 실재성은 회의 밖에서만 일어난다. 그런데 본성적으로 피상적인 본질도 존재가 무를 배제하듯이 책임성의 감춰진 부분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책임성으로서의 말하기는 존재와의 관계를 보존한다. 이 관계의 본성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일이 될 것이다. 이 도덕적인 불가능성은 책임성을 별다른 긴장이 없는 영역에, 다시 말해,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위치시키는 최소한의 심각성이 아니다. 이것은 윤리와의 친밀성을 아직은 혼돈스럽게 보여주는 ‘존재와 다르게’의 심각성이다. 처음부터 이 책에서 우리가 찾는 존재와 다르게,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 앞에 놓여진 그에 대한 해석은 실제로 그것을 진술하는 말하기를 지배하는 말해 진 것 안에서 배반의 형태로만 드러난다. 그럴 경우 여기에 하나의 방법론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말하기의 전-근원적인 사태 (만약 그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듯 비-원리적인, 비-근원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는 주제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만약 반-고고학이 가능하다면) 자신을 배반하는 형태로서만 드러나는지, - 그리고 배반은 환원되어질 수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주제화를 통해 ‘알려진 것’을 존재론에의 종속시키면서 그것을 각인하고 있는 일단의 표증들로부터 우리는 알려진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지 물어야 할 것이다. 배반의 대가로 모든 것이, 심지어 말해질 수 없는 것까지 드러나며,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신중하지 못함도 가능해진다. 아마도 이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 철학의 의무일 것이다.
명제들의 형태로 진술된 말해질 수 없는 것은 형식논리의 형식들과3 결합하며, 존재 너머는 의견으로 정립되며,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애매성 안에서 깜박이며4, - 이 애매성 안에서 존재자는 존재를 감춘다. 존재와 다르게는 말하기 안에서 진술된다. 그런데 이 말하기는, 존재와 다르게(l'autrement qu'être)가 이미 다르게 존재함(un être autrement)으로 의미하기 시작하는 말해진 것에서 존재와 다르게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번복되어야(se dédire)한다. 철학이 진술하는 - 그리고 철학이 너머의 초월성 때문에 진술하는 - 존재의 너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이 없이 시종의 진술 안으로 떨어지는가?
말하기와 자신을 번복함은 한 자리에 함께 모을 수 있고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사실 이 동시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존재의 타자를 존재와 비-존재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는 선택은 통시적인 사유일 뿐이다. 철학의 여명에서 회의론은 번역과 배반 그 자체의 통시성을 번역했고 배반했다. 존재와 다르게를 사유한다는 것은, 진술의 불가능성에 대한 진술 그 자체를 통해서 이 불가능성을 대담히 실현하면서 이 진술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은, 회의주의자와 맘먹는 그런 대담성을 요구한다. 만약 논리적인 사유가 회의주의에 대해서 내 놓는 셀 수 없는 “반박 불가능한” 반박 후에도, 회의주의가 다시 철학의 제 일선에 등장한다면 (더욱이 회의주의는 철학의 적자로서 항상 되돌아 온다면) 이것은 논리학이 회의주의 안에서 발견하는 모순에는 동시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비밀스런 통시성이 모호한 혹은 수수께끼 같은 ‘말하기(le parler)’를 명령하기 때문이며, 아주 일반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의미는 공시성과 본질 너머에서 자신의 의미를 밝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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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노트: 말해진 것을 넘어서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이 광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광기라고 불렀다. 침묵을 해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스럭 거리는 침묵'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다만 아직 말이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후설은 "처음, 그것은 아직 벙어리인 순수한 경험으로 이 경험을 그것의 고유한 의미의 순수한 표현으로 이끌어야"(데카르트적 성찰 § 16) 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다른 글에서 모든 처음, "'표현' - 말하기 - 는 존재와 비교해서 동사의 역전될 수 없는 앞섬 l'antérorité irréversible" 이라고 말한다.("수수께끼와 현상" in En dé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EDE) p. 212) 이 기원으로서, 혹은 전-기원적인 것으로서 이 침묵의 동사는 요한복음에 처음에 나오는 동사가 아니다. 이 말하는 침묵은 "언어들 이전의 말" (l'avant-propos des langues)이며, 혹은 말 이전의 말로, "언어 이전의 언어의 본질"(위의 책, p. 232) 이며, '말해진 것 없는 이 말하기'는 근원적인 말로 타자의 토대이다. 그런데 이 말하기는 시종의 혹은 천사의 방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천사의 희랍어의 어원적인 근원을 보면 그것은 메사지를 전달하는 자이다. 위에서 레비나스가 말하기는 '매개자'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천사적 혹은 시종적이라는 형용사와 같은 의미의 폭을 가진다. 여기서 메사지는 천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천사는 단지 전달자일 뿐이다. 천사 이전의 이 메사지의 그 근원은 언제나 가려져 있을 뿐이다. 근원에서부터 이미 해석과 배반이 자리하게 된다. 이 말하기는 세계의 서문도, 존재의 침묵의 울림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 이전에, "세계 밖에, 세계의 질서 밖에"(Humanisme de l'autre homme, p. 48), 머무는 것으로 타인과의 대면에서 기원할 뿐이다: "얼굴은 말한다. 얼굴의 현시는 최초의 언술이다"(EDE, p. 194). 타인의 표현, 그의 살의 현시는 나라는 살의 기호에 대해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존재와 다르게...』에서 이제 나는 다른 하나를 위한 기호가 된다. "말하기는 하나와 다른 하나의 근접성이며, 접근의 참여이며,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l'un pour l'autre)이며, 의미의 의의 자체이다." L'un-pour-l'autre, c'est-à-dire la signifiance de la signification. 하나의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에 대한 관계 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 기호들의 근접성은 모든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의 의의이다. 위의 구절은 레비나스의 이 책 전체를 요약한다.
- (원주) 5장 3° '자기'. [본문으로]
- 부정을 통해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논리적 방식을 말한다. 신은'...이 아니다'라는 방식을 통해 신을 말하는 방식이 이런 방식 중의 하나이다. [본문으로]
- (원주) 형식논리를 넘어선 의미들은 다시금 형식논리를 통해 드러난다고 했을 때, 의미들이 형식논리와 구분되는 것은 방향의 정확한 지시를 통해서 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설정보다 더 세세한 지시는 보다 엄격한 논리와 더불어서 생각 가능하다. 모든 사유를 존재에 대한 이해로 종속시키는 신화는 아마도 논의의 일관성이 보여주는 현시의 기능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관성의 형식 논리는 논의의 합법성을 보여줄 것이고, 그 일관성 안에서 의미와 존재 사이의 간격이 측정되고, 또 거기서 모순적이게도 형이상학적 이전 그 자체가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논리적인 것 안에서 드러나는 존재 너머의 구조들에 의해 중단된 논리적인 것은 더 이상 철학적인 명제들에 변증적인 구조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체계를 중단시키는 것은, 마치 논리적인 질서와 그것이 결합한 존재가 그 둘을 초과하는 최상급을 자신들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부정성의 범주가 아니라 최상급이다 : 주체성 안에서 비-장소(non-lieu)의 측정할 수 없음이 그러한 예일 것이고, 또 애무와 성적 접촉에서 - 마치 닿을 듯 말 듯한 접촉이 내장에까지, 한 피부가 다른 이의 피부에까지 나아가는 점진적인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 닿을 듯 말 듯한 접촉의 “가치상승(surenchère)”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본문으로]
- 스라의 점묘주의(pointillisme)라고 부를 수 있는 레비나스의 '깜박주의(scintillisme)'는 장 발에 대한 그의 글에서 다음의 빛나는 진술을 발견할 수 있다: \"별의 반짝임 혹은 물의 반사 속에서, 빛은 자신을 다 소진하는 곳에서,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손짓하는 깜박이는 빛의 비밀이 된다. 이 반짝임 - 동일자 안에 타자 - 이 초월성 - 타자에 의한 동일자의 깨어남 - 이 반짝임으로 날이 선 빛의 점묘주의, 그것은 귀를 찢는 한 마디의 말이 우리가 듣는 견해(le propos)에서는 침묵하고 있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Lévinas, \"Jean Wahl ni avoir ni ê̂tre\", in Hors sujet, Le livre de poche, biblio essais, p. 1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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