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로부터의 탈출
장-릭 낭시가 말하듯, 근대 주체성과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 이후, 주체성에 대한 비판 또는 해체가 현대 철학을 이끈 중요한 동기들 중의 하나라면1, 레비나스는 어떠한가? 이 비판이 단순한 ‘주체의 무화’, ‘주체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 이후에 다가 올 새로운 주체에 대한 사유의 열림을 의미하는 한에서 레비나스는 이 현대 철학의 경향과 멀리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는 현대 철학의 하이데거적인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초기에 그의 철학적인 반성의 많은 부분이 하이데거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는 “그 당시의 하이데거적인 철학의 분위기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긴박한 요구”2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존재 안에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주체와 존재 사이의 구분을 지우고 주체성을 존재에 의해서 생각하는 하이데거의 ‘중성주의 존재론’을 탈-중성화(déneutralisation)3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철학적인 노력과 반대로, 레비나스의 철학은, 마치 칸트에서 시간이 모든 존재자의 실존의 조건이 아니라 단지 인간 직관의 한 형식이듯이 그래서 존재가 마치 ‘시간 밖(hors du temps)’에 있는 것처럼, 시간을 존재의 본질로부터 떼어내어 주체의 주체성을 존재에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그 당시 레비나스에게 다가오는 전쟁의 불안과는 구분되는 그 시대의 영혼의 상태로서 “존재함의 피곤함(la fatique d'être)”4 또는 “무엇인가 유일한 것에 의해 닦달되고 있음”5에 대한 감정으로 표현된다. 이는 전쟁 전에 쓰여 진『탈출에 대하여』에서 “나의 자기에의 떼어낼 수 없이 얽혀 있음(l'enchaînement du moi à soi)”6에 대한 경험으로 그려진다. 이는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해 볼 것이 없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이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7라는 감정으로 드러난다. 이 ‘얽혀 있음(être rivé)’ 또는 ‘못 박혀 있음’ 으로서의 실존에 대한 이 감정, 다시 말해 ‘움쩍달싹할 수 없음’이라는 고통의 감정은 그 반대의 감정인 탈출의 욕구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존재로부터의 탈출의 욕구는 이 존재 아닌 다른 곳에 정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우리가 여기 있는 한, 우리 실존과 삶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8. 이 경우에 존재로부터 탈출하는 한 가지 방법만이 남는다. 그것은 “내가 자기라는 되돌릴 수 없이 얽혀있는 이 사태와 단절하는 것이다”9. 이것은 레비나스에게 ‘존재의 충족성(la suffisance de l'être)’10, 다시 말해, 존재하기 위해 자신 이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의 이 자기에의 참조(sa référence à soi-même, autarkeia)’11, 즉 존재자와 그의 존재의 단일성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나와 자기와의 균열로부터 주체는 비로소 자기 안에서의 평화를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탈출의 욕구(le besoin d'évasion)는 욕구라는 말이 지시하듯이 존재의 결핍을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탈출의 욕구는 존재의 본질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속성이 흘러나오는 이 존재의 내적 구조로부터 탈출과 분리의 욕구가 솟아나온다. 레비나스가 『탈출에 대해서』에서 기술하는 ‘구역질’의 현상에 대한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그칠 수 없는 ‘구역질’12의 현상은 존재의 현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불가능성으로부터 오는 존재의 현전에 대한 절망을 의미한다.13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 탈출의 욕구는 존재의 불충분성의 만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존재의 현전의 절망으로부터, 존재의 충만(le plénitude d'être)으로부터의 해방14을 의미한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제기한 ‘자기(soi)’의 문제는 레비나스의 눈으로 보면 잘못 된 방향으로 이끌어져 왔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서 보다 본질적인 것은 자기의 부족에 대한 대답으로서 ‘자기 자신이 되는 데(être soi-même)’ 있는 것이 아니라,15 그것은 반대로 ‘자기로부터 탈출하는 데(ne pas être soi-même)’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점과 궁극을 발견하는데, 우리가 보통 ‘자기 구원의 문제’라고 하는 이 자기에의 질문은 레비나스에서 궁극적으로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16의 문제로 연장된다.
그런데 이 존재할 권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가장 자연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권리에 대한 질문은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바로 이 존재할 권리를 문제 삼으면서 어떻게 인간의 존재하고자하는 이 가장 자연스러운 욕구 - conatus essendi - 가 ‘인간의 인간성’ 안에서 가장 문제시 되고 깨지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정상적인 질서로부터 레비나스가 “성인의 가치” 또는 “선의 가치”라고 부르는 것으로의 전향 또는 회귀는 “나의 죽음에 대한 걱정을 넘어서 열린 문 앞에서 ‘먼저 가시지요(Après vous)’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타자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정도까지 타자에게 모든 우선권을 주어야한다는 확신”17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 전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자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 이 ‘어떻게’는 우리가 위에서 말한 분리와 회귀의 운동에 다름 아닌데, 이 운동은 이미 언급한대로 근본적인 기획의 전향으로서, ‘존재론적인 기획(le plan ontologique)’으로부터 ‘윤리적인 기획(le plan éthique)’으로의 전향을 의미한다.18 그런데 이 전향은 레비나스에게 논리적인 질서와는 구분되는 시간적인 질서로 드러난다. 이것은 ‘사후의 질서(après coup)’로서의 발견의 논리를 가리킨다. 윤리적인 사건은 시간적인 발전의 질서로 보면 존재론적인 사건 이후에 오지만, 전자는 그 발생에서 아직 오지 않은 후자를 전재하고 출발한다. 결국 후자는 전자보다 더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자 이후에만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존재의 원인이 그 결과에 뒤이어 오는 것처럼 일어난다.19” 이 ‘마치(comme si)’의 가능성은 논리적인 질서에 따르면 환상으로 보이겠지만 이 환상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건을 산출한다. “앞선 것에 나중 옴(la postériorité de l'antérieur)”20이라는 이 논리적인 질서와는 구분되는 이 역설적인 시간의 질서는 “나중 또는 결과는 이전 또는 원인을 조건 지우며, 이전은 단지 이후에 의해 나타나고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레비나스에 의하면 “실재는 역사적인 객관성 안에서만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적인 시간의 연속성이 단절되는 비밀로부터, 즉 내적인 지향으로부터 결정되어져야 한다는”21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 자기의 존재할 권리를 문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인간성의 가장 깊은 곳에 비밀처럼 감춰져 있는 ‘타자를 위한 주체(l'un-pour-l'autre)’로서의 주체의 주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는 자신 안에 자기의 존재 이유를 가지지 않음”22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기 자신을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할 수 없음”23을 의미한다.
- Cahiers Confrontation n° 20, Après le sujet, qui vient? réalisé par Jean-Luc Nancy, Paris, Aubier, 1989, p. 7. [본문으로]
- De l'existence à l'existant (EE), Paris, Vrin, 1947, 1993, p. 19. [본문으로]
- 하이데거의 철학의 중성주의적인 기획은 『존재와 시간』 이전에 (1919) 후설의 지향성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나온다. 지향성이 자기 밖의 무엇인가로 향하는 의식(un se-tenant-en-vis-à-vis, un Entgegenste hendes)이라면, 이 때 하이데거는 주체와 대상과의 이 형이상학적인 지위를 중성화해서 지향성을 대상이 아닌 “어딘가로 향하는 순수한 운동(le-pur-hors-de-en-direction-de)”으로 바꿔놓는다. 이 순수하게 어딘가로 향함(le Worauf, le ver-quoi-de)은 존재와 시간에서 결국 ‘의미’의 지향으로서 현존재의 ‘관점’(le Woraufhin, le ce en vue de quoi)이 된다. 그리고 이 의미는 현존재의 시간적인 운동(la temporalité originelle)에 의해서 산출된다. 이 하이데거의 후설의 지향성에 대한 해석은 R. Bernet의 La vie du sujet, Paris, PUF, 1994, p. 39-64와 T. Kisiel의 \"l'indication formelle de la facticité\" in Heidegger 1919-1929 De l'herméneutique de la facticité à la métaphysique du Dasein, Paris Vrin, 1996, p. 204-217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 François Poirié, Emmanuel Lévinas Qui êtes-vous?, Lyon, La manifacture, 1987, p. 82. 이 “존재함의 피곤함”은 레비나스의 사유의 전개 과정에서 “존재하기 힘듬(le mal d'être)”으로 이어서 “존재의 악(le mal de l'être)”으로 발전한다. [본문으로]
- 같은 책, p. 89. [본문으로]
- De l'évasion (DE), biblio essais, p. 99. 이 책은 1982년 Jacques Rolland이 1935년 철학 잡지 Recherches Philosophiques에 실린 글에 서문과 주를 붙여서 Fata morgana에서 출간된 책이다. 여기에 인용된 면수는 이 책의 문고판에 근거한다. 레비나스가 여기서 사용하는 나(moi)와 자기(soi)와의 구분, 다시 말해 나와 나의 존재와의 구분은 하이데거의 존재자와 존재의 구분, 심리학의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처럼, 현상학적인 존재의 이해로부터 유래한다. 다시 말해 현상학에서 드러난 현상이 항상 드러나지 않은 것을 동반한다는 사실로부터 항상 주어진 것은 주어지지 않은 것과(la donnée/la non-donnée), 명시적인 것은 함축적인 것과 (l'explicit/l'implicit), 유한은 무한과 (le fini/l'infini),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과의(le visible/l'invisible)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본문으로]
- 같은 책, p. 116. [본문으로]
-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로』의 Avant-Propo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 너머에 선을 놓은 플라톤의 공식은 선으로 존재자를 이끄는 운동을 의미하는데 이는 한 존재자를 최상의 실존으로 올리는 초월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존재와 그 존재의 범주로부터의 탈출 또는 외출을 의미한다. 너머서 올라감. 그런데 이 너머서 올라감 그리고 행복은 반드시 존재에 발을 딛고 있다. 그래서 존재는 존재하지 않음보다 낫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 DE, p. 98. [본문으로]
- DE, p. 93. [본문으로]
- 이 존재의 자기 충족성은 『존재로부터 존재자로』에서 ‘고독(solitude)’이라고 불려진다. 이 존재의 자기와의 관계는 레비나스의 ‘빛’에 대한 분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빛은 플라톤 이래로, 그것이 감성의 태양이든 지성의 태양이든, 모든 존재하는 것을 조건 지운다. 이 빛은 다름 아닌 밖의 것이 그것 덕분에 안에서 이해되어지는 ‘형상’과 다르지 않다. “세계와 빛은 모두 고독하다. 주어진 대상, 형상의 옷을 입은 존재자들은 모두 나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빛에 의해서 밝혀진 것들은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 의미는 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EE, p. 144). [본문으로]
- 사르트르의 소설 『구역질』과 여기서 레비나스가 분석하는 ‘구역질’은 그 말의 쓰임에 있어서 서로 아무런 영향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소설 Nausée는 1931년에서 1936까지 쓰여 져서 1938년 Gallimard에서 출판되었으며 (더욱이 이 소설의 제목이 된 Nausée는 사르트르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 Gaston Gallimard에 의해 1937년 붙여진 제목이다. 사르트르가 부여한 이 소설의 본래 제목은 Dürer의 판화의 제목을 딴 ‘Melancholia’였다), 반면에 『탈출에 대해서』는 1935년 발표되었다. 여기서 ‘Nausée’를 ‘구토’라고 옮기지 않은 이유는 구역질(Nausée)은 구토(Vomissement)와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역질은 구토와 더불어 사라진다. 그런데 구역질을 제거할 수 있는 구토에 이르지 않고 끊임없이 구역질만이 남을 때, 이 상태는 비로소 철학적인 또는 문학적인 주제로 전향하기 때문이다. “구토와는 달리 구역질 자신의 현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능력에 있다”(DE, p. 119). [본문으로]
- DE, p. 116. “구역질에는 거기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런데 이 노력은 애초에 이미 절망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본문으로]
- DE, p. 120. “탈출의 욕구의 토대는 이제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존재의 충만이며, 이 욕구는 제한된 존재의 전적인 완성으로, 만족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부터의 해방 또는 탈출로 향한다.” [본문으로]
- 사르트르의 철학이 비극적인 존재론으로 막을 내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즉자와 대자의 일치로서의 자기성의 확립을 찾는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기획은 그 시초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 DQVI, p. 257. [본문으로]
- François Poirié, 위의 책, p. 93. [본문으로]
- “존재론적 기획에서 윤리적인 기획으로의 전향”은 레비나스가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앞글’에서 “존재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부른 것과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운동은 결국 레비나스에서 “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종속시키는 것인데, 이 종속의 관계 또는 질서의 전복은 사실 레비나스가 그의 전 철학을 통해 찾고자 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존재론의 기획이 성립되는 그 근원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이 기획이 어떻게 극복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다르기 않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의 단순한 구분으로서 존재 옆에 단순히 놓았던 존재자를 존재의 일반경제학 안에서 연역해 냄으로서 존재자의 존재론적의미를 밝히는 것”(EE, p. 141)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시도는 존재와 존재자의 ‘분리’ 없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그러하듯이, “존재자 안에서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파르메니데스 이후에 그를 넘어서고자 했던 모든 부친 살해의 시도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며, 존재자를 존재자와 그 존재의 사건의 떼어낼 수 없이 얽혀 있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존재 일반’으로부터 한 존재자의 출현 - 이것은 레비나스가 ‘자기정립(hypostase)’라고 부르는 것인데 - 을 설명하는 것은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의 원리, 즉 존재자가 존재와 ‘계약’ 맺는 그 존재론적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거기서 그 원리가 깨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결국 레비나스에서 존재로부터 선으로의 탈출이 그의 철학의 ‘끝’이라면 자기정립은 이 ‘끝’에 이르기 위한 ‘시작’의 사건일 것이다. [본문으로]
- TI, p. 47. [본문으로]
- 같은 책 같은 곳. 이러한 시간의 대한 사유는 레비나스의 공시적인 시간론(synchronie)에 반한 회복불가능한 통시적인 시간론(diachronie)과 흔적(trace)에 대한 그의 생각으로 드러낸다. [본문으로]
- TI, p. 51. [본문으로]
- Ethique et infini (EI), Paris, Fayard, 1982, biblio essais, p. 121. [본문으로]
- EE, p. 1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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