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려라." 아주 단순한 말. 그런데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말. 인내는 이미 나의 의지뿐만 아니라, 나의 참을성을 떼어냈다. 만일 내가 여전히 기다릴 수 있다면, 인내가 내 안에 내가 부여잡고 있는 이 나를 다 고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내는 "전혀 수동적이 아닌", 따라서 수동이 능동에 대립하는 그런 삶의 수준을 포기하는 수동성으로까지 전적으로 나에게 열린다. 우리는 타성의 밖으로 던져진다(타성적 사물은 그의 상관자, 살아있는 자발성, 순수하게 자율적인 활동과 함께, 그에 아무 반응 없이 쫓는다). "가다려라." 누가 이것을 말하는가? 아무도 그것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그것을 들을 수 없다. 인내는 자기를 내세우지도 자기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죽음의 수동성이다. 그것에 의해 더 이상 내가 아닌 나는 재앙의 한계없음에 대답한다. 이것은 어떤 현재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 인내에 의해 나는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도, 그것을 따르기 위해 나로 남아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재앙의 타자와의 관계를 짊어진다. 인내에 위해 나와 인내하는 나와의 모든 관계는 단절된다.
- L'emphase: "Soit patient." Parole simple. Elle exigeait beaucoup. La patience m'a déjà retiré non seulement de ma part volontaire, mais de mon pouvoir d'être patient : si je puis être patient, c'est que la patience n'a pas usé en moi ce moi où je me retiens...
- le discours sur la patience
'블랑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난의 글쓰기(14) (0) | 2012.02.09 |
---|---|
재난의 글쓰기(13) (0) | 2012.02.08 |
재난의 글쓰기(11) (0) | 2012.02.08 |
재난의 글쓰기(10) (0) | 2012.02.05 |
재난의 글쓰기(9) (0) | 2012.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