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안에서 고양되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이 거부의 거부는 맑스에 의하면, 실재에 대한 사변적인 모방에 의해 변형을 전적으로 자극하면서 사물을 그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에이른다. 우리가 알듯이, 포이에르바흐는 맑스에 의존해서 헤겔주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우리는 맑스가 명시적으로 말한 것을, 그의 의존에 대해서 1844년 세번째 유고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1 그가 인정한 그리고 떠난 맑스에 대한 빚에 대해서 1845년의 그 유명한 테제들에서 다시 언급하며, 그것을 설명한다. 포이에르바흐에 의한 헤겔의 해방,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상황의 변화를 지각하면서 점점 더 급박해지는 상황에 의해서 요구된, 다른 곳으로 가야하는 위급함에 의해서 요구된 헤겔에 의한 포이에르바흐의 해방이라는 이중적인 해방은 탈출의 원리에 속한다. 헤겔에 대한 포이에르바흐의 비판은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의 <포이에르바흐>편에서 명시적으로 말하듯, 헤겔적인 문제 안에서 파악되고 기입된다. 그 비판은 헤겔적인 개념들의 장치 dispositif의 내적 의미와 방향을 변형한 것일 뿐이다. 이 비판은 "헤겔에 아무 것고 더하지 않으며, 전복된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헤겔의 개념들을 수정하고 다시 다듬과 다시 분배한다. ...이것은 사변적인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이다. 그리고 그것의 진정성에서 진리를 회복한다."2 만일 포이에르바흐 그 자신이 헤겔을 다시 다듬는 것 이상을 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절대적인 탈출의 명령이 생생한 방식으로 요구된다.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을 탈출하기 바로 전 단계이다. 왜냐하면 그는 맑스가 "불의 강"이라고 말하는 철학의 갱신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탈출"은 "새로운 철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철학도 더 이상 포이에르바흐의 철학보다 더 새로울 수 없다. 헤겔과 결별하고자 하는 모든 젊은 철학자들은 <기독주의의 본질 l'essence du christianisme>은 사유의 놀라운 사건이며, 엥겔스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에서 기술하듯 "열광 일반"을 불러일으킨다. 1841년의 텍스트는 그 시대의, 모든 세대의 사유의 놀라운 도약을 촉발했으며, 그 작품의 수용은 비판된 헤겔과 예고된 맑스 사이의 전향이라는 중간 지점에 놓인다.
헤겔의 소외에 대한 주체, 헤겔 좌파에 대한 주체 그리고 헤겔의 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왜 그리고 어떻게 포이에르바흐에서 서로 연결되는가? 포이에르바흐는 그의 인간학적 기원인 "종교의 신비"3를 인간이 신의 환상적인 형상 안에서 소외되는 유사-숭고의 과정으로 기술한다. 종교 형성의 이 과정 안에서, 인간의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성질들은 외재회되고 소외되면서 신 안으로 던져진다. 인간의 본질은 따라서 전적으로 절대로 고양, 초월되며, 절대로 넘겨진다. 그리고 인간 그 자체로부터 단절된다. 인간에 의한 신에 대한 상상적인 구성을 지배하는 이 투사의 과정의 본성을 강조해야 한다. 투사는 전이이다: 인간은 신 안에 유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고유한 무한성을 투사한다. 종교를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유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사이의 , 개별적인 인간과 일반적인 인간 사이의 차이이다. 이 상상적인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과 신의 형상 아래 자신의 본질을 실체화하고 고착하면서 자신과의 거리를 가지고 놓여진 자신의 고유한 본질 사이의 분리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충만하게 실현하고 감당할 수 없는 무능력의 지표이다. 맑스는, 그가 1843년 <헤겔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비판>의 <서문>에서 마약으로서의 종교를 말할 때, 이러한 포이에르바흐의 주제들을 그가 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은 무한의 환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한의, 우리의 고유한 유한성의 뒤집힌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환상의 근원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욕구 안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실제로 상상적으로 신을 인간에 연결하는 인간 그 자체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는 맑스가 1844년 수고에서 번역하듯이, 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재발견해야 할 살아있는 관계로, 구체적인 개별적인 인간의 자신의 본질과의 분리의 치우로 나타난다. 신은 욕망의 대상이며, 그 자체로 신은 종교적인, 상상적인 무의식적인 형태 하에서 우리가 유한과 무한의 간격,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인간의 본질에 동일화하고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고유한 본질을 표현한다. 젊은 헤겔은 이러한 모든 것을 이와 아주 유사한 용어들 안에서 이해했었다. 이러한 기원을 드러내는 것은 사변적인 이중화로부터 어떻게 종교적인 의식의 환상이 자신의 고유한 자기-소외에 의해서 산출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흐는 이 환상적이고 숭고한 투사의 요소들을 분해 décomposition한다: 추상 (실제적인 주체는 추상을 위해 투사적인 절차 안에서 사라진다), 자기 와의 분리 (주체는 대상으로 변형되고 자기를 변형하며, 자신을 객관화하기 위해 감성적이고 구체적인 자신의 성격을 해체한다), 사변적인 이중화 혹은 인격화 (대상은 주체로 자신을 다시 전향하며, 신은 무한히 주체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신은 절대적인 주체이다.
소외와 감성적 구체성, 여기서 포이에흐바흐와 헤겔이 관계하는 어떤 것이 정돈되며, 이 두 요소는 인간의 실제적이고 유사 물리주의적인 감성을 소위 구체적이라고 말해지는 이성과 혹은 이념으로 대체하기 위한 <정신 현상학>의 저자에게 건네진 비판의 평행한 두 축이다.
메를로-퐁티 이전에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이 소외를 마치 "정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과정"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잘 보았다. 그에게 신의 인간학적인 생성의 기원은 바로 이 소외의 개념4을 축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투사의 과정을 명령하며, 부정의 부정 없이5 그것의 부정성 안에서 그 과정을 특수화하고, 그것을 유지한다. 니체 훨씬 이전에 헤겔주의는 가장된 신학으로, 신학만이 진리를 말한다고 믿는 철학으로 분석되었다. 최초의 소외의 해석은 종교적인 것으로 (이것은 맑스의 1843년 경의 글들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에 의한 자신의 본질의 객관화와 관계한다. 이 본질은 자발적으로, 비의지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산출된다. 왜냐하면 의식은 자신을 세계 안에 스스로 정립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외의 해석은 실천적인 것으로 객관화의 사변적인 이중화의 효과 하에서 구체적으로 다시 재분된다. 이것은 포이에르바흐의 분석의 탁월한 특이성이다. 자신의 본질을 객관화(대상화)하면서 자신을 대상화하는 존재는 이 자기 자신의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형태의, 자신의 고유한 창조의 피조물, 봉사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신-주체 안에서 인간-대상이라는 변신 안에 자리하는 "신비"이다. 인간은 이 상상적 형태 하에서만 인간의 고유한 본질에 이른다. 이 자기 자신의 소외된 투사 안에서 이 모든 고유한 규정들을 타자성 안으로 이동시키고, 그는 이 존재에 다른 존재처럼 대립한다. 종교적인 소외는 포이에르바흐에 의해 인간의 객관화의 자동화와 소외의 과정으로 규정되며, 이것은 신적인 주체성 안에서 이중화되고 그것으로 되돌아 간다. 객관화는 존재론적으로 상급의 초월적인 외적인 원리가 되기 위해 인간의 주체로부터 분리된다. 인간은 <기독주의의 본질>에서 읽을 수 있듯이6 자신 안에서 부정한 것을 신 안에서 긍정한다.
종교, 헤겔, 사변적인 해석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결국 종교적이고 사변적인 해석을 물질적인 전복 안에 놓는 데 자리한다. 그의 목적은 결국 인간 경험의 구체성으로, 포이에르바흐의 내재적인 전개와 그것의 고유한 모순들 안에서 파악된 것으로 그가 말하듯 심장 coeur의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지양의 변증적인 산물이 아니다. 인간의 헤겔의 삼중창의 마지막 단어도 아니다. 결국 자기 밖에 정립된 동일성과 차이에 의해 자기(Selbst, chez-soi)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소외이든 사변적인 것이든지 간에, 그것이 종교적인 구성과 형이상학의 존재-신학적인 구성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기원을 잃어버리는 한에서, 소외의 모든 양태들로부터 정교로부터 인간을 실제적이고 감성적인 토대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휴머니즘 혹은 유물론, "새로운 철학", "미래의 철학"은, 신학적인 환상이 그 자체로 인간학적인 전복, 자신의 비판적인 회귀를 가져오는 한에서, 가치의 전복에서 유지된다. 만일 소외된 산물로서 종교가 투사의 전향에 따른 전복의 전복, 전향의 전향이라면, 그것은 탁월한 "탈소외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만일 종교적인 환상이 인간에게 신 안에서 그가 그 자신 안에서 부정한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은 신 안에서 인간이 자신 안에서 긍정하고자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개인의 객관화된 그리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초월로의 도약이 그의 내용에서, 그의 실체에서 주체적인 내재성을 비우는 것이라면, 철학의 본질적인 의무는, 적어도 "미래의 철학"의 의무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내재화의 제스쳐로 잘못 사물화 되고 주체화 된 이 초월성에 부여되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신을 비실체화된 자아(le Je désubstantialisé)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최상의 것을 최하의 것을 데려오는 이 방식 안에서, 포이에르바흐의 새로운 철학은 유물론 (matélialisme) 으로서 정의된다. 포이에르바흐의 제스쳐는 모든 철학을 인간학적인 영역 안에 정립하는 데에 있다. 인간학은 존재-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과 동일시되는 철학을 대체한다.
- 맑스, 1844년 유고집, Editions Sociales, 1968, p. 126-127. [본문으로]
- 알튀세, 철학적 정치적 글, II; Stock/IMEC, 1995-1997, p. 180. [본문으로]
- 기독주의의 본질, Paris, Maestro, 1982, p. 147. [본문으로]
- 기독주의의 본질, p. 147. \"인간 - 종교의 신비 자체인 인간 - 은 자신의 본질을 객관화하고, 자기 자신을 주체, 인격 안에서 변신된, 객관화된 이 존재의 <대상>으로 만든다.\" [본문으로]
- 1844년 수고, p. 127. [본문으로]
- 기독주의의 본질, p. 14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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