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실, 칸트가 보기에, 그가 명시적으로 말한 것처럼, 종교의 두 기원, 혹은 두 뿌리, 두 가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계보에 대해서 왜 이 둘은 여전히 같은 이름, 고유한 혹은 공통의 이름을 가지는지를 물어야 한다: 제의로서의 (des blossen Cultus) 종교는 "신의 호의 faveurs de Dieu"를 탐구한다. 그런데 그 근본에서,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종교는 행위하지 않으며,
다만 기도와 욕망을 가르칠 뿐이다. 인간은 여기서 더 선해질 수 없다. 다만 원죄를 속죄할 뿐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종교(moralische)는 삶을 선하게 이끄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die Religion des guten Lebenswandels). 그것은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고, 선에 종속하며, 선을 지식과 분리하며, 이
목적을 행하면서 더 선해지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다음의 원리를 따르면서 그 자신의 가치를 유지한다:"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했는지를 아는 것은 본질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반면에 그 자신이 구원받을 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가 "반성적 신앙"(reflekterende)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의 가능성은 바로 우리의 논의의 공간을
연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역사적인 계시에 의존하지 않으며, 다만 실천 이성의 이성성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반성적인 신앙은
지식을 넘어서 선의지에 호의를 표한다. 그것은 따라서 그것은 "독단적인" (dogmatische)신앙과 대립된다. 만일 반성적인 신앙이 독단적인 신앙과
구분된다면, 그것은 후자가 알고자 하며, 따라서 신앙과 지식의 구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의 원리는 다만 규정적, 분류적,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이 구분을 주장한다: 이 원리는
같은 이름 하에 이질적인 종교들을 분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 대해서, 오늘날, 갈등의 장소, 그것이
아니라면 칸트적인 의미에서 전쟁의 장소를 규정한다. 다시 한 번 오늘날, 잠정적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문제를 정립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우리는 그 힘을 잃어버림이 없이 칸트의 테제가 함축하는 것과 그 결과들을 측정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칸트의 다음의 테제는 강하고
단순하고 현기증을 읽으킨다: 기독교만이 "도덕적인" 유일한 종교이다; 하나의 의무가 단지 기독교에만, 그것에만 유일하게 부여된다:
"반성적인 신앙"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필연적으로 순수한 도덕성과 기독주의는 그것들의 본질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개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순수한 도덕성이 없는 기독주의가 없다면, 기독주의적 계시는, 도덕적인 이념이 문제가 되는 경우, 우리에게 본질적인 어떤 것을 가르친다. 이 때에, 이로부터, 순수한 도덕이면서 비기독교적인 이념은 부조리한 것이 될 것이다; 이 이념은
오성과 이성을 통과할 것이고, 그것은 그 용어들 안에서 모순으로 드러날 것이다. 정언명법의 조건지워지지 않은 보편성은 신교적 évangilique이다. 도덕
법은 우리의 심장의 그 바닥에 수난의 기억처럼 기입된다. 법이 우리에게 말을 건넬 경우, 그것은 기독교의 관용구로 말하거나 -
그것이 아닌 경우 침묵한다.
이 칸트의 테제는 (뒤에서 우리는 우리가 전세계라틴화 modialatinisation라고 부르는 것과 이것을 연관시킬 것이다) 그 내용의 핵심에서 그것은, 비록 니체가 칸트와의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이끈다고 할지라도, 니체의 테제가
아닌가? 니체는 아마도 "유대-기독교적"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대표적인 적들 가운데 바울이 차지하는 자리는
기독교에서, 그가 책임졌던 기독교의 내면화 운동에서 드러난다. 유대인들과 유럽의 유대주의는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절망적인
저항, 그것이 존재한다면, 일단의 기독주의에 대항한 최후의 내적 저항을 구성할 것이다.
이 테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사의 중요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유발할 수 있는 가능한 결과들 중에 두 결과와 다른 역설들 중에서 두 역설만을 아주 도식적으로 지시하자:
1)
"반성적인 신앙"과 순수한 도덕의 이념과 기독교적인 계시를 떼어낼 수 없이 연결하는 것의 정의에서, 칸트는 단순한 원리의
논리에, 즉 우리가 그의 편지에서 인용할 한 원리에 의존한다: 도덕적인 방식으로 행위하기 위해서,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신이 우리의 구원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해야 한다. 만일 기독교인이 도덕적이고자 한다면, 바로 이것이
도덕이며 기독교인이다: 선의지에 의해서 행위 한다면, 더 이상 신을 향해서 돌아설 필요가 없다; 결국 마치 신이 우리를 버린 듯이
행위하라. 신의 실존, 자유 혹은 영혼의 불멸을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그런데 또한 그것에 대한 이론을 중지할 것을
허락하면서) 덕성과 행복의 결합, 즉 실천 이성의 요청의 개념은 이 근본적인 분리를 보증하며,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책임, 즉 여기
이 세상에 신에 의해 버려진 자의 결과를 경험적으로 보증한다. 이것은 여기-아래 ici-bas에서 신의 죽음을, 저 너머에서 수난의
모습들을 지속하면서만 기독주의는 자신의 도덕적인 의무에 대답할 수 있으며, 도덕은 기독교적인 의무에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기독주의는 근대의 계몽에서 칸트에 의해 공고되고 다시 불려진 신의 죽음인가? 유대주의와 이슬람은, 이 때에, 우리의 기독주의에서 신의 죽음, 신 안에서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에 반해서 유일하게 용솟는 두 개의 최후의 유일신론일지도 모른다: 세속적이 아닌 이 두
유일신론은 죽음 뿐만 아니라 신 안의 다원성(수난, 삼원성 등등)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속적이 아닌 이 두
유일신론, 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적 기독주의의
심장에서는 아직도 낯선 유일신론. 모든 댓가를 치르고라고 다음의 사실을 상기하자: 유일신론은 유일한 신에 대한 믿음 croyance인 것 만큼, 하나에 대한, 살아있는 하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2) 이 논리의 관점에서, 그것의 형식적 엄밀성에서, 그리고 그것의 가능성에서, 하이데거는 다른 길을 여는가? 사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의식(Gewissen)의, 유죄의-빚진(Schuldigsein)-책임이 있는 존재의 혹은 본래적인 인증(Bezeugung)의 전-도덕적이면서(만일 윤리가 여전히 하이데거가 우회한, 비정합적인 그리고 늦은 도래를 위해 지지하는 에토스 éthos의 의미로 보내진다면, 혹은 전-윤리적) 동시에 전-종교적인 성격에 대해서 주장한다. 우리는 도덕을 종교에 접합하는 것의 <이면>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주의>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필요한 경우, 그것을 더더욱 탈기독화하면서, 그를 기독교적 전통에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의 뿌리를 뽑으면서, 반복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며, 존재론적 반복과 실존적 분석의 반기독적인 일단의 동기들을 부인하기 위해서는 너무 늦은 그런 폭력으로 하이데거가 기독주의에서 취하고 다시 버리기를 그치지 않았던 그의 보다 뒤틀리고 보다 필연적인 전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논리, 그것의 형식적 엄격성, 그것의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법 그 자체, 필연성이며,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무한의 가치상승 surenchère, 이 입장들 사이의 믿을 수 없는 불균형을 기획한다. 이 입장들은 연속적으로 혹은 동시에 같은 "주체"들에 의해서 맡겨질 수도 있다.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근본주의자들", "교조주의자들"은 오늘날 이 가치상승을 과장한다.그들은, 전세계라틴화가, 이 주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인데, (기독주의의 이 이상한 연대, 마치 신의 죽음의 경험과 텔레-테크노 과학의 자본주의의 경험에서처럼) 지배적인 동시에 유한한 순간에, 또 힘이 넘치는 동시에 고갈의 지점에 이르는 순간에, 가치상승을 극도로 과장한다. 단순히 이러한 가치상승의 길에 참여하는 자들은 모든 측면에서, 모든 입장에서, 동시에 전전으로 돌아가면서, 그것의 극단으로까지 전세계라틴화를 이끌 것이다. 이것은 광기, 우리 시대의 절대적인 탈시대성 achronisme 자기의 공시대성의 전적인 분리, 오늘의 베일을 쓴 날. - 과장의 논리,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레비나스가 배운, 이 논리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연역함이 없이, 하나에 전혀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할 수 있는, 레비나스가 "탁월한 길 via emminence라고 부른 것이기도 하다. 위의 데리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레비나스는 근본주의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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