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1 장 본질과 탈-존재사건1
“
노발리스가 수동성에 대해서 아직도 뭔가 할 말이 있다고 썼을 때, 이 말은 그와 동시대인 이었으며 능동성의 철학자이기를 원했던
멘느 드 비랑이 그의 의도와는 달리 여전히 본질적으로 두 종류의 수동성 - 최하와 최상(l'inférieur et la supérieur) - 의 철학자로서 남을 때 그 의미가
있다. 그런데 최하의 수동성은 최상의 수동성에 비해 저급한가?”
장 발, 『형이상학에 대한 논고』, p. 562.
1° 존재의 타자
만일 초월성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존재의 사건 - 존재 l'esse - 또는 본질2이 존재의 타자로 넘어간다는 사실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타자란 무엇을 말하는가? 『국가』에서 ‘본질 너머 l'au-dela de l'essence’3의 문제가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소피스트』에 나오는 다섯 개의 “종들” 가운데서 존재에 대립되는 종이 없다4. 결국 존재의 타자에 도달하는 이 이행의 과정에서 존재의 사실성을 해체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 경우 넘어간다는 그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재의 타자로 넘어감 또는 존재와 다르게. 그런데 이것은 다르게 존재함 être autrement 이 아니라, 존재와 다르게 autrement qu'être를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넘어감은 여기서 죽음과 동의어도 아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를 상호적으로 밝혀주며, 존재를 규정하는 사변적 변증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존재를 뒤로 밀쳐내는 것처럼 보이는 부정성은 곧이어 존재에 의해 다시 채워진다. 마치 죽어가는 이에 의해 남겨진 자리가 그 자리를 요구하는 자들의 웅성거림으로 채워지듯이, 비어진 공간은 곧 이어서 있음 l'il y a5의 익명적이며 거의 구분 불가능한 웅성거림으로 채워진다. 존재의 본질은 비존재 그 자체를 지배한다. 내가 존재 전체를 나의 죽음으로 이끌지 않는 한에서 - 마치 맥베스가 최후의 투쟁의 순간에 그것을 원했던 것처럼 - 나의 죽음은 무의미 하다. 6 그런데 여기서 유한한 존재자 - 또는 삶- 는 우리가 이 유한한 존재자와 동일화할 수 있는 “대자의 아이러니” 안에서 조차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존재 또는 비존재/죽느냐 사느냐 - 초월성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지 않는다. 존재의 타자에 대한 진술 - ‘존재와 다르게’에 대한 진술 - 은 존재와 무를 분리하는 차이 너머의 차이를 진술한다: 다시 말하면, 너머의 차이 혹은 초월성의 차이. 그러나 우리는 이어서 곧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이 공식 존재와 다르게에서 부사 다르게는
필연적으로 동사 ‘존재하다’와 관계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작위적인 형태 아래에서 잠시의 도피가 아닌가? 그래서 동사
‘존재하다’의 기의는 모든 말해진 것에, 모든 사유되어진 것에, 모든 느껴진 것에 피할 수 없이 연루될 것이다. ‘존재하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얽히고 섞여 있는 우리의 언어는 신들보다 더 강한 박탈할 수 없는 왕권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왕권자체의 상징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실로부터 더 이상 지상에서 천상으로 나아가는 초월성과 다른 초월성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존재자들과 세계들의 존재는 - 그들 간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 비교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의 운명의 공동체로 묶는다. 이
존재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존재의 단일성이 단지 유비적인 단일성이라고 할지라도, 존재는 이 존재자들을 하나의 단일성으로 논리적으로
결합한다. 이 결합을 해체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 그리고 새로운 상황은 이를 더 강조할 뿐이다. 있음은 존재의 부정성이 남겨둔 빈 공간을 재빨리 다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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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노트: 위의 글에서 레비나스는 <존재의 타자 l'autre de l'être>를 생각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서양철학 안에서 존재의 타자로서 생각되는 비존재는 진정한 존재의 타자가 아니라, 존재와의 다름, 혹은 단지 부정성으로 결국
존재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하는 역활을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존재를 강화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과 하이데거는 그리 다르지
않다.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는 차이를 넘어서 존재의 타자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을 일단 레비나스는 다르게 존재함
être autrement이 아닌, <존재와 다르게 autrement qu'être>라고 말한다. 지상에서 천상으로의
이행이 아닌 초월성을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그런 초월성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안에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 밖에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의 타자가 자리할 것이다. 이렇게 레비나스가 그의 철학의 초기부터 현상학적인 초월성으로서의 세계나 개관성의 개념과는 다른 초월성은 바로 <존재의
타자>로의 넘어섬, 즉 <존재에서 타자로>의 나아감의 운동을 지시한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이 존재의 타자가
무엇 혹은 누구인지 밝혀질 것이다.
주 6.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다.'주'에 달기에는 너무 길어서 노트에 적는다. "존재 전체를 내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를 무 안으로 이끄는 것, 이것은 자살의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자살의 가능성은 운명의 부조리성에 대한 마지막 저항의 수단이다. 싸움의 무용성을 깨달은 순간에도 여기에 나의 어떤 지배 - 자살의 가능성을 통해 존재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 - 가 있다고 믿는 맥베스(『시간과 타자』, PUF, 28-29쪽/문예출판사, 61쪽, 44/82쪽 참조)의 이 저항의 요소는 세익스피어의 비극의 전형적인 요소를 형성한다. 비극이 단지 그리스비극에서 처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운명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승리가 명맥해 보이는 순간에, 영웅은 이 죽음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듬으로써, 다시 말해 이 죽음의 주인이 됨으로써 이 운명을 회피한다. (절망한 줄리엩의 절규를 들어보라! "나는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 안에 간직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햄릿은 맥베스나 로미오와 줄리엣과 달리, 비극 너머에, 혹은 비극의 비극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하지 않음이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절규하는 것은 망설임, 주저, 더 이상 이 부조리성을 자살을 통해서도 지배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를 무화하는 것의 불가능성"(61/82)을 깨닫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어찌해볼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용서할 수 없는 이 존재, 존재의 출구 없음, 존재의 근본적인 부조리성을 보여준다. 바로 여기서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는 악이다. 그것이 악인 것은 존재가 유한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29/45) 하이데거에서 '불안'이 그 이유가 없는 존재의 무에 대한 경험이라면, 만일 우리가 무를 죽음으로 이해한다면, 하이데거와 반대로, 여기서 죽을 수 없음, 그 죽음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무의 불가능성이 불안이, 불안의 원인이 아닌가? (같은 책 같은 쪽)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러한 무의 불가능성의 대한 불안은 레비나스에서 '불면'의 경험으로 드러난다. 레비나스의 철학이 '존재와 다르게 autrement qu'être'인 이유는 이 어찌할 수 없음, 용서할 수 없음, 더 이상 아무 것도 해 볼 것이 없는 l'll n'y a plus rien à faire 상황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더 이상 해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벗어나야 한다"『탈출』). 이 명령, 존재의 운명 숙명에의 저항은 그의 '다르게'를 설명한다. 어찌할 수 없음과 다르게, '어찌 해 볼 수 있음' 그것이 레비나스의 철학일 것이다.
- 본질이 존재의 사건을 의미한다면, 여기서 탈-존재사건이라고 번역한 désintéressement은 우선 미학적인 ‘무관심성’으로 번역할 수 없는 이유는 레비나스가 반복해서 말하듯 나와 타자와의 차이는 논리적인 무관심적인 차이가 아니라, “무관심이 아닌 차이 non-in-différenc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레비나스 자신이 한 대담에서 밝히듯이, 이 단어는 dés-inter-esse-ment으로 나눠질 수 있다. 우선 이 말에 포함된 ‘inter-esse’는 “존재 안으로 들어옴 être-entre”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 être lié à l'être”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dés-interessement은 레비나스가 말하듯 “존재로부터 자신을 떼어냄 se-retire-de-l'être”을 의미한다. 이렇게 존재가 존재 이외에 다른 것과 관계하지 않음은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자아와 자기의 떼어낼 수 없이 얽혀 있음”(『탈출에 대해서』) 또는 “고독”(『시간과 타자』)이라고 표현된 존재의 ‘자기 관계성’ 또는 ‘자기 충족성’을 의미한다. 이 존재의 자기 충족성은 불어의 ‘intéresser’라는 동사와 ‘intéressement’이라는 명사의 어원적 의미, 즉 “자기 밖의 것을 자신의 안으로 들여오는 행위 importer”, 다시 말해,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 또는 이익이 되는 일과 관계함”이라는 뜻과 맞물려 ‘존재가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 conatus’와 동의어로 이해된다. 이런 맥락에서 탈-존재사건은 자기 존재의 충족성과 코나투스를 넘어서 타자에로/타인에로 나아감, 즉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너머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 (원주) 본질 essence 이라는 용어 - 감히 우리는 여기서 essance 라고 쓰지 않지만 - 는 라틴어의 존재자 l'ens와 구분되는 존재 l'esse, 또는 독일어의 존재자 Seindes와 다른 존재 Sein를 지시하면서 존재의 과정 또는 존재의 사건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 책머리에 붙인 ‘일러두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 플라톤의 『국가』VI, 509b에 나오는 “존재 또는 본질 너머의 선 agathon epekeina tes ousia”을 가리킨다. 레비나스가 그의 전 저적에 걸쳐서 의존하는 플라톤의 이 공식은 그의 전기 저서,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서문에서 그가 밝힌 것처럼, 존재를 넘어가는 초월의 운동을 이끄는 순수한 지표로 작동한다. [본문으로]
- 『소피스트』255d6-257b. 운동이 정지에, 동일자가 타자에/같음이 다름에 대립되는 것과 달리 존재에는 그 대립되는 종이 없다. 서양철학사의 전통에서 “존재의 타자”를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한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존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존재의 타자로서 ‘비-존재 non-être’를 생각해 보지만, 이는 곧 존재와의 ‘다름’으로, 다시 말해 순수하게 논리적인 부정성으로 - “...이 아님”, “...과 다름” - 환원된다. [본문으로]
- (원주) 있음 l'il y a이라는 개념에 대한 것은 나의 책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93쪽 이하를 보라. [본문으로]
- 존재 전체를 내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를 무 안으로 이끄는 것, 이것은 자살의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자살의 가능성은 운명의 부조리성에 대한 마지막 저항의 수단이다. 싸움의 무용성을 깨달은 순간에도 여기에 나의 어떤 지배 - 자살의 가능성을 통해 존재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 - 가 있다고 믿는 맥베스(『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61쪽, 82쪽 참조)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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