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와 다르게 강독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서: 2° 존재와 존재사건

aurorepark 2009. 8. 2. 21:07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서』 1부 <논제>의 1장 <존재와 탈-존재사건>의 두번째 부분인 <존재와 존재사건>에 대한 번역이다.


2° 존재와 존재사건1


따라서 본질은 본질 안에서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구에 의해서 움직이며, 이 운동을 저지할 수도 있는 무의 간격을 모두 다시 채워버린다. 존재의 본질은 존재 안으로 들어감이다.2 존재의 본질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자신 안으로 끌어 모으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사건은 자신의 상대적인 부정성을 만나 놀란 정신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의 무의미성 앞에서 체념한 인간에게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사건은 단지 부정성에 대한 반박으로서가 아니라, 긍정적으로는 존재자들이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의 긍정으로 드러난다. 이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 말고 또 다른 더한 존재의 긍정성이 있는가?! 이러한 존재의 존재사건은 서로 간의 투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타인에 대해 거부감(allérgique)의 다양한 형태의 이기주의로 극화된다. 전쟁은 바로 본질의 이러한 존재사건의 서사이며 드라마이다. 어떤 존재자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갈등 속에 있는 각각의 항들은 자신들이 속할 수 있는 영역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모두에 대립한다. 이렇게 존재의 본질과 전쟁은 극단적인 공시성 안에 머문다. 일단 기술된 규정은 이미 내적 저항에 의해 부정된다. 규정이란 이렇게 스스로를 규정하고 스스로를 부정한다. 극단적인 동시대성 혹은 내재성.


존재의 본질은 존재들 사이의 직접적인 투쟁을 한 동안 정지시키는 평화라는 이성의 지배에 의해 본질의 타자로 전환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존재자들은 존재 안에서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생긴 타인에 대한 거부감인 비관용을 포기하고, 인내를 가지고 존재와 다르게라는 드라마를 엮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이성적인 평화, 인내, 일단의 시간의 길이는 이미 계산, 명상, 정치일 뿐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교환과 타협이 된다. 저항 안에서 투쟁하던 만인은 함께하는 만인이 된다. 거기서 저항은 상호적인 제약이 되며, 물질적 규정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존재의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 즉 존재사건은 그대로 보상 안에서 유지된다. 다시 말해, 미래에 받을 보상은 지금 당장 그들이 정치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동의했던 그 양보에 균형을 되찾아 줄 것이다. 존재자들은, 기억과 역사 그리고 물질처럼 규정된 전체성 덕분에 과거와 미래로 연장되는 현재 안에서, 생성이 거부하는 균열과 예외가 없는 현재 안에서, 기억과 역사 덕분에 표상으로 화하는 현재 안에서 모아지고, 그 안에서 현재화 된다. 어떤 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 집단이 있는 한 존재사건은 항상 있다. 초월은 인위적이며 평화는 항상 불안하다. 평화는 이익에 저항할 힘이 없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약속 - 덕을 보상하겠다는, 악을 응징하겠다는 약속, 하늘과 땅을 가르는 그 거리만큼 실현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언젠가는 실현되리라고 장담하는 이들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 그것은 신의 죽음과 하늘의 공허로부터 들려오는 이상한 소음을 강화할 뿐이다. 누구도 그들의 침묵을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안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과 평화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을 가르는 그런 차이도 - 타협이 전쟁보다는 낮기 때문에, 평화 안에는 이미 선이 지배하기 때문에 - 정신의 숨가쁨 혹은 그 숨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정신을 - 플라톤 이래로 본질 너머가 말해지고 생각되어 진 것은 바로 이 경계에서인데 - 전제하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숨가쁨 또는 이 숨결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지막 노력은 본질 너머에 있는 어떤 의미의 전달자로서의 정신이 지닌 최대의 최후의 가능성이 아닌지 물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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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노트: 앞선 작은 장 1°에서 '존재의 타자'에 대한 물음에 이어서 레비나스는 작은 2°에서 존재의 타자를 지시하기 전에 이 존재 본질에 대해서 말한다. 존재의 본질, 존재의 운동은 레비나스가 l'intéressement, '존재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존재가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자를 자신 안으로 들여오는, 자기화하는,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 존재사건은 코나투스라고 불린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conatus essendi 라고 부른 것, 즉 "모든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는 바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자신을 보존하려고 노력함" (스피노자, 윤리, 3권, 4 명제)을 의미하기도,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에 대한 정의, 즉 "다자인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그런 존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존재사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레비나스에게 '전쟁'이다. 이러한 존재의 타자로 나아감, 다시 말해 존재의 본질을 넘어감은 레비나스에게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전체성과 무한』의 서문을 읽은 것처럼 (졸고 <나는 전쟁이다>) 전쟁으로서의 '나', 코니투스로서의 '나'는 지울 수 있는,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두 발을 존재에 딪고 있는 한, 향유의 존재인 한에서 이 존재는 우리의 조건이다. 다시 말해 평화로 가는 조건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평화는 허약하며, 평화는 이익에 저항할 힘이 없다. 그는 영구평화를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과 평화의 본질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차이, 그 균열에 정신의 숨가쁨, 전쟁과 평화를 오가는 이 운동에서 전쟁보다 타협으로, 악보다 선으로 우리를 이끄는 이 정신의 숨결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 그 가능성을 생각할 뿐이다. 이어지는 글 3°에서 '말해진 것 le dit'과 '말하기 le dire' 사이의 오고감, 그 진동은 바로 이 전쟁과 평화의 오고가는 운동에 대한 다른 설명일 뿐이다. 항상 말해진 것은 반박되고, 다시 말해질 뿐이다.              


  1. ‘존재사건’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intéressement’의 번역이며, ‘존재의 사건’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l'événement de l'être’이다. 'intéressement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 존재의 타자의 주1을 참조. [본문으로]
  2. <Esse est interesse>에 대한 번역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존재의 타자의 주1참조. 이러한 해석은 하이데거의 <모음recuillement>으로서의 존재의 로고스의 대한 정의와 일치한다. 레비나스철학의 근본적인 기획은 이 모음으로서의 존재의 정의를 <환대 accueil>로 전환하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