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타인에 대한 책임
그런데 존재의 본질에서 주체성을 떼어내기 위해, 이 단절점에서 - 여전히 시간적이고 존재로부터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그 지점에서 - 어떻게 존재와 시간이 붕괴되는가? 이 붕괴와 떼어냄은 존재 안에서 지속되고 그 안에서 도래하지 않는가? 존재와 다르게는 시간에서 떨어져 나온 그리고 그 시간의 계열이 어떠한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영원의 질서 안에 놓일 수 없다. 칸트는 네 번째 안티노미의 반정립 안에서 그 불가능성을 이미 보여주었다. 따라서 존재와 무, 삶과 죽음을 의미하는 시간의 양태를 따르는 시간의 시간화는 또한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의 너머를 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시간화는 존재와 무라는 쌍과의 관계에서 차이를 의미해야 한다. 시간은 본질이고 본질의 드러남이다. 시간의 시간화에서, 빛은 시간의 흐름인 순간의 자기 자신과의 국면의 차이에 의해서 이뤄진다: 동일자의 차이. 동일자의 차이는 또한 자신의 현시이다. 그런데 시간은 또한 - 파지, 기억 혹은 역사를 통한 - 모든 간격의 회복이다. 파지, 기억, 역사를 통한 시간화 안에서, 어떤 것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은 현전하거나 표상되어야 한다. 거기에 모든 것은 함께 놓여져서 쓸 준비가 되어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모든 것이 종합되거나 함께 모여야 한다. 거기서 모든 것은 굳어지거나 실체로 고정되어야 한다. 회복 가능한, 잃어버린 시간 없는, 잃어버릴 시간도 없는 그리고 실체의 존재가 발생하는 그 시간화 안에서 - 돌아감 없는 일단의 지속의 시간(un laps de temps)1, 모든 공시화에 저항하는 통시성(diachronie)2, 초월적인 통시성이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이 알려옴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 이 통시성을 통한 단절 너머에서, 흘러간 과거란 이름으로 그 “기억할 수조차 없는 먼 과거(profond jadis)”3를 표상을 통해 회복함이 없는, 그것이 현재의 변형을 의미함이 없는, 그로부터 그것이 어떤 시작, 주제화할 수 있는 원리를 의미함이 없는, 그리고 그로부터, 또 그것이 모든 과거의 기원, 역사적이거나 기억 가능한 기원을 의미함이 없는 알려옴의 의미는 그 관계를 보존할 수 있는가? 그 의미는 반대로 모든 현재와 표상에 낯선 것으로 머물지 않는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표상 가능한 기원보다 더 오래된 과거, 즉 전-기원적인, 전-원리적인 과거를 의미하지 않는가? 현재에서 이 과거의 알려옴은 다시금 존재론적인 관계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시간이 존재와 존재와 다르게의 애매성을 드러내야 한다면 - 그 시간화를 본질로가 아니라, 말하기로서 생각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본질은 말해진 것 - 말하기의 서사로 채운다. 그런데 말하기는, 자신의 애매성으로 인하여 - 다시 말해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수수께끼에 의해서 - 그 비밀을 삼켜버리는 본질의 서사를 벗어나며, 너머와 본질의 서사로의 돌아감 사이에서 망설이는 의미를 따라서 너머가 알려온다. 애매 혹은 수수께끼 - 말하기의 잃어버릴 수 없는 힘과 초월성의 양태. 주체성은 다름 아닌 본질과 본질의 타자의 엮임과 풀음 - 엮임 혹은 풀음 - 이다.
그런데 어떻게 말하기는 자신의 원초적인 수수께끼 안에서 말해질 수 있는가? 초월성의 - 존재의 타자의 - 통시성이 알려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시간이 시간화될 수 있는가? 어떻게 초월성은 존재 안에서 자신을 알려오면서 존재를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떤 구체적인 것 안에서, 과거를 그 자신이 알려져 오는 내재성으로 환원함이 없는 과거, 현재에 의해서도 - 표상에 의해서도 - 도래하지 않는 과거를 과거로 내버려 두는 과거, 분명히 그 안에서 변형될 어떤 현재와의 관계없이 과거를 과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과거, 결국, 한 번도 기원이었던 적이 없는 과거, 전-기원적인 과거, 전-원리적인 그런 과거와의 유일한 관계가 산출되는가?
후퇴의 선적인 운동 - 아주 먼 과거로 향하는 퇴행, 긴 시간의 계열 - 은 절대적으로 통시적인, 그리고 기억이나 역사에 의해서 회복되어질 수 없는 전-기원적인 것에 절대로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의 단순한 연속과는 다른 시간의 극적인 얽힘(intrigues)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감사하는 마음의 상태에 이른 그 사실 자체에 감사할 수 있다. 이런 감사는 마치 감사 그 자체가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감사가 그 자신에 결합되는 그런 것이다. 자신의 기도가 들려지기를 요구하는 신자의 기도에서 기도는 말하자면, 그 자체로 모든 것에 앞서거나 혹은 그 자체로 이어진다.
그런데 모든 현재와 표상 가능한 것 이전으로서의 과거와의 관계는 - 그것은 현전에 질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 타인의 잘못과 불행에 대한 나의 책임이라는 탁월하면서도 일상적인 사건 안에, 타자의 자유에 대답하는 나의 책임 안에, 인간들 사이의 놀라운 우애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카인적인 어두운 냉정함과 더불어 생각된 우애 그 자체로부터는 분리된 인간들 사이의 책임을 아직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타인의 자유는 절대로 나의 자유에서 시작할 수 없으며, 다시 말해, 나와 같은 현재에서 유지될 수 없으며,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을 수 없으며, 나에게 표상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나의 참여에서 나의 결정에서 시작되어질 수 없다.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무한한 책임은 나의 자유 이전으로부터, “모든 기억에 앞선 것”으로부터, “모든 성취에 나중 오는 것”으로부터, 현재-아님으로부터, 탁월한 비-기원, 비-원리, 본질의 어떤 이전(un en-deçà) 혹은 본질의 어떤 너머(un au-delà)로부터 온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주체성이라는 비-장소(non-lieu)가 자리하는 장소이며, 특권적인 질문인 ‘어디?’가 사리지는 장소이다. 말해진 것과 본질의 시간은 여기서 전-기원적인 말하기가 들려지도록 내버려두며, 초월성, 통-시성(dia-chronie)에, 그리고 비-현재와 책임 있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는 말하기의 방식 - 명시화의 방식 - 인 모든 표상 가능한 간격 사이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환원 불가능한 간격에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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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노트: 존재의 타자는 무도, 신도 아닌, 인간의 주체성으로 이 안에서 존재와 시간의 공시적 질서가 붕괴되는 유일한 장소이다. 현상학에서 존재의 드러남이 시간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면, 존재의 타자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으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이 시간에 대한 탐구로부터만 우리는 존재의 타자에 접근할 수 있다. <전개>의 첫장이 후설과 하이데거의 시간에 대한 논의로 채워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발레리의 시구를 빌어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기억할 수조차 없는 먼 과거"는 세계 안에서 늙어가는 인간의 '세계 밖'의 시간의 양태를 지시한다. 이 시간은 후설의 수직적 시간의 접근이 부딪친 '원인상 Ur-impression'에 대한 비판적 읽기로부터 유래한다. 이 장소는 후설이 평생을 거쳐서 의식의 지향성 안으로 회복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향적 의식으로 획복되지 않고, 반대로 지향적 의식과 존재가 붕괴되는 장소로 드러난다. 이 시간은 레비나스에서 의식의 지향적 종합이 붕괴되는 <통시적diachronie>시간의 시간화로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시간은 '존재'와 '비존재'의 섞임으로 그 자체 존재의 변질 혹은 변형 즉 존재의 타자화 altération를 의미한다. 철학사에서 시간에 대한 성찰은 이 시간의 타자성을 존재의 동일성으로 자기화하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시간의 타자성에 의한 존재의 타자화를 근본적으로 취할 경우, 이 존재의 타자화는 타자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 그 자체는 타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로서의 시간 그 자체는 인간의 '감성 sensibilité'으로 드러난다. 시간을 존재의 질서에서 떼어내서 다시 인간의 감성의 형식으로 되돌리는 것은 하이데거에서 칸트로의 역읽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감성으로서의 시간은 순수한 잃어버림으로서의 시간이 아닌, 시간이 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와 타자』에서 그리고 『전체성과 무한』에서 그려진 시간이 주체에 가하는 산출력 fécondité과 탄생이다. 그런데 이 시간, 이 타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주체의 감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산출력과 탄생은 주체의 주체화의 과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주체의 주체화를 주체, 자아인 나와 나의 나머지 사이의 관계라고 부르고 싶다. 이로부터만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을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난다. 이를 보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장들, 특히 7° <감성>을 읽어야 한다.
- ‘un laps de temps’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시간의 길거나 짧은 일단의 지속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이미 “실재와 그림자”에서 ‘사이의 시간 l'entretemps’이라고 레비나스가 부른 것, 그리고 『천체성과 무한』에서 ‘죽은 시간 le temps-mort’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의미의 폭을 가진 말이다. 이 책의 2장에서 레비나스는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닌, 세계 안에서 늙어가는 인간의 시간, 즉 죽느냐 사는냐, 존재와 무와의 양자택일을 넘어서 그 ‘사이’에서 지속되는 시간의 길이, 동안, 지속에 대해서 말한다. [본문으로]
- 시간에 대한 탈자적(ex-statique), 지평적 종합, 다시 말해, 파지(rétention)와 예지(protention)를 통한 현재로의 시간의 종합에 저항하는 시간의 근본적인 내재성으로의 전향을 의미한다. 탈-존(ex-stase)에 반한 내-존 (in-stase), 혹은 내면성의 가장 내밀한 곳(intimité)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초월적인' 이란 형용사는 내재성의 더 깊은 심연으로, 기원 '이전'으로, \"기억될 수 조차 없는 더 먼 과거\"로 하강하는 근본적인 내재성으로서의 '하향초월'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 초월성은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자신을 나에게 알려온다. 자신을 알려온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비-의미가 의미로 자신을 알려오는 것을 말한다.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이것을 '전이'라고 레비나스는 '탄생'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 “profond jadis/ jadis jamais assez”, 이 구절은 레비나스가 즐겨 자주 쓰는 시구로 폴 발레리의 시 “Cantique des colonnes”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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