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준다. 가는 길에 만나는 이웃들, 혹은 모르는 사람도 만나기도 한다. 보통은 매일 보는 이웃들이다. 그가 모르는 사람이건 아는 사람이건 우리는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그가 아는 이인 경우 우리는 더 나아가서 별일 없으세요? 날씨가 오랫만에 좋네요. 건강은 어떠세요? 등등 말을 건넨다. 말을 건네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그녀가 내 앞에 손을 내밀고 인사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을 안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이 매일 하는 말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이 말들에 철학자들은 많은 질문들을 제기한다.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그것의 기원에 대해서, 그것의 쓰임의 규칙에 대해서, 그것의 구조에 대해서, 그것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토대에 대해서 질문한다. 무엇이 무엇으로 알려짐, 알려질 수 있음은 바로 이 언어의 '알려질 수 있음'에 의존한다. 그 언어의 알려질 수 있음에 대해서 모든 철학자들이 하나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언어의 알려질 수 있음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인 "무엇에 써먹느냐?" 라는 질문에 이른다. 그것의 유용성에 대한 질문이다. 자주 듣는 질문 중에 철학은 뭐에 써먹느냐? 이다. 좀더 고상하게 질문하면, "철학은 무엇에 봉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언어, 우리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에 봉사하는가? 내가 말을 건넬 수 있는 이 능력은 무엇에 써 먹을 수 있는가? 삽은 땅을 파는데 혹은 흙을 덮는데 사용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은 그것 각각의 쓰임이 있다면, 인간이, 더 나아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이 언어, 매일 하는 이 말은 무엇에 봉사하는가?
레비나스에 언어에 대한 질문은 <전체성과 무한>에서부터 드러난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전에 만나본 적이 없는 언어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다.
"타인의 현시와 더불어 발생하는 것으로, 나를 문제 삼기, 우리는 이것을 언어라고 부른다." (전체성과 무한, 185)
레비나스가 정의하는 언어는 언어 자체 내의 내적 논리도 (예를 들어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 혹은 언어와 존재와의 내적 관계도 (하이데거의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접근), 대상의 확정도(후설의 지향적 객관적 대상), 놀이도(비트겐슈타인), 규범도(하버마스) 아니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촉발되는 것이다. 하나는 촉발하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촉발되는 자이다. 우리는 이것을 촉발적 관계라고 불러보자. 촉발(affection), 감성적 촉발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접합할 것이다. 부름이 있고, 그 부름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 반응은 그렇다고 자동적인 반사가 아니다. 만일 그 부름에 대답할 수 없는 상태라면, 만일 누군가가 통증이 마미되어 어떤 외적 자극에도 반응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는 그녀는 어떤 부름에도 아무 반응이 없을 것이다. 부름 혹은 자극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부름 받는 자는 그것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대답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게된다. 예를 들어 어떤 촉발이 나의 편암함, 조용함을 방해하는 경우, 그것은 눈을 감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내 집의 창문를 닫고 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안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촉발에 대답해야 한다면, 문을 걸어잠금도 하나의 대답이라면, 모든 대답은 바로 레비나스에게 언어이다. 이렇게 레비나스에게 언어는 <나>로부터 이 나에게로 오는 촉발로부터 언어에 접근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의 언어는 '나'로 쓰여 있다. 말하는 주체, 글쓰기의 주체는 '나'이다. 이 '나'는 보편적인 자아로서 인식의 주체도, 도덕적 보편의 명령을 따르는 이성적 주체도 아니다. 이 '나'는 육체를 가진 먹고 소유하는 향유하는 구체적인 에고이즘의 주체이다.
모든 타인은 그가 가까운 이이든 먼 이이든 레비나스에게는 모두 낯선 이방인이다. 그와 같은 언어의 규칙을 공유한다고 해도 같은 지붕아래서 같은 솥의 밥을 먹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멀고 먼 타자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대답하는 '아니다'의 대답은 다른 방식을 통해 '이다'의 대답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 '이다'가 또 다른 '아니다'를 산출한다면 우리는 다른 전제에서 다른 가설로부터 그것을 자기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다. (포퍼는 이 이론을 사회이론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이런 상대적인 타자에 비해 레비나스에게 타인의 타자성은 절대이다 ("절대적인 타자, 그것은 타인이다". 전제성과 무한, 28). 그는 나와 더불어서 셀 수 없는 자로서 나의 복수로서 '우리'라고 말할 수 없는 자이며, 나와 너라는 것도 어떤 공통의 개념을 가진 개인들도 아니다. 어떤 공통의 부분도 가지지 않음 그것은 타자를 타자로 만든다. 그런자는 이방인이다. 한 순간도 내 안으로 동일화 할 수 없는 자이며, 그에게 대해서 나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자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에게 타인은 무수히 널린 상대적인 타자가 아니다. 그에게 나와 타인은 절대적인 분리 하에 놓여있다. (그에게 상대적인 타자에 대한 접근은 <존재와 다르게> 결론 부분에서 몇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분리의 조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정의의 구체적인 실현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그의 철학의 모든 문제의 어려움은 바로 타인의 절대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런데 이 절대성을 제거하고 나면 더 이상 그의 철학은 없게 될 것이다. 이 절대의 의미는 마치 사르트르에게 절대인 의식이 타인에 의해 그 절대임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에서 타인도 절대라고 말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 타인의 시선을 내가 무화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이다. 이런 절대로서의 타인은 그를 가르쳐서
나의 규칙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 수 있는 그런 타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를 위협하는 타자이다. 나의 편안함을 나의
조용함을, 나의 나됨을, 나의 동일성을 방해하는 자이다. 이로부터 나는 그를 가르치는 자가 아닌 이 타자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나는 우리집 아이들을 나의 규칙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기 위해 꼬시기도 위협하기도 한다. 꼬심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규칙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절망은 이런 것이다. 이것이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한 방법은 그들을 내자식이 아닌 타자로, 자유로운 타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그들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끔찍한 사랑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 지쳐서 포기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녀의 타자성을 길들이기 위한 가르침을 포기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결심할 때 진정으로 유지되지 않는가. (프랑스의 대통령 사코지는 자주 국민들을 가르친다. 아니 가르치겠다고 장담한다. 누구도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 매번 그가 가르쳐주겠다고 장담할 때 마다 국민들은 그가 귀가 먹었다고 말한다.)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의 서문에서 데리다가 사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은 타자로부터 배우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레비나스와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타자로부터 배움은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은 자기로부터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모르다. 그것이 윤리 자체"(데리다)이다.
"나눠가지는 공통의 부분의 부재, 그것은 타자를 타자로 만든다. 나의 집을 방해하는 이방인은, 그로 인해 또한 그는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전체성과 무한, 28)
어떤 공통의 경계 - "경계의 공동체" - 도 가지지 않은 두항은 언어적 관계에 의해서만 완성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여기서 타자는 동일자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동일자에 대해 초월적으로 머문다. 그가 초월적이라는 말은 그는 나를 위협하는 나의, 내가 거주하는 세계의 타자성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형식적인 타자성은 내가 거주하는 세계 안의 나의 힘으로 다시 떨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성은 나의 동일성의 이면이 아니며, 동일자의 저항에서 만들어진 타자성이 아니다. 이 타자는 "동일자의 모든 시도, 모든 전제주의에 앞선 타자성"이다. 이 동일자와 타자의 형이상학적인 관계는 담론으로 행해진다. 두 항이 어떤 전체성(예를 들어 세계라는 전체성)도 형성하지 않는 이 담론의 관계는 단지 얼굴과 얼굴을 맞된 관계로, 지울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존재 일반의 경제학 안에서 나로부터 타자로 나아가면서만 산출되어질 수 있다. 이 말은 우선 담론의 관계는 서로에 대해서 타자인 다양한 항들이 오성에 의해 종합되는 그런 관계로 환원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존재 안에서 타자성이 산출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유'가 더 나아가 '나(le Moi)', 자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타자성의 산출의 역전불가능한 하나의 질서를 말한다. "타자성은 나로부터만 가능하다."(전체성과 무한, 29) 이 역전불가능, 나로부터 출발하는 철학, 다시 말해 에고이즘에서 출발하는 담론은 나와 타인의 거리, 이 근본적인 분리를 유지하기 위해 이 에고이즘을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서 이 에고이즘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에고이즘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 이렇게 나와 타인의 담론의 핵심에는 변명론이 자리한다. 타인의 현시로부터 촉발되는 나의 문제 삼음이 언어인 경우, 나의 문제 삼음은 이렇게 나의 존재 유지에 대한 변명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면 내가 존재할 권리에 대한 변명이다. 그래서 그에게 언어는 본질적으로 변명론이라고 말해진다.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는 곧바로 윤리로 연결된다.
"타인의 현전 앞에서 나의 자발성을 문제 삼음, 그것을 우리는 윤리라고 부른다. 타인의 이방성 - 그것은 타인의 나(자아)로의, 나의 사유대상으로의, 나의 소유로의 환원 불가능성 - 은 정확히 나의 자발성의 문제삼음, 윤리로서 완성된다."(전체성과 무한, 33)
"이렇게 담론 안에서 타인에 접근하는 것, 그것은 타인의 표현 -사유가 타인에 대해서 가지는 이념을 매순간 넘어서는 그 타인의 표현 - 을 환대하는 것이다(accueillir). 이것은 나의 능력(용량)을 넘어서 타인을 받아들인다(recevoir)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무한의 이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르침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아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나를 내가 지닌 것 이상으로 이끈다. 이 비-폭력적인 전이는 얼굴의 현시에서 산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의 분석은 절대적으로 밖으로부터 문을 통해서(나의 강조) 도래하는 능동 이성을 발견하며, 이 능동 이성은, 수동 이성과 혼동되지 않으면서, 이성의 활동을 구성하며, 산파술을 스승의 전이적 활동으로 대체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그것을 포기함이 없이 받아들임 그 자체로부터 발견되기 때문이다."(43)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나와 타자는 레비나스에게 평등하지 않다. 이 비대칭적인 불균형은
레비나스에게 "환대의 법"을 형성한다. 또한 오랜 철학의 전통에 어떤 변화를 감지할수 있다. 그가 받아들임을 이테릭체로 강조하듯이 이성은 이제 받아들임, 수용성, 수동성, 감성으로 정의된다. 레비나스는 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정의한다: 감성의 질서. 이성은 감성이 아닌 것, 그것과 대립되는 것, 질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성은 감성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이성 자체는 무한의 이념의 환대로서 환대된다."(A Dieu à Emmanuel Lévinas, 56) 이성은 받아들임 그 자체로부터 온다고 하는 것은 이성은 이제 환대할 수 있음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 이렇게 문턱 위에서 열린 문은 하나의 "말하는 방식"이다. 이 열린 문은 외재성, 혹은 무한의 이념의 초월성의 열림을 상기시킨다. 이 이념은 바로 이 문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이 문은 바로 배움-가르침의 이성과 다르지 않다. 이 문은 누구의 문인가? 그것은 자기집의 문이다. 이 문의 나의 열음/열림을 의미한다. 이것은 데리다가 말하듯, 타자와 더불어 삶을 배운다고 할지하도 삶을 배우는 것은 "혼자 자기로부터 사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 이상은 없다는 윤리 그 자체"(『맑스의 유령들』, 서문)와 다르지 않다. 또한 같은 문장에서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이는 "얼굴의 현시"에서 산출된다고 말한다. 얼굴의 현시를 통해서 레비나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에 앞선 존재자의 선행성"(44)을 의미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얼굴의 개념은 존재에 대한 존재자의 철학적인 앞섬을 의미하며, 힘, 소유에 호소하지 않는 외재성, 플라톤에서처럼 기억의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외재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개념은 그것(타인의 얼굴)을 환대하는 나를 보존한다." (44. 나의 강조)
레비나스에게 이 <나>를 보존함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철학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의 아나키즘에서, 그의 주체성에서, 그의 전적인 윤리적 종속에서, 전적인 수동성의 주장에서, 이 <나>를 보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나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이 불가역성의 윤리의 질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을 것이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언어에 대한 이해는 그의 논문 "언어와 근접성"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지향성에 대한 논문들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존재와 다르게>에서 언어는 이 책의 중심 주제가 된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관심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글쓰씨의 기원이 후설이라고 했을 때, 그리고 후설의 지향적 의미론을 문제 삼았을 때, 이미 예비되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존재의 타자로서 드러내는 주체성은 언어를 언어로 만드는 의미(signifiance)로 이해된다. 후설의 의미작용과 의미대상의 상관성을 말하기(le Dire)와 말해진 것(le Dit)의 상관관계로 바꾸면서 레비나스는 주체를 말하기 안에서 타자의 흔적으로 만들기 위해 후설의 지향적 의미작용을 제거한다.
"말하기는 놀이가 아니다. 언어가 활용하는 동사의 기호들에 앞선, 언어의 체계에 앞선, 의미론적인 간지러움에 앞선 것으로 - 언어의 서문으로서 - 말하기는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 근접성이며, 이 근접성에 연루됨이며,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 즉 의미작용의 의미(la signifiance de la signification)이다."(존재와 다르게, 17)
우리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어,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에 봉사하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레비나스에게 그것은 존재에 봉사하는
것도, 대상에 봉사하는 것도, 대화를 통한 소통에 봉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언어는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의 의미, 다시 말해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함 안에서 알려진다. 언어의 '알려질 수 있음'은 존재의 로고스에서도, 공통의 규칙의 규범성에서도,
이성적 질서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를 위한 하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일단 두 문장을 읽어보자.
"나의 이웃과의 관계는 그 유명한 "의미의 부여"와는 구분되는 의미(signifiance)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미작용(signification)은 이웃과의 관계 그 자체, 다시 말해 다른 하나를-위한-하나(l'un-pour-l'autre)이기 때문이다."(존재와 다르게, 159)
"말하기의 주체는 기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기호로 만들며(se fait signe), 충실로 향한다."(존재와 다르게, 83)
레비나스는 "자신을 기호로 만든다"라고 말한다. 우선 기호(signe)란 무엇인가? signume, 이것은 단어가 사물을 대신하듯이, 나의 서명이 나를 대신하듯이, 어떤 징조가 도래할 불행을, 행운을 대신하듯이, 기호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주체가 말을 할 때, "기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호로 만든다"는 것은 기호의 본래적인 의미,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함" 그 말의 본래적인 의미를 지시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함, 그것은 다른 하나에 대한 충실, 그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 결국 그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기호의 본래적인 의미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출된다. 또한 말함이 무엇을 의미할(signifier)때, 의미하다, 즉 sinificare는 signume(기호) 과 facacer(하다, 만들다)가 결합된 말이다. 결국 위에서 "자신을 기호로 만들다"라는 말은 "의미하다(signifier)"를, 즉 그 말의 본래의 의미에서 풀어서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의미작용(signification)은 자신을 기호로 만드는 것이고, 기호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는 것이라면, 내가 말함은 결국 내가(하나가) 타자를 (다른 하나를) 대신함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체(하나)의 동일성은 타자(다른 하나)에 의해서(그를 위한 자로) 정해진다. 결국 말함은, 내가 기호가 됨은 내가 대신하는 것의 흔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레비나스가 말하는 말하기의 주체는 "기호를 주지(부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은, 후설적인 의미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주체는 정해주는 자가(assigner),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 의미가 정해지는 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전-기원적인, 명령(주인)도 없는(anarchique), 모든 시작보다 더 오래된 동일성, 그것은 현재 안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자기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지정되는 전적인 노출이다. 침입에 의해 내 안으로 들어오는 정해짐(assignantion)이다."(존재와 다르게, 227)
후설의 논리연구에서 드러나는 지향적 언어론은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대상을 지향하는 지향적 활동의 참조의 축이며, 다른 하나는 의미작용의 이념적 통일성 하에서 표현의 활동의 반복을 허락하는 이념적 축이다. 이러한 후설의 두 축은 의미부여 대신에 흔적 만들기를 위해 전복된다. 이를 위해 의미의 이념성은 정해짐의 전-시간성으로, 지향적인 활동은 촉발의 수동성으로, 그런데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타인의 부름에 저항하는 그런 촉발의 수동성(타인을 위한, 나에도 불구하고 magré moi)으로 이동한다. 이로부터 중성적인 주체의 이념적 이론적 의미작용은 먹고 향유하고 상처입는 주체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한 윤리적 관계로 이동한다. 레비나스가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지향 혹은 의도(intention)을 말하면서(EE, 56) 후설의 중성화된 탈육체화된 의도를 비판하면서 그 말의 본래적인 의미인 욕망의 들끓음으로, 어떤 걱정도 없는 순수한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향유하는 주체의 마련이다. 향유하는 주체만이, 그 향유할 수 있음으로 인해 고통을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문제 삼는 후설 의미론의 핵심은 지식의 대상인 노에마(의미대상) 혹은 주제에 놓인다. 사유의 작용, 노에시스는 대상으로 향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객관화하는 시선, 그것은 이념적인 객관화(순수한 의미작용)에 의해서만 측정되는 것으로, 지향된 대상으로부터 되돌아오는 타자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불운의 지수'라고 부르는 대상으로 되돌아오는 타자성에 전적으로 무감하다. 더욱이 타인으로부터 오는 시선을 모른다. 그 시선에 의해 주체의 객관화하는 시선이 변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른다. 비록 그 판단이 거짓으로 판정된다고 할지라도, 이 객관화라는 시선은 그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 실패한 지향, '아니다'와의 만남 이후에도 객관화하는 시선은 다른 방식으로 대상에로의 지향을 시도할 뿐이다. 의미작용이 문제인 경우, 레비나스는 주체와 대상의 상호관계를 불안하게 만든다. 타인은 후설에서처럼 혹은 사르트르에서 처럼 주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차라리 비-대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우리가 자주 철학에서 말하듯 두 영혼의 대화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알 수 없는 타자가 아니다. 그에게 타자는 고통받는 타인들이다. 유일하게 내가 보는 텔레비젼 프로그람은 점심시간 대에 뉴스와 저녁 시간 대에 뉴스다. 뉴스를 보다 보면 좋은 소식보다 타인들의 고통의 이야기들로 30분이 혹은 한 시간이 지나간다. 거의 매일 접하는 전세계의 고통들이다. 그것도 매일 밥먹으면서 보는 것들이다. 내 목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이 매일 넘어간다. 매일 접하는 학살, 재난, 살인, 고문 등등...이 매일의 불행들, 울부짖는 소리들, 이것들은 우리들 마음 안에서 하나의 대상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 앞에서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혹은 "말을 잃어버리다"라는 말을 한다. 텔레비젼으로 혹은 신문으로 혹은 직접 접하게 되는 사건들, 용산의 사건, 뉴욕의 불타오르는 빌딩, 학살, 테러, ... 이것들은 말에 생명을 부여하는 의미작용의 지향의 장소 안에서 구멍을 만들 뿐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것은 소화할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 앞에서, 의미의 부재 앞에서 우리는 단지 말을 잃어버린다, 나의 말에는 구멍이 난다. 의미, 표현성의 상실 앞에서 더 이상 지향성의 대상에 대한 의미작용은 정지한다. 의미의 상실 앞에서 주체는 가르치기를 포기하고, 이제 "나는 사는 것을 배우고 싶다"(데리다)고 마음에 매듭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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