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칸트, 어떤 것과 대상으로서의 대상

aurorepark 2010. 6. 13. 02:03


칸트는 철학사에, 그가 선언했듯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어떤 변화를, 되돌릴 수 없는 어떤 변화를 철학사에 가져왔다면, 그것은 오랫 동안 철학에서 주체와 대상이 가지는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온 것일 것이다. 주체와 대상이 만나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식>이다. 즉 칸트는 철학에  새로운 인식의 개념을 가져온다. 칸트의 3개의 초월론적인 질문을 잠시 상기하면 -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지식)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윤리) 그리고 내가 무엇을 희망하는 것이 허락되는가?(정치) - 위의 질문은 첫 번째에 해당된다. 그는 인식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고 구체적으로 묻는다. 이것은 정확히 <대상 Gegenstand>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다. 이로부터 인식의 정의는 따라 나오며, 동시에 칸트의 초월론적인 주체에 대한 질문도 바로 이 대상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온다.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출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후설은 그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쓰면서, 그는 초월론적인 대상이 그의 탐구를 이끄는 인도의 끈이라고 말한다. 후설은 이로부터 더 이상 대상화할 수 없는 것에 이르고, 그 지점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이어서 주체를 발견한다. 그 과정은  칸트를 레비나스와 더불어, 현상학을 우회해서 읽는 현재의 우리에게 하나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체를 주체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것을 우회해서 가는 것은 주체는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대상이고 그 대상의 한계 안에서 주체는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여담: 나는 칸트의 위의 질문 중에서 세 번째 질문을 좋아한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이 질문을 처음 읽고 <황당해 하던 마음>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마음이 여전하다.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철학들은 항상 이러한 황당한 경험 후이다. 철학자를 읽는 나의 습관의 하나는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철학자의 사유를 이끄는 근본적인 질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보통 표면에 잘 안들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 철학자의 전 저작을 결정하면서도 눈에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요즘 내가 읽는 라캉에서 나는 아직도(그를 읽은지도 시간이 꽤 됨에도 불구하고, 비록 집중적으로 능동적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고) 그의 사상을 이끄는 근본적인 질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이 '주체'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많은 책들에서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그것에 대해 별로 설득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그를 읽으면서 이 <황당한 체험>을 만나보지 못해서 일 것이다. 레비나스를 읽다가 만난 황당한 마음이 든 것은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한 구절이었다. 이 질문의 황당함 앞에서 아주 오래 머물었던 기억이 난다.(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가?) 논문을 쓰던 내내 그랬다. 나는 논문을 쓰는 동안 이 진술을 내가 이해할 수 있으면, 그 황당함이 받아들여지면, 그 때 논문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이 질문의 황당함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나의 철학의 길을 열러 주신 선생님의 글에서 이미 만났던 것이다. 그 때도 말 할 수 없이 황당했었다. 그 때 말할 수 없이 선생에게 말도 안되는 질문이라고 저항하던 기억이 있다. 그 구절은 이렇다: "자연계는 왜 양육강식의 사슬 위에 세워지는가. 갑의 생명을 을이 좌우하고 을의 생명을 병이 좌우한다. 그리고 아무의 생명도 좌우하지 않는 자는 없거니와 아무에게도 죄우되지 않는 자 누구인가. 이 자연의 사슬을 거부하는 자 누구인가. 이 자연의 질서처럼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태는 없다. 망각의 순간이 아니라면 어찌 양심의 행위를 자처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이 자연의 질서를 어떤 원칙이나 목적을 지닌 신이 관리하고 있단 말인가"(박동환, <서양의 논리의 동양의 마음>, 0090, 1987, 까치, 20쪽). 결국 나는 아주 오랜 나의 철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나는 다른 곳에서 같은 황당함에 빠진 것이다. 이 질문이 나를 멀리로 이끌었고, 이 질문이 나를 레비나스를 만나게 했고, 이 만남이 칸트를 다시 읽게했다. 위의 레니나스의 진술은 그의 철학을 이끄는 모터이다. 마찬가지로 칸트에게 이 세 번째 질문은 순서상 세 번째이지만 모든 질문에 앞서서 그의 모든 저작을 이끄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내가 요즘 읽는 칸트와 레비나스와 함께 칸트의 현상학적 읽기는 이 질문을 그의 전체 철학 안에서 나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인식의 새로운 정의로부터 시작해 보자.     


젊은 현상학자, 역시 칸트연구자이기도 한 조슬렝 부누와의 탁월한 인식에 대한 요약을 읽어 보자. "우리가 가지는 한 표상이 그에 대응하는 한 대상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이 표상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표상이 한 대상을 가진다는 것은 이 대상에 대한 의식, 즉 <대상으로서의 대상>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표상은 칸트에서 <인식>이라고 불린다."(Jecelyn Benoist, Kant et les limites de la synthèse: le sujet sensible, puf, 1996, 23-24)


사실, 이 인식의 정의를 읽고 나면 더 이상 칸트의 인식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기에는 더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다. 위의 진술에서 내가 꺽쇠 괄호 안에 넣은 <어떤 것>과 <대상으로서의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칸트의 <인식>과 <사물 자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사물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성이 접근하는 이 사물 자체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앞선 글에서 나는 감성론에서 사물 자체라고 불리던 것이 분석론에서 예지체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 둘은 같은 것을 지시하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칸트가 분석론에서 다루는  두 종류의 예지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 해소된다. 하나는 변증론에서 <규제적 이념>으로 해소되고, 다른 하나는 감성론의 사물 자체로 해소된다. 결국 오래 전부터, 플라톤 이래로 예지체라고 하는 것은 독단으로 반박된다. 또한 오랜 칸트에 대한 오해, 플라톤적 전통을 따라서 사물 자체와 현상의 관계를  원본과 복사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멀어진다. 그것은 다만 변증론에서 <무(아무 것도 아닌 것)의 표 table de rien>를 만들면서  ens rationis, "대상 없는 공허한 개념"으로 무(Rien),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그 흔적을 남긴다. 


인식에 대한 칸트의 한 문장에서, "우리의 인식은 정신의 근본적인 두 기원으로부터 유래한다. 그 하나는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인상들의 수동성), 다른 하나는 이 표상들을 수단으로 해서 한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개념들의 자발성); 전자에 의해 어떤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에 의해 이 대상은 표상과의 관계에 의해 사유된다 (정신의 단순한 규정이라는 이름으로)(A50/B74)고 말한다.


위의 진술은 우리가 잘 아는 칸트의 두 인식의 기원을 표시하고 그 각각을 떼어서 각각에 대해 정의를 부여한다. 여기서 감성은 우선 순수하고 단순한 표상의 수준, 마치 <선물>처럼 주어진 것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감성에 각인되는 인상들의 수동성이 강조된다. 오성은 이 표상들을 통해 한 대상을 <인식>하는 데 이를 수 있는 개념의 자발성으로 말해진다. 이 첫 번째 문장은 익히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사실을 전해준다. 이어지는 문장, 앞의 진술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두 번째 문장에서 우리는 어떤 불안을 감지한다. 칸트는 앞 문장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앞 문장을 제한한다. < ; > 그런데 전자에 의해 다만 수동적으로 순수하게 표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자에 의해 이 대상은 앞서 주어진 <표상>과의 관계에 의해 사유된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표상이 있다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칸트는 강조한다. 표상은 칸트에게 모든 의미의 기원으로, 있음의 기원이다. 그런데 칸트에서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어졌는데 그것이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그것이 주어지는 한에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한에서만 그러한 한에서만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그 대상과의 거리를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이 거리가 없이는 우리는 그것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해서 조차도 말할 수 없다. 이 거리는 감성과 사유의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일 사유가 없으면 거기에는 아무 거리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거리가 없는 곳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무엇인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거리를 가지고 유지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칸트가 대상을 'Gegenstand' 즉 '우리 앞의 어떤 것'으로 말했을 때에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혁명이다. 그것은 의미를 가지는 대상은 항상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며, 주어진 소여는 인상들의 수동성의 전적인 지배에서 자신을 해방한다는 것을 말한다. 


칸트가 위에서 감성에 의해 "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이미 오성의 개념을 전제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칸트에게 <순수한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나의 표상은 어떤 대상과 관계한다."(A250) "오성에 의해서, 이 대상은 표상과의 관계에 의해서 사유된다". 이 대상은 직관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상으로서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유가 필요한다. 오성는  다른 대상이 아니라, "감각적 직관의 대상(Gegenstand)만을 생각하는 힘이다." (A51, B75)


칸트의 "있다"는 항상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이 진술이 밝히는 철학사의 한 단절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진술을 접하고 라이프니찌의 유명한 형이상학적 질문,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시 취하는 한 질문을 상기하는 것과 같다: "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있는가?" 다시 말해 칸트의 인식에 대한 질문은 이전까지의 인식에서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무에 의존하던 존재론적 전통과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러한 단절은 이어서 잊혀지고 무시된다. 헤겔이 칸트를 다시 그 이전으로 돌렸으며, 하이데거도 거기에 동조한다. 레비나스는 이 흐름을 다시 칸트에게, 칸트가 열어 놓은 이 단절의 중요성을 자기 철학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물론 레비나스 전에 후설은 헤겔적인 전통이 아닌 칸트와 더 나아가 데카르트적 전통에서 다시 칸트의 이 단절을 살려낸다. 그의 철학의 출발은 "il y a quelque chose",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인가가 있다"는 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정확히 후설이 말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실존에 대한 현상학적인 질문이다. 이 사실이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절차를 필요로 한다. 사실은 한계가 없으며, 반면에 권리는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모르고, 그 끝을 모르는 그녀이고, 그는 그녀에게 한계를 정해준다. 


[여담: 지나가는 김에 또 한 여담을 하자면, 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얻은 진실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처음 알려 준 사람들은 소피스트들이다. 소피스트들은 이 사실의 한계 없음을 처음 우리에게 실천적으로 보여준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하나의 사실이 두 가지 다른 논증의 질서에 따라서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시장에서, 법정에서 보여주었다. 라틴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불어 안에서 사물 <la chose>은 그 기원을 멀리는 res에, 가까이는 causa에 두고 있다.  이 res는 희랍어의 법적인, 수사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논의해야 할 사실 혹은 사태>를 지시하는 <pragma>에 가장 가깝다 (Aristote, Topiques, I, 18, 108a 21, Rétorique,III, 14, 1415b 4). 라틴어의 <causa>, 이 말은 <소송>을 의미한다. 법이란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다. 여기서 법(le droit)이라고 함은 권리(le droit)의 문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들>에 대해서 말싸움을 하는 곳이다. 결국 사물은 cause,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불어의 réel은 중세 라틴어 realis, 고전 라틴어 res에서 유래한다. 실재, 사물, 어떤 것, 사실, 사태는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가장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라캉의 많은 심심한 말장난들에는  사실 아무런 신비도 없다. 칸트가 어떤 것과 대상으로서의 대상을 구분했을 때, 그것은 사실과 권리의 문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res, 그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은 causa를 법정에 불러내서 그것에게 권리의 한계를 주기 위한 것이다. 칸트의 etwas, qulque chose, 어떤 것은 희랍어의 <to ti>는 라틴어에서 quid혹은 res로 말해진다. 이것은 체corps이면서 체가 아닌 것incorporel으로, 플로티누스는 "incompréhensible" "이해할 수 없는 것"(Ennéades VI, I, 25, 6-10)이라고 말한다. 이 유명한 "이해할 수 없는 것", 그와 꼭 같은 표현은 데카르트의 "무한의 이념", 즉 그에게 신의 이념을 설명할 때 발견된다. res에 가까운 또 다른 하나의 희랍어의 기원은 Cassin에 의하면, khrêma이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 인간과 관계한다. 이 말은  우선 khrê, 필요, 욕구와 관련해서 "어떤 것의 구체적인 사용법에 대한 탐구>로, kheir, 즉 <손>과 관계한다. 이 말로부터 하이데거의 vorhanden, zuhanden이 유래한다는 것도 상기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들을 지시한다. 이 말의 복수, khrêmata는 <부>, 자산을 의미한다.  khrêmata 이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pantôn khrêmatôn metron estin anthrôpos>라고 할 때 발견할 수 있다. 카셍은 크레마타를 하이데거가 읽듯이(그녀는 항상 하이데거의 희랍철학 읽기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 사용의 임의성에 대해서,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그 부당성에 대해서 말한다) 현상이나 존재자들과 관계시키는 것에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이 말은 사용과 소비와 관련된 경제의 흐름 안에서 파악된 인간적 사물들을 말한다. 이것(khrêmata)는  pragmata(비규정적인 것)를 규정하는 데, 그것을 활동에 따라서 자르는 데, 그것을 세계 안에 정지시키는 데에 자리한다. 후자가 현상과 현상학과 관련해서 주어진 것과 관계한다면, 전자는 이것에의 인간의 연루, 실천, 사용과 관계한다. "케레마타, 프라그마타가 말하는 이것들은 존재론의 역사를 피해간다."(Cassin, Vocabulaire européen des philosophies, p. 1079)]


칸트가 예지체를 다루는 곳은 분석론의 3장 <Du principe de la distinction de tous les objets en général en phénomènes et noumènes, 모든 대상 일반을 현상과 예지체로 구분하는 원리에 대하여>이다. 이 장의 제목으로부터 우리는 예지체 (나는 정말 이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사고물'이라고 부르던가, 아니면 '생각된 것'이라고 부르든가 그도 아니면 그냥 '누메나'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이 말을 이해하는 데 쉬울 것이다. 이 말은 오성이 직관의 도움 없이 생각해 낸 이념, 생각들이다. 사유된 것(들)이다.) 의 논의는 우선 대상의 문제와 관계한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이 장에서, 사실, 칸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Gegenstand)과 예지체, 생각된 것, 사고물, 이전에 대상Objekt이라고 불리던 것들을 구분하기 위해 예지체의 논의를 들여온다. 이러한 구분은 칸트의 철학, 그의 초월론적인 철학의 설립을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온다. 이 구분이 없이는 그의 초월론적인 철학의 구상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가 라이프니찌의 대상의 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상의 개념을 생각했을 때, 그것의 내기는 그의 철학을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끌 수 있는 한 가능성을 열어 놓은 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멀리 1772년 마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대상Gegenstand>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나는 우리가 우리 안의 표상이라고 부른 것과 대상의 관계가 어떤 토대 위에 의존하는 지를 묻는다."  Gegenstand는 '... 앞에'를 의미한다. 의식의 표상이 마주한 대상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을 하나의 표상으로 가질 때, 이 표상이 관계하는 대상을 지시한다. 칸트 이전에 표상은 그 자체 의식의 대상으로 불려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이 표상이 직면한 대상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이 질문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정확히 초월론적인 질문으로 현상의 현상화, 즉 주어진 것의 주어지게 하는 것의 조건에 대한 탐구를 지시한다. 다시 말해 현상을 현상되게 하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근본적으로 의식의 소여와 이 소여의 주어짐과 줌(수여, 선물)의 관계에 대한 이후의 모든 현상학의 문제를 예비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이 탐구가 열어놓은 영역은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괴물스러운 동시에 그 말이 함축하듯이 탁월한 한 영역, <실존>의 영역을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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