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x le sortant, Une pensée en excès, Gérard Bensussan
맑스 탈출자, 위반의 사유, 제라르 벙쉬상
Paris, Hermann, 2007.
http://www.abdn.ac.uk/modernthought/blog (벙쉬상의 이 책의
“영어 서문”은 다음의 사이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아래 번역은 불어책의 <서문>(p. 5-17) 번역이다. 서문을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실패, 탈출, 위반.
.......................................................................
필립 라쿠-라바르트를
기억하면서
- 벙쉬상은 스트라스부르크의 마크 블로흐 대학의 선생으로
독일관념론(특히 헤겔 이전의 셀링)과 유대 철학 전공이다. 또한 그는 라쿠-라바르트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맑시즘의
비판적 사전 Dictionnaire critique du marxisme>을 낸 적도 있다. 이 책은 절판되어서 당분간은
구할 수가 없지만, 인터넷에 이 사전에 떠 있기 때문에 찾아서 읽어 볼 수는 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를 기억하면서"라고 그가 적은 것은 이 글이 출판될 즈음에 라쿠-라바르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학문적인 빚을 말하기도 한다.
- 이 글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제목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그의 맑스 읽기의 새로움에 있다. 여기서 맑스를 "탈출자" 혹은 "탈당자"라고 말하는 것은
독일관념론으로부터, 특히 헤겔로부터, 더 나아가 철학 그 자체로부터의 <탈출> 혹은 <탈당>을 말한다.
<서문>
실패(p. 5-7)
우리가 오늘 여전히 맑스를 읽어야 하는, 더 나아가 다시 읽어야 하는 수고를 할 만한
어떤 가치가 있는가? 더 나아가 맑스에 대해서 써야할만한 어떤 진정한 이유가 아직도 있는가? 맑스는 우리로 하여금 아직도
무엇인가를 쓰도록 유혹할 수 있는가? 그의 현실적인 “실패”의 경험 후에, 맑시즘이라는 이름으로 지시되는, 그것의 역사적인 운동의
비극적인 현실 안에서 말해지는 그 “실패” 후에,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떤 측면에서부터 맑시즘과 등가의 혹은 그것만큼 중요한
어떤 사유를 파악할 수 있는가? 이 실패는, 맑시즘으로 되돌아감이 없이, 그를 다른 사상가들과 다른 사유들과 함께 생각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야할 필요성을 지시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맑시즘의 재난과 그것의 붕괴로부터 그의 고유한 사유를 다시 방향 지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맑시즘에 대항한 숙명적 간계에 의해 되돌아온 일종의 역사적인 증거에 의하면, “역사”와 그것의 “쓰레기들”에
의한 영광스런 증거에 의하면, 이 실패는 사실 더 이상 그 자체로 맑스의 사유 - 헤겔에 의하면, 앞선 위대한 사상가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사유 - 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붕괴하지 않았는가? 이 글은 전적으로 다른 전망과 전적으로 다른 글쓰기의 긴장을 가지고 거꾸로 이 실패한
사유를 질문하는 데에, 그리고 맑스의 사유가 만난 어려움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것의 실패를 측정하는 데에 바쳐질 것이다. 실패는, 하이데거가
셀링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철학적인 성공 보다 더 가치를 가진다. 맑스가 만난 어려움들은 이론적으로 생산적이지 않은 반동적인
해석이 말하듯 실패의 지표나 그것의 증거라기보다는, 맑시즘의 역사적 변종과 그것의 실행들에 의해서 고갈되지 않는, 그렇다고 그것이
역사가 아무 것도 구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그의 사유가 던지는 삶의 약속 그 자체이다.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이미 다 소진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사유의 실패를 목적론적으로 서명하는 “증거”와 역사라는 거대한 대륙의 위상학적이고 기능적인
“법칙들”을 명시하는 역사적으로 아직 오염되지 않은 이론 사이에, 위험한 진리의 역류하는 운동과 역사적인 개념들의 숙명론적인
반역사주의 사이에, 맑스와 더불어 더 자주 맑스를 거슬러서, 그에 반해서 이 어려움들을, 그것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성격들과
난제들을 그것들을 유지했던 열망과 사변과 형이상학과 철학과 더불어 끝날 그 최대의 열망의 정도를 따라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이 열망은, 데리다의 철학의 종말의 시나리오라고 부르는 것에서 파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끝날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으며,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예비적인 방법과
탐구는, 만일 맑스의 사유의 시초가 그의 사유의 전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단독적으로 끝이 없이 자신의 길을 만들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를 그의 사유의 시초로 돌아가도록 명령한다.
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 시초는 균열들과 단절들로의 거대한 영역 즉, “단절”과 그것을
구성하는 영토의 우연성들이라는 알튀세의 지도에서 보면 “젊은 맑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으로 향하는 것은, 보게 되겠지만,
정해진 날짜에 따른 위치화 이후에, 연대기적인, 전기적인, “인식론적인” 양태와 다른 양태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무는 것이다.
옆길로 맑스에 접근하는 것은 그의 사유를 위대한 독일 형이상학으로서 다룰 것을 강요한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그를 위대한
반형이상학으로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에 대한 편지』에서 “형이상학적 진술의 전복은 형이상학적 진술로 남는다”1라는 공식을 따른다면 어떤 역설도 없다. 이 공식은 알튀세가 맑스를 읽으면서 맑시즘에 대한 그의 해석과 재
진술을 했을 때, 그를 이끌었던 인도의 끈이었다. 남은 문제는 맑스의 전복, 즉 『자본』의 저자의 지속적인 반-형이상학이 우리가
앞서 말한 공식으로부터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히 끌어내어질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 하이데거의 진술은 구조적으로 그 토대에서,
철학사를 이끌고 유지했던 단절, 전복, 반박이라는 복잡한 연속 안에서 모든 철학사에 양향을 미친다.
탈출(p. 7-14)
만일 맑스의 사유가 알려질 수 있음의 조건들 -이것은 동시에 이론적인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한데 - 이 그의 젊은 시절의 질풍노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맑스를 위대한 형이상학자로 또는 후기-형이상학자로 혹은
반형이상학자로서 접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 본질적으로 헤겔적인 전통 안에서 그를 읽어야 한다.
물론 이 “안”에서, 그리고 이것에 “반”해서 읽어야 한다. 이 이동을 작동시키는 것은 바로 탈출(Ausgant)에 대한 모든
질문에서이다. 1888년 엥겔스는 그의 유고『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의 서문에서 실질적으로 맑스의
반형이상학적인 주장을 논의의 대상으로 다룬다. 여기서 엥겔스는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의 기여』에서의 맑스를 인용하면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이데올로기적인 독일 철학의 주장과의 대립을 밝힐 것, 사실적으로 말하면, 이전의 우리의 철학적
의식을 가지고, 다시 말해 후기-헤겔주의 철학의 비판의 형식 하에서 실행된 기획을 가지고 우리의 입장을 정리할 것”) 그의
주장으로 의도적으로 돌아가면서, 엥겔스는 40년간의 “대강의 그러면서도 일관된”2 주장들을 정리하고자 하며 동시에 “우리와 헤겔 철학과의 관계, 그로부터의 탈출과 분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비록 그가 종말과 더불어 그 철학을 끝냈다고, 그 탈출로부터 성공했다고, 영원히 그것으로부터 탈출했다고 믿었을 때조차, 철학의
종말(Ausgang)을 알리는 이 탈출(Ausgang)은 맑스의 모든 행로를
규정하는 한 모습이다. 이 탈출은 우리가 제기하고자 하는 질문들과 떨어질 수 없는 이론적인 연대를 가진다. 끝으로 엥겔스를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이 탈출의 운동, 항상 위협받는 이 형이상학으로부터 탈출하는 맑스의 운동이 그가 그의 독자들과 활동가들에게
반복적으로 전달해 준 요소들, 개념들, 장치들에 대한 읽기와 재 읽기였었는 가를 그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전 관념론의
형이상학의 역사 “안에서-반해서” 혹은 “안에서-넘어서”(데리다) 맑스를 읽는 것은 맑스가 자신을 밖에 기입하면서 그 안에 자신을
기입한 형이상학적 전통의 자원들이 그에게 더 이상 무엇을 제공할 수 없는 “고갈된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연습과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술적 위상론(“철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과 동시에 탈출의 실천적 사건(“그것을 끝내야 한다”)을
어떻게 동시에 이해해야 하는가? 모든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철학에 대한 맑스의 전적인 거부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는
그의 탁월한 새로움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의 모든 과거는 그것의 모든 무게, 다가올 지식의 무게를 단번에 잘라내고 덜어버린 듯이
보인다. 의식과 주체성의 철학은 모든 환상의 공간으로, 모든 전향의 거울로서, 이데올로기로서 가차 없이 벗겨지는 듯이 보인다.
모든 것은 마치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 위에서 언급한 탈출의 이중적 이행 안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관계했던 그 유명한
1845-46년의 독일 관념론까지 포함해서 - 몇 년 동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것이 발명되는 듯이 일어난다.
탈출은 이제 다른 탈출자들, 즉 탈출에 실패한 이들에 - 바우어 스테너, 포이에르바흐 그리고 그 동료들 - 대항해서 소진된다.
그들의 실패는 그들이 관념론적 전통의 유약한 후계자들이라는 데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관념론의
진리를 육화했다는 데에 있다.3 젊은 맑스의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어보라. 우리는 철학을 끝장내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젊은
철학자를 만날 수 있다. 그는 한 방의 은총으로 철학을 단번에 집어 던지고(끝으로서의 탈출), 그것에 새로운 출발을
정해준다(탈출로서의 탈출). 그는 이것을 사변적-반사변적인 방식으로 놀랍게 행한다.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는 이러한 것의
모범이다: 집중된 엄격성, 균열 없는 첨예함, 흥겨운 결단은 - 호젠쯔바이크가 말하듯 마치 이오니아에서 예나에 이르는 저
존경스러운 모든 철학자들이 마치 3페이지의 초등학교 공책 안에서 사라질 수 있는 듯이 - 몇몇 교정 불가능한 그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해 이 존경스런 철학의 동지들의 언어로 말할 의무를 잠정적으로 떠난다. 관용구와 번역가능성의 문제는 끝없이 맑스의
텍스트성과 그것에의 우리의 접근가능성을 규정한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에서 다른 철학으로, 혹은 다른 것으로 어떻게 이행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어떻게 이론적으로 실수 없이 말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석하고, 이전시키고 운반해야 하는가? 혹은
“자신의 미래의 시”를 끌어내면서 발명되는 이 언어 안에서 (해석을) 기다릴 것 없이 정착해야 하는가? 개념, 그것은 비록 변형된
것일지라도, “혁명”에 가장 적나라한 적이 아닌가? 이 관계, 즉 맑스가 언어적으로 이 구조적인 계기들을 서로 관계시키는 이
관계는 불안의 계기가 아닌가? 여기의 가장 최악의 철학이 자리한다. 여기에, 예를 들어 『자본』의 어떤 페이지들로 돌아가면,
1845-1846년 전의 철학적이라고 평가된 텍스트들 안에 철학이 아닌 경제학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플레이아드판은 비판
받는다.4 그 전집의 편집 - 그것은 맑스주의자들의 전통, 즉 카우치키스트와 레닌주의자의 전제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
은 “탈출”의 행위를 정립하는 것을 방해한다. 만일 맑스의 저작에 경제적인 것이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 있듯이 철학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적과의 계산”, “분리” 그리고 “탈출(Ausgant)”의 질문들이 우선 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단절 후에
철학적 실행의 장소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함이 없이, 더 나아가 알튀세적인 의미에서 그것의 실천, 즉 개념의 포기 후에
행해지는 철학적 연습, 가능성 없이 행해지는 철학적 현실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물음이 없이 맑스에게 철학이 존재한다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맑스에서 이 철학에 대한 질문은 그의 사변 철학의 전통과의 “분리”의 실행에 의해서 결정된다. 철학자로서의 맑스,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대상을 가지고 철학하는 맑스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이미 탈출한 맑스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보겠지만,
탈출과 종말이 전적으로 가능한 무대 연출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선 탈출하는 맑스를 진지하게 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맑스가 30년 동안의 작업이 행해지는 철학과 다른 곳, 출구, 다른 장소는 그에 의해서 명시적으로 『정치 경제학 비판』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제목, 그것의 가능한 한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철학, 경제 그리고 정치가 같은 전망과 같은 이론적 지시
안에 얽힌다. 그는 이것을 하나의 통일체, 즉 새로운 사회와 역사의 절대적인 새로운 지식으로 향하는 그 유명한 세 개의 “원천”이 하나의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조직적이고 변증적인 과정이 아니라, 구성적인 기획의 계기들의 분산으로 명명한다. 맑스에서 이것들은 변증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변증적인 유물론과의 혹은 사회적 존재에 대한 일반적인 존재론과의
그리고 형이상학과의 단절 후에 다시 근거지어진 철학과 같은 것은 없다. 철학과의 관계를 말끔히 계산해서 청산하는 것, 그것은 단 한
번에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헤겔과의 관계에서 헤겔주의와 독일 사변철학의 악을 끝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맑스가
말한 것이고 그가 한 것이다. 이 아주 의식적인 극단성, 이 전적인 전복이 철학의 영역에 가져온 지진은 맑스로 하여금 이 재난을
피해서 멀리 다른 대륙으로 가도록 준비하기에 이른다. 위대한 출발로 이어지는 몇 년 동안 철학을 하는 것이 그에게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학 비판은 이때로부터 다양한 형식의 탐구의 이론적 자기화를 대상으로 삼는다. 형이상학과 관계 없이
전개된 이 노력은 맑스가 자신의 고유한 도약 안에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지속적으로 맑스적인 일종의 철학의 태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맑스는 끝없이 재철학화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어떤 해도 입지 않았다고 믿는 것 안으로 단순히
순수하게 다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철학을 다시 취하는 것, 이 구멍들, 그리고 낯선 것이 된 이 언어,
그런데 더 이상 치욕이 아닌 망각되었던 소중한 모국어처럼 돌아온 이 언어는 정치 경제학 비판이라는 작업장의 인식론적 지속과 이
지속의 지위와 이 단절의 현실성(effectivité)을 질문한다. 나는 수많은 예들 중에 하나의 예를 들것이다 - 그런데 나는
다른 예들로도 참조할 것이다. 1858년 맑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가 대논리학을 다시 읽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재독은 그가 토대(Grundrisse)의 재료들로부터, 그리고 특히 “그의 주체의 정교화의 방법” 안에서 『자본』을 쓰는 데 아주
유용했다는 것을 설명한다.5 이것은 “탈신비화 된” 헤겔의 방법론적인, 인식론적인 그리고 이론적인 재정립, 철학으로의 회귀, 그것의
가능성 자체(같은 편지에서 맑스는 변증법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를 말하는가? 이 질문은 맑시즘의 모든 장애물과 모든
실패의 동기였다 중요한 지점들을 결정한다. 탈출이 문제가 되는 경우, 우리는 한편으로 변증법과 모순으로, 다른 한편 소외로
돌아감이 없이 시작하는 맑스적인 혁명에 대한 평가를 잘라낼 수도 거기에 참여할 수도 없다. 개념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대적이다.
여기서 왜 첫 번째의 연결이 맑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반면 소외는 그에게서 포기되는지를 물어야한다. 그리고 어떻게 이
차이기 그에 의해서 지속되며 반성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개념들의 이론적인 연대는 헤겔로부터 온다. 헤겔은 소외, 낯설게 하기
혹은 외재화를 연속적인 변증적인 자기화의 운동의 원인으로, 즉 정신의 운동에서 생각한다.6 정신은 순수한 자기의식으로, 자기의 고유한 내면성 안으로 접힐 수 없으며, 그렇다고, 비존재 안에서, 자기가
아닌 것 안에서 자기를 잃어버릴 수도 없다. 장신은 말하자면 헤겔이 자기의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자기는
자기와 자기 사이, 객관성과 그 내용 사이의 차이를 더 잘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스스로를 대상화한다.
위반(excès*) 혹은
초과(p.
14-17)
*excès에 대한 번역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 말은 정도를 벗어남 벗어남을 의미한다.
과장, 혹은 과잉의 사유를 의미한다. 위반의 사유, 혹은 초과의 사유.
맑스가 사용하는 변증법, 모순, 소외와 같은 개념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
마지막 개념의 포기, 나머지 두 개념의 유지 혹은 변형은 맑스와 그가 탈출하고자 하는 관념론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결정적인 동기들이다. 독일어 “Ausgant”이 지시하는 불어 동사의 애매성은 그것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불어 “sortir
de...부터 나오다”는 지워질 수 없는 기원으로부터, 우리가 떠나는 그런데 우리가 언제나 그 기원의 흔적을 지니는 사유의
마트리스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영향, 연속성, 연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우리는 단절하는
것에 의해 표시된다. 그것은 또한 ...로부터 오는 것을 의미한다. 왜 변증법은 맑스에서 소외처럼 헤겔주의의 이성적인 사변의
언어에서 포기되지 않는가? 맑스의 이론의 핵심이라고 맑시스트들이 순진하게 항상 설명했던 이 모순은 자신의 논리적 지위를 회피할 수
있는가? 나아가 실재적인 운동의 “과정과 다른 형식 없이” 특징질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 안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질문들 안에서 일종의 탈출의
행위는 정지에 접근하며, 다시 말해 일종의 그럴싸한 이론 안으로의 미끄러진다. 그런데 맑스가 끊임없이 그가 나온 것으로부터
자신을 때어내는 방식 안에서 탈출, 즉 단절에 의해서 의미되는 불연속보다 더 강한 연속에의 노력은 마치 탈출로서,
위반(excès)으로서, 인식으로부터의 탈출(exides)로서, 외재성의 과잉으로서 맑스에 의해서 실천된 놀랄만한 결과들과 이론적
돌출구들과 다시 붙일 수 없는 균열들을 산출한다. 나는 여기서 특히 이러한 위반을 셋으로 구분할 것이다: 우선 명제화된 모든
문장들에 대해 내용의 위반으로서 혁명(브뤼메르의 18일에서
“미래의 시”에 대한 맑스의 말들), 사회적 형식들에 대한 분석, 맑스적인 유믈론의 유일한 실제적인 모습, 모든 모순, 모든
변증적인 부정에 대한 형식과 힘의 위반으로서 분석, 모든 자본의 자기
가치평가와 개념의 자기 명시의 순환 논리의 위반으로서의 과장된 가치(survaleur) 혹은 잉여-가치(plus-value).
나는 따라서 탈출의 행위에 대해서 질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선 맑스가 명령하기를 그치지 않은 기획에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것은 그의 사유를 사유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그의 사유가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을 전달하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우리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문제인 경우 그의 사유에서 우리가 유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닌 데에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 각도에서, 더 정확히 세 개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고려하면서 맑스의 탈출의 행위에 대해서 질문할 것이다:
1. 탈출은 모든
변증법의 단절로서 - 비록 그것이 “유물론”의 형식 하에서
인도된다고 할지라도 - 그 자체 자신을 넘어서 의미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2. 그것의 단독적 현실 안에서, 탈출은 시간 안에서 단적으로 핵심적인 것으로 “소외”의 배재로서 주어진다.
3. 탈출의 행위는 (논리적인) 부정성과 (실재적인) 실증성 사이에 이동하기를 그치지 않는 갈등 안에서 확인된다.
나의 주제를 요약하고 그것의 결론들을 예비하기 위해서 나는 세 부정적 진술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부정적 진술에 속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진술들은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들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 맑스의 유물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경제적인, 사회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형식들의 분석, 이 형식의 효용성에 대한 사유, 다시 말해 그것의 실증성이 존재한다.
- 맑스의 정치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그것의 한계까지 이른 사유, 모든 정치에 대한 혁명적인 위반의 사유, 그리고 혁명적인 무한한 위반이 존재한다.
- 모든 정치 경제학 비판의 위반으로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의 창조로서, 자본의 논리로부터의 단절로서 - 이 단절 없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없다 - 과장된 가치(survaleur)의 극단적인 지점에서만 정치 경제학 비판이 존재한다. 그런데 항상 이미 맑스 자신의 혁명의 무한한 반복, 모든 관계에서 그의 혁명의 힘의 무한한 반복이 존재한다.
이 작은 책의 의도에
대한 마지막 한 마디를 덧 붙이지면, 이 책은 맑스에
대한 연구(marxologie)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일 세기 반 동안 도금과 진정한 연구 사이에, 계급에의 봉사와
텍스트의 과학성 사이에 덧붙여진 무수한 주석과 해석에 하나를 덧붙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시대는 돌아올 수 없이 변했다. 셀
수 없는 이 페이지들은 궁극적으로 다시 활기를 불어 넣기에는 이미 그 생산성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맑스를 다시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이제 쓰도록 하는 것이 문제이다.” 더 이상 맑스와 맑시즘에 대해서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어떤 이론적인 비교도 하나의 대략적인 기획, 하나의 결과, 개척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작품 안에서
생생한 것과 죽은 것을 나누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맑스는 차라리 우리에게 불확실한 하나의 숫자를 전달해 주었다.
여기서 “사유의 사건”을 발견할 수 있는 지를 물으면서 그것을 철저히 지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여전히 무엇인가를 그에
대해서 쓸 수 있는지 알고자 한다면, 그리고 왜 써야 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맑스를 읽고 또 읽어야 한다. 맑스를 스승으로서
읽어서도 - 더 이상 절대적인 지배자도 권위도 없다 - 또 그를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처럼 고전으로 읽어서도 안 된다. 맑스의
텍스트는 위의 두 규칙을 벗어난다. 맑스는 우리가 읽는 것처럼 아주 가까이서 그리고 아주 큰 목소리로 썼다. “우리가 맑스를 읽을
때,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앞에서 아주 큰 목소리로 읽는 한 독자 앞에 놓인다.” 따라서 맑스에 대한 모든 읽기는 우리를
심연으로까지 독자로서의 맑스와 연결시킨다 -헤겔, 포이에르바흐, 스미쓰, 리타르도로부터 그를 읽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 그들에 대한
그의 읽기까지. 맑스의 읽기는 결국 끝이 없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로부터 받은 유산으로서의 숫자이다. 이 소유격은
끝없이 질문하게 하며, 읽은 텍스트를 열며, 한 사유의 규정되지 않은 공간과 한 행위, 한 부름의 너른 영토를 열어 보인다.
- Heidegger, “Lettre sur l'humanisme”, tr. R. Munier, Paris, Aubier, 1964, p. 71. [본문으로]
- 맑스, 『정치 경제학 비판에의 기여』 1859년 서문, MEW, 13, p. 10.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레흐바흐와 고전 철학의 종말』, MEW, 21, p. 264. [본문으로]
- 맑스, 『정치 경제학 비판에의 기여』 1859년 서문, MEW, 13, p. 10.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레흐바흐와 고전 철학의 종말』, MEW, 21, p. 264. [본문으로]
- 플레이아드 전집은 1권과 2권은 경제학(1968)에, 3권은 철학(1982)에, 그리고 4권은 정치학(1994)에 바쳐진다. [본문으로]
- 엘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p. 160-161. . [본문으로]
- 헤겔, 정신 현상학, trad. Lefebvre, Paris, Aubier, 1991, P; 5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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