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아자비님께, 정치와 윤리에 대해서

aurorepark 2009. 2. 24. 22:09

아자비님께


문제가 된 논문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논문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단지 그 문제의 단락의 전-후 맥락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아자비님의 화를 좀 진정시키는 데는 꼭 그 글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아자비님께 드리고 싶은 말은 아자비님의 화를 부른 그 문제의 단락은 저에게는 레비나스의 타자에 개념에 대한 정확한 더도 덜도 아닌 그의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놀랄 일도 더욱이 화를 낼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아차!’의 실수를 한 것도, 그도 ‘인간이라’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구절은 레비나스 철학의 주체와 타자 개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진술이라는 것입니다.  


레비나스에게 타인은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지옥”이며,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면, “가장 욕망하기 싫은 것 le non-désirable”(De Dieu qui vient à l'idée, 114.)이며, “내가 유일하게 죽이고 싶은 자”(Totalité et infini, 216.)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들에게 무한한 책임이 보편적인 환대의 의무가 있습니다. 레비나스에게 타인이 우선적으로 친족 혹은 친절한 이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반대로 나를 박해하는 적을 의미한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는 것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레비나스 철학의 모든 현상학적인 내기가 결려 있습니다. 이런 의식은 비-지향적인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은 내가 지향하는, 내가 욕망하는 대상과의 일치를 구하는 행복한 의식이 아닙니다: 지식과 다르게 Autrement que savoir.


누가 나에게 레비나스의 철학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다음의 레비나스의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이다.” 모든 존재가 존재할 권리를 자연적인 권리로 주장하는 한 가운데, 이 반-자연적인 주장은 제게 머리를 깨는 질문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살 권리를 주장하는 현실에서 이 질문은 존재의 살 권리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고발하는 그런 진술임에 분명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하는 자를 향해 “너 어디가 잘못 된 것이 아니냐?”고, “어디가 아픈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질문입니다. 아파도 머리가 잘못되었어도 상관없이 인간이기에 물을 수 있고, 인간에게만 가능한 이 질문은 레비나스를 공부하면서 나의 철학적인 화두가 되었습니다 :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이 레비나스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했는가? 봄 날 볕 잘 드는 벤치에 앉아서 해바라기하다가 파스칼에게 불현듯 찾아든 병적인 생각 : “이 볕 잘 드는 벤치의 이 내 자리는 이미 이 자리를 누릴 수 있는 다른 자의 권리를 내가 훔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이 들이 볕 잘 드는 벤치를 차지하기 위해 질주하는 세상에서 - la bonne conscience - 이런 생각은 하는 자는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님에도 “자책에 빠진 병적인 의식 la mauvaise conscience”입니다. 이런 의식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체를 문제 삼는, 타자에 의해 주체가 문제가 되는 그런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분석하는 것은 다름 아닌 레비나스의 주체의 주체성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체의 자리 아닌 자리를, 장소 아닌 장소를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만일 친절한 이웃만이 타자라면, 나를 박해하는 자는 타자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동지만이 타자이고 적은 타자가 아니라면, 보편적인 환대를 말하는 그의 책임론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며, 타자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 적과 동지의 개념에서 출발할 경우 - 거기에는 현실적인 정치가 존재하며, 먹고 먹히는 관계가, 혹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잠정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타협의 정치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Le politique après!” 정치적인 것은 나중에! (Au-delà du verset, 221.) 이 구호는, 레비나스와 데리다 둘 다에게 적용되는 구호로, 정치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구분하고 윤리적인 것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아니키즘적인 입장을 대변합니다.  


더욱이 타자가 문제가 되는 상황은 내가 먹어서 소화시킬 수 있는, 다시 말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타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타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동일자입니다. 타자는 먹어서 소화 시킬 수 없는, 그래서 그 이물질이 내 배 속에서 배알이를 만드는 그런 자입니다. 배가 아프면, 우리는 묻습니다 : “뭘 잘못 먹었냐?”고. 이 순간 타자의 문제는 주체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합니다. 다시 말해, 주체를 문제 삼는 상황이 도래합니다. 주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 mettre en cause은 주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놓는 것이며, 주체를 법정으로 불러내서 고발 accuser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적이고 이기적인 주체는 윤리적인 주체로 다시 태어납니다. 윤리적인 주체는 배알이를 그치지 않는, 그칠 수도 없는 그런 주체입니다. 그런 주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고도처럼 기다린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배알이를 제대로 겪는 자에게만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 겪음의 과정 - 주체의 주체화의 과정 - 을 겪지 않은 자에게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은 도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체성과 무한』『존재와 다르게...』는 바로 이 주체의 주체화의 과정에 대한, 윤리적인 주체의 탄생의 과정에 대한 긴 이야기입니다. 이런 도래는 밖으로부터 오는 그런 도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에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 타자를 내 안에서 겪음으로서만 나에게 도래하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금 레비나스의 상향초월과 하향초월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의 주체성을 레비나스를 동일자 안에 타자를 가진 그런 주체라고 말합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 타자를 소화시키는 순간, 아니면, 그 타자에게 내가 먹히는 순간,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더 이상 타자이기를 그치고, 주체는 더 이상 주체이기를 그칩니다. 이 편안하지 않은 동거, 나보다 더 큰,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런 자와 비좁은 내 집에서 같이 동거할 때, 비로소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성립합니다. 나를 타자 안으로 소외시킴이 없이, 내 안에 타자를 유지할 때에만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가 성립합니다. 이 관계를 레비나스는 “유한 안에 무한”을 지닌 트로마티즘적 구조 - 인질로서의 주인의 논리 - 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타자에 대한 욕망의 운동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체가 타자를 욕망(지향)할 때, 내 안의 타자는 나를 내가 가장 욕망하기 싫은 것, ‘타인’, 지옥으로 보냅니다. 이 보냄 envoie 여기서부터 우리는 레비나스의 용어의 구분을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의 타자 Autre, 우리가 보통 큰 타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진정한 유일한 타자로서 타인 autrui은 내가 현실에서 감당해야하는 그런 구체적인 타자입니다. 이 타인은 나의 가까운 이웃일 수도 있고, 나의 적일 수도 있습니다. 타인이란 레비나스의 말을 빌면, “le premier venu” 누구든 내가 만나는 사람입니다. 이 누구든 지는 그가 아랍인이든, 유태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그 누구라고 나의 타인이라는 말입니다.


아자비님을 화나게 한 그 구절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레비나스의 다른 글을 하나 읽어볼까 합니다. 1982년 있었던 또 다른 대담(이 대담은 Entre nous에 “Philosophie, justice et amour”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에서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 질문자: “박해자에게도 얼굴이 있는가?”(2009 2 24)

Est-ce que le bourreau a un Visage? (이 질문은 전두환도 얼굴이 있느냐고 바꿔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하마스도 얼굴이 있는가? 히틀러도 얼굴이 있는가? etc.) 


-레비나스: 당신은 악에 대한 모든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의 justice’라고 말할 때, 나는 ‘악과의 투쟁’이라는 이념을 도입하면서, 반면에 나는 ‘악에 저항하지 않음 la non-résistance au mal’이라는 이념과는 결별합니다. 만일 자기-방어가 문제인 경우, 박해자는 이웃을 위협하는 자이며, 폭력을 부르는 자입니다. 그런 한에서 그는 더 이상 얼굴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의 사유의 핵심을 이루며, 내가 ‘비-대칭적인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하면, ‘나 Moi’는 예외적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나는 항상 이 경우 도스토예프스키를 상기하는데, 그의 작중 인물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모두에게 죄가 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이들 보다 더 모든 이들에게 잘못이 있다.” 그런데 이 생각에 제 삼자에 대한 걱정과 이어서 정의의 문제가 더해지면, 비로소 모든 박해자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정의와 다른 인간의 방어에 대한 이념으로부터이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위협으로부터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정의의 질서가 없다면, 나의 책임에는 한계가 없을 것입니다. 정의로부터는 일단의 폭력이 필연적으로 동반됩니다. 그래서 정의를 말하면 법적 판단과 국가 기구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일대일의 대면으로서가 아니라, 한 국가의 한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합니다. 반면에 그 법과 국가의 합법성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은 얼굴과의 관계, 다시 말해 내 앞에 있는 타인과의 관계로부터입니다. 국가는 인간들 간의 상호관계에 기반 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들 간의 상호관계는 국가의 결정론에 의해 규정됩니다. 이런 국가는 전체적인 국가 l'Etat totalitaire입니다. 이 경우 국가라는 개념에는 어떤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홉스에 의하면, 우리는 국가에 대해 어떤 한계도 부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가 아니고, 폭력의 제한에서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레비나스의 답변은 정치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과의 관계, 다시 말해, 윤리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이행의 문제와 그와 반대로 정치적인 것의 윤리적인 것으로의 물러섬이라는 두 주체가 동시에 표명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존재와 다르게...』의 마지막 장에서 길지 않게 다루면서 문제로 남겨놓은 부분입니다. 데리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글들은 이 미완의 장에 대한 ‘보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보충은 구체적인 실현과 비판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위의 글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윤리적인 것의 ‘méta-politique’적인 역할입니다. 이 두 질서는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단의 운동을 함축하는데, 특히 윤리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의 이행이 문제, 레비나스가 ‘정치적인 창출 l'invention politique’ - 정치적인 결정 la décision politique - 이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 Howard Caygill이 지적하는 일단의 위험들이 존재할 수도 있게 됩니다. 레비나스 저서들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몇몇 주장들이 - 자유와 평등에 앞선 형제애에 대한 우선성, 이 주장이 유일신론과 연결되는 경우 발생하는 신정정치의 문제, 여기서 형제가 남성중심적인 사유에 근거한다는 사실, 특히 아들과 아버지의 혈연과 가족에 근거한 부권에의 우선성 그리고 그의 이스라엘과 관계된 시오니즘의 문제 등등 - 정치적인 질서로 확정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들이 편향적으로 읽힐 경우 우리는 레비나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의 철학의 의미와 자리에 대한 철저한 연구 대신에, 항상 과장된 칭송과 과장된 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슬픈 사실과 직면하게 됩니다.



더 긴 얘기가 필요하겠지만, 님의 화가 좀 진정되었기를 바라면서... 그만 쓰려고 합니다.


aurore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