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블랑쇼, <나의 죽음의 순간>에 대하여(1)

aurorepark 2010. 4. 20. 17:11

블랑쇼의 <나의 죽음의 순간>에 대하여

 

95년 데리다는 블랑쇼의 짧은 이야기 <나의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긴 글, "머묾, 허구와 증언 Demeure, fiction et témoignage"을 발표한다. 이 글은 처음 Michel Lisse가 지도한 <자끄 데리다와 문학의 열정>이라는 꼴로그에서 발표되었다. 이 꼴로그는  1996년 같은 제목으로 갈릴레에서 출간되었다. 데리다의 강연은 따로 단행본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1998년 <머묾 Demeure>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이 글에 인용된 데리다의 글의 쪽수는 1998년의 것을 따른다. 그의 글은 'D'로 표시한다.) 

 

1994년 데리다는 블랑쇼로부터 7월 20일이라고 적힌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7월 20일. 50년 전에, 나는 거의 총살되었던 행복을 알고 있다." (D, 64)

 

1994년, 블랑쇼의 나이 87세, <나의 죽음의 순간>이라는 아주 짧은 '이야기'를 파타 모르가나에서 출판한다. 블랑쇼는 1944년 6월 20일 (7월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록은 그 달이 7월이 아닌 6월이었다고 전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 그의 가족들이 머물던 숀 에 루아르(Saône et Loire), 까엥(Quain)에서 총살될 뻔한 사건을 "한 젊은 남자"에 대한 "나"의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한다. 이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죽음의 선고와 그 죽음의 정지, 선고유예이다. "그 순간에....세계는 요란한 전투의 소리와 더불어 되돌아 왔다"라고 시작되는 중간의 한 문장을 두고 두 개의 장면으로 나눠서 읽을 수 있다. 이 순간, 이 정지는 이 이야기의 처음에 말하는 부정의의 실수와 얽힌다.(이 글은 이 두 부분중 앞 부분, 죽음의 선고만을 다룬다.) 이 짧은 글은 블랑쇼의 자서전일 수도, 그의 유언일 수도 있다.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에게 배달되는 이 글의 문장 하나 하나는 모든 블랑쇼의 작품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블량쇼를 읽기 위한 예비적인 절차(예비등록)이다. 마치 그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그 사건의 "증명되지 않는, 경험되지 않는 경험(expérience inéprouvée)"이 그 이후의 그가 쓴 것들의 법과 문법과 운명을 이미 제공하는 것처럼 말이다."(D, 90)  

 

이 이야기의 첫마디는 <"나"는 ..."한 젊은 남자"를 기억한다, Je me souviens d'un jeune homme...>로 시작된다. "나"는 이 이야기의 화자이다. 이 화자, '나'는 어떤 한 남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주체의 분리가 있다"(D, 65). 여기에는 둘이, 두 심급이 있다. 이야기는 삼인칭<그>에게 일어난 것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 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그 끝에서, <나>는 돌아오고, <너>도 돌아온다: <나는 살아있다. 아니, 너는 죽었다.> "제삼자는 모리스 블랑쇼 안에 도입되는 이 분리 - 화자로서의 나와 말해지는 젊은 남자 - 를 표시한다."(D, 66) 이 분리는 죽음의 사건과 더불어 일어난다. 

 

<나는 죽음에 의해 죽는 것을 - 어쩌면 부정의의 실수로 인해서 - 방해받은 한 젊은 남자 - 아직 젊은 한 남자 - 를 기억한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 어쩌면 -  실수로, 판단의 실수, 정의를 실현하는 법의 실수로, 부정의로 인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죽어야 하는 데, 그가 죽는 것이 정의인데, 그는 실수로, 부정의로 죽음을 방해받았다.

 

블랑쇼는 그의 죽음의 정지, 유예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의 다른 글, <죽음의 선고/정지> <광기의 날>은 모두 이 순간과 얽힌다. 그의 삶의 아주 늦게, 50년 전에 일어났던, 죽음의 선고, 그 유예, 정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마치 50년 후에 다시 그를 주체의 법정에 불러내듯이 일어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 이야기는 "연합군은 프랑스에 발을 들여 놓는 데 성공했다.  이미 패배한 독일군들은 헛되이 무용한 잔인성으로 저항했다"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전쟁의 막바지, 1944년을 지시한다. 그리고 장소, 구체적인 장소, "큰 집 (사람들이 성이라고 부르는) 의 문을 누군가, 주저하면서, 두드린다." 항상 카프카를 상키시키는 <성, Château>에 이 젊은 남자, 이 타자는 머문다.(블랑쇼의 은밀한 동반자, 카프카) 이 성과 "부정의의 실수"가 얽히는 것을, 성에서 카프카, 조셉 K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젊은 남자를 ....안다.>

 

나를 항상 동반하는 이 젊은 남자에 대해서, ...나는 안다. "화자는 마치 이 젊은 남자의, 다른 나이의 나의 그림자처럼, 매 순간, 매 발자국마다, 이 젊은이에게 무엇이 일어나는지 증언하기 위해, 그를 동반한다."(D, 73)

 

<나는 그 젊은 남자가 누군가 하룻밤 머물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고 믿고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안다.>

 

화자는 그 젊은이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머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증언하고 인증한다. 그  젊은이는 누군가 도움을 청한다고 (실수로) 믿었지만, 그 문을 두드린 사람은 "모두 밖으로"라고 "부끄러울 정도로 정상적인 불어로" 소리를 지르는 독일군 장교였다. 그 나치는 그 젊은 남자에게, 레지스탕스들을 처형했을 그 총알집들과 총알들을 보여주면서, 이번에는 레지스탕스로 지목받은 이 젊은이에게 이 총알이 곧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위협한다. 좀 전에 "부끄러울 정도로 정상적인 불어"는 이제 "이상한 언어"가 되어, 그 언어 안에서 나치는 "마치 언어가 바뀐 것처럼 혹은 그 자신의 언어의 진리를 찾은 듯이"(D, 76) 그는, 나치는 그 이상한 언어 안에서 숨이 막힌다.

 

<...그리고 이미 덜 젊은 (우리는 빨리 늙는다) 남자의 코 앞에, 총알집과 총알과 수류탄을 내밀면서, 또박 또박 말했다 ...>

 

이 글의 처음에서, 블랑쇼는 "아직 젊은" 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남자는 몇 분, 혹은 몇 초 후에 이제 그는 더 이상 젊지 않다. 괄호 안에 블랑쇼는 "우리는 빨리 늙는다"고 말한다. 두개의 시간이 - 아직 젊은 남자와 늙어버린, 덜 젊은 남자 - 동시에 존재한다. 객관적인 시간과 허구의, 환상의 경험의 시간이 분리되고 겹친다.

 

<장교는 ..."이것이 당신에게 이를 것이다"라고 또박 또박 말했다.> 

 

사형선고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떨어졌다. 화자인 '나'는 이 젊은이의 죽음의 선고과 그 집행을 증언한다.

 

<나치는 규칙에 따라서 인간 과녁에 도달하기 위해 그의 군인들을 정렬시겼다.>

 

이어서, 조금 뒤에,

 

<나는 - 나는 그것을 아는가 - 독일군들이 이미 겨냥하고 있었던, 다만 최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가 그 때 이상한 믿을 수 없는 가벼움, 일종의 축복(그런데 전혀 행복하지 않은) - 지상 최고의 가벼움  - 을 체험했다는 것을 안다? 죽음과의 만남, 죽음과의?>

 

내가 그를 증언하는 것의 불확실성, 내가 정말 그 젊은이가 그 때, 죽음의 순간에 느꼈을 그 감정을 내가 정말 아는가? 이 증명할 수 없는 경험을 말할 수 있는가? 만나본 적이 없는 그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문장의 모든 단어들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죽음과의 만남 그리고 죽음과의?" "이 만남은 죽음이 도달하는 그 지점, 그 한 점에서만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아직, 그 죽음의 점은 이르지 않았다. 그 순간은 곧 닥칠것으로, 아주 가까이 와 있지만, 아직 그것은 도달하지 않았다. 기다림-영원. "올 것으로서의 죽음과 죽음 그 자체, 반대로, 피할 수 없이, 이미 도달한 이 죽음과의 만남: 도달할 것과 이미 도달한 것 사이의 만남. 도달점에의 것과 이미 도달한 것 사이, 올 것과 이미 온 것과의 사이. 오고 가는 것 사이. 그런데 둘이 마치 같은 것처럼. 가상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가상으로서의 현실. 도달한 것은 이미 도달한 것으로 피할 수 없이 도달할 것 앞에서 자신을 알려온다. 죽음은 그것이 도달할 순간으로부터 이미 도달한다. 그것은 온 것으로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올 것이라고 알려지는 순간 이미 도달했다. 그것은 이미 도달했다. 죽음은 이미 자신에 조우한다."(D, 82-83)

 

도달하지 않는, 나에게 이르지 않는 이 죽음의 도래는 나에게, 내가 증언하건데, 그 젊은이에게, 지상 최고의 가벼움으로 느껴졌다. "이 증명되거나 시험되지 않는(inéprouvée)", 경험은 무엇인가? "죽는 것, 그것은 가능성으로서,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으로서 다가온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음과의 이 불가능의 관계를 가진다. 죽음의 순간에,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가능한 것이 된다."(D, 83)

 

<그 대신에, 그 젊은이 대신에, 나는 그 감정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나, 지금, 그 과거의 그 젊은이를 대신해서 그를, 그가 느낀 것을 분석할 수 없다. 나는(현재의 블랑쇼), 그 (또 다른 과거의, 50년 전의 나, 블랑쇼)를, 비록 그 둘이 같은 '나'라고 할지라도, 대신할 수 없다. 내가 나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가? 그 증언의 진실성이 있는가? 나의 지난 선택에 대해서, 나의 지난 행위에 대해서, 지금 내가 하는 증언, 그 변명은 신빙성이 있는가? 그를 증언하는 이 순간, 증언하는 나와 그는 같은 내가 아니다. 이 대신할 수 없음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 말하는 자인 '나'와 그 때의 젊은 말해지는 '나' 사이에 차이이다. 자주, 아주 일상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매 순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순간에 무엇을 느꼈는지 잘 기억을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때 느꼈던 것을 지금 기술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젊은 남자는 죽음의 증인이었다. 이 증인의 증인, 50년 후에 이 화자, '나', 블랑쇼는 그를 대신할 수 없다. 그는 그가 느낀 것, 그 타자가 그 순간에 느낀 것을 분석할 수 없다. ...나였던 것은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자아  l'ego cogito "나의 표상을 동반하는 "나는 생각한다""는 공허한 형식일 뿐이다. 이 형식 안에서 나는 아무 것도 인지할 수 없으며, 이 보편적인 <나>는 내가 아니었으며, 아니며, 당신에게 말하는 나는 이 다른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 그 였던 것을 말할 수 없다. ...이 둘을 나누는 심연은 죽음 그 자체, 무한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둘다 죽는다. 그는 죽고 나는 살아남고, 그는 살아남고 나는  죽는다. 만일 이 둘이 다 죽으면, 누가 살아 남아서 말을 할 것인가?"(D, 85)  

 

<그는 아마도 갑자기 정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블랑쇼는 죽음에 전적으로 노출된, 허약한, 무장해제된 그가, 어쩌면, 갑자기 정복할 수 없는 것invincible이었다(이 되었다)고 말한다. 왜 정복할 수 없는 것인가? 그에게 곧 이를 죽음, 처형될 그가 왜 정복할 수 없는 것인가? 블랑쇼는 <어쩌면>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죽음 앞에 처한 허약한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성'과 같은 것이 되는가? "그에게 덮친것, 그에게 임박한 것은 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도달한 것이고, 그것은 그를 <어쩌면> 정복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정복할 수 없는, 왜냐하면 그는 전적으로 정복되었기에, 전적으로 노출되었기에, 전적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D, 85-86)

 

"죽음-불멸" 문장이 아니라, 두 단어가 연결줄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과 분리, 분리하면서 연결하는 선은 말 없이 모든 논리의 자리를 표시한다: 죽음 그리고 그런데 불멸, 불멸로 인한 죽음, 불멸로서의 죽음, 죽음인 한에서, 죽음인 동안; 일단 우리는 한번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가능한 양태를 따라서 우리는 불멸이 되며, 아무 것도 아닌 것 안에 머물 수 있다. 그는 이미 죽음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선고를 받았기에, 그런데 불멸이다. 그것은 죽음이다. 우리가 죽을 때, 죽음은 두번 오지 않는다. 둘이 죽을 경우, 동일한 두 죽음은 없다. 결국 유일한 죽음은 불멸이다. 다시 말해, 불멸들은 죽음이다. 같은 순간에 죽음과 더불어, 죽음처럼 그에게 이른 것, 그것은 불멸이다. 플라톤 혹은 기독교의 죽음과 수난의 바로 그 순간에 육체를 떠나면서 영혼들이 모이는 그런 불멸론이 아니다. ...불멸이 죽음의 순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경험에 배달되는 것은 죽음 안에서 이다. 죽음의 순간에, 죽음은 도달한다. ... 같은 순간에, 죽음의 점은 분리된다: 나는 죽지 않았으며, 나는 죽었다. 이 순간에 나는 불멸이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기에. 죽음은 나에게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금지이다. 따라서 불멸의 경험 - "거의 총살된 행복"의 경험이라고 블랑쇼가 편지에서 말하는 경험이 있게된다.

 

"죽음-불멸. 어쩌면 엑스타즈."

 

아마도, 어쩌면, 확실하지 않다. 아니, "차라리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공감, 불멸도 영원도 아닌 행복"이라고 블랑쇼는 이어서 말한다. 

 

"이로부터, 그는 은밀한 우정에 의해 죽음에 연결되었다."

 

블랑쇼에게 우정, 여기서 우정은 "마치 그것의 필수적인 요소처럼 혹은 조건처럼 죽음의 수난과 연결된다. 죽음을 위한 우정. 우정은 죽음의 경험을 전제한다. 죽음과의 어떤 우정이 존재한다. 죽음과의 어떤 연대(alliance), 어떤 계약, 어떤 친밀성 혹은 가족성. 비밀스런, 공식적으로 알릴 수 없는, 자백할 수 없는(inavouable), 은밀한 우정의 지하무덤(Crypte)"(D, 90).

 

데리다는 Crypte라고 말한다. 크립트, 이것은 성당 지하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지하의 무덤이다. 또한 크립트는 초대의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보던 장소이기도 한다. 이 크립크는 블랑쇼에게 후에 "우정의 은밀한 공동체"로 말해진다. 그의 글, La commaunauté inavouable(1983), '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고 우리말 번역서가 나와 있는 이 책의 inavouable은 위에 데리다가 말하듯 어떤 연대, 계약, 친밀성, 비밀, 공식적으로 알릴 수 없는, 자백할 수 없는, 은밀한, 죽음에 의해서 연결된 공동체 아닌 공동체이다. 고백할 수 없는, 그로부터 말할 수 없는, 그로부터 밝혀질 수 없는,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반대로 "침묵하기 위해 말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블랑쇼는 묻는다. 쓰지 않을 수 없음으로서의 글쓰기의 진실. 이 말은 우리를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블랑쇼가 작(품)oeuvre이라고 부르는 것, 말하기, 글쓰기와 탈-작(품)désoeuvrement(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무위가 아닌, 작(품)의 부재로 돌아감의 의미에서의 무위에서)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서 위협받고, 희망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한다. 데리다의 언어로 말하면, "계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계산해야하다."(Psyché, 177). 다시 말해, 계산되어질 수 없는 것, 예측되어질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타자에게, 독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계산하고 예측하고 희망하고, 말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