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와 다르게 강독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서: 8° 존재와 존재의 너머

aurorepark 2009. 8. 19. 21:22

8° 존재와 존재의 너머


하나와 다른 하나의 근접성(proximité)은 여기서 존재론적인 범주들 밖에서 생각된다. 여기서 ‘다른 하나’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 그것은 자유, 지성 혹은 완전의 방해물일 수도, 유한한, 죽음의 그리고 자기에의 불확실한 존재일 수도, 노예, 부역자 혹은 도움을 주는 신일수도 있다. 그런데 근접성은 어디서나 존재론적으로, 다시 말해 본질 안에서 내재성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전개하는 나, 나의 동일성 안에 머무는 본질의 모험의 완성의 한계 혹은 보충으로 생각된다. 이런 근접성은 이런 근접성은 절대적인 거리의 축소이거나 절대적인 외재성의 왜곡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접성을 존재에 의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비록 존재 안에서 연장되며, 절대적으로 본질로부터 지연되어지는 ‘존재와 다르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과 공통의 유를 가지지 않으며, 탁월한 ‘너머’라는 말을 발음하는 숨가쁨 안에서만 말해진다. 여기서 타자성은 존재론적인 질서에서 말해지는 모든 타자의 특성과 모든 존재론적 속성 밖에서, 근접성 안에서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근접성은 존재론적 범주에 의존하지 않는 관계를 자극하는 사회성으로 생각된다. 말하기, 접촉, 타자에의 노출의 진지성으로서의 말하기; 언어 이전의 말하기. 이것이 없이는, 메사지의 전달처럼 어떤 언어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제안되는 사유의 방식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도, 존재를 최상의 무질서 혹은 질서의 설립의 실패로서 무시하는 식으로 우수꽝스러운 주장으로 다루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존재가 자신의 정당한 의미를 취하는 것은 이 근접성으로부터이다. 제 삼자성(l'illéité)의 간접적인 방식 안에서, 타자에로 나를 보내는 비-근원적인 부름 안에서 주제화와 의식함의 길이 필연적으로 놓인다. 의식함은 이웃 옆에 출현하는 제 삼자의 출현에 의해 촉발된다. 제 삼자 역시 이웃이다. 이웃과 제 삼자 사이의 관계는 접근하는 나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비교할 수 없는 자들 사이에 정의가 필요하다. 비교할 수 없는 자들 사이의 비교가 그리고 함께 동시에 놓여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주제화, 사유, 역사, 글쓰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존재는 존재의 타자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접근의 의미로부터 존재는 타인과 더불어 제 삼자를 위해 그리고 동시에 제 삼자에 대항해서 존재한다. 이것은 자기에 반하는 타인과 제 삼자와 더불어 사는 것이며, 존재의 너머를 보지 못하고 말하기를 말해진 것으로 환원하는 그리고 모든 의미를 존재 안으로 끌어 모으는(l'intéressement) 그런 철학에 반대편에 놓인 정의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에 부여하는 폭력의 정지 -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 - 는 탈-존재사건과 수동성 혹은 인내를 전제한다. 이 탈-존재사건 안에서 타자에 대한 책임은 동시에 제 삼자에 대한 책임이며, 그 안에서 비교하고 종합하고 생각하는 정의가 그리고 존재와 평화의 공시성의 그림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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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노트: 레비나스는 <하나의 다른 하나의 관계>는 <근접성 proximté>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존재자와 존재의 존재론적 관계도 그와 유살한 것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의 다른 하나의 관계는 나와 다른 하나의 관계인데,이 다른 하나가될수 있는 것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고 말한다. " 그것은 자유, 지성 혹은 완전의 방해물일 수도, 유한한, 죽음의 그리고 자기에의 불확실한 존재일 수도, 노예, 부역자 혹은 도움을 주는 신일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 다른 하나는 <타자>라는 개념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죽음, 방해물, 이방인, 신, 적, 노예, 부역자...미 모두는 나의 자유를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가는 길에 놓인 걸림돌들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철학은 이 걸림돌, 타자를 어떻게 '요리'(방법론)하느냐에 문제였을 것이다. 어떻게 잘 요리를 해야 제대로 넘어가서(자기화, 동일화의 과정) 내 안에서 구토(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고 잘 소화시킬 수 있을까(동일화의 실현)의 문제였다. 이것은 결국 우리 삶의 가장 근본 바닥의 문제이다.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을 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바닥의 수준에서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자기보존의 수준에서 말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를 보면, 내가 어떤 불편한 상황에 처하면, 다시 말해, 친구나 외부와의 관계에서, 아니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물들의 현상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번거로움이 생기면 이 상황을 나에게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고 나면 나는 내가 그 불편한 상황에서 풀려나 있음을 발견한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는 어떻게 있는가?> 등의 질문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환원되어진다. 결국 이 질문은 존재론적인 질문보다 앞선 질문일 수 있다. 레비나스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지우기 않는다. 이 질문을 지우는 대신에, 이 질문을 헤겔이나 하이데거처럼 존재론으로 환원하는 대신에, 이 질문을 다른 곳으로 이끈다. 그것은 나와 타자의 관계를 존재론적이 아닌 근접성의 관계로 보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존재론적인 접근을 하는 철학자들도 근접성에 대해서 말한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의 근접성 (존재와의 근접성과 멀어짐에 대한 논의), 혹은 헤겔의 타자성 이런 근접성은 "나의 동일성 안에 머무는 본질의 모험의 완성의 한계 혹은 보충으로 생각된다. 이런 근접성은 절대적인 거리의 축소이거나 절대적인 외재성의 왜곡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 그가 말하는 근접성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그것은 <사회성 socialité>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반면에 레비나스는 "말하기, 접촉, 타자에의 노출의 진지성으로서의 말하기; 언어 이전의 말하기. 이것이 없이는, 메사지의 전달처럼 어떤 언어도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말하기, 나의 타자에의 전근원적인 노출(감성에서 이미 말한 것)은 타인과의 만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내가 홀로 존재한다면, 말하기도, 신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을 것이다. 타인과의 만남은 나를 나의 나머지로 돌려 보낸다. 나는 그 안에서 그에 대한 사랑과 미움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