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레비나스 - 분리와 회귀로서의 현상학적 방법에 대하여*
들어가면서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철학하는 방법1을 배운 레비나스에게 현상학은 그것이 어떤 주장이나 이론의 체계가 아닌 한에서, 무엇보다도 그에게 그 철학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의 철학이 후설의 방법을 쓰여진 대로 다 따랐다고 할 수 없을지라도 그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가 현상학자2라면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를 여전히 현상학자라고 불러야 할까?
레비나스의 철학을 총괄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는가?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존재와 그 존재의 논리가 만드는 전체성의 철학에 반대해서 그 책의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무한의 이념에 근거한 “주체성의 변호”3(TI, 11)이며, 다른 하나는 현상학적인 초월성의 개념으로서의 ‘세계’ 또는 ‘객관성’과 구별되는 초월성4(TI, 41)의 개념의 확립이다. 주체의 주체성과 타자의 초월성을 동시에 보존하고자 하는 레비나스의 의도는 그의 철학의 초기에 이미 “어떻게 한 존재자가 타자에 의해 완전히 함몰됨이 없이 타자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5(TA, 65) 라는 질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체의 주체성과 타자의 초월성을 자신의 철학 안에 동시에 유지하고자 하는 레비나스의 의도는 그의 사유의 초기로부터 그의 마지막 저서까지를 요약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를 형성한다. 나는 이 글에서 레비나스가 그의 전 저작에 걸쳐서 ‘분리와 회귀라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이 두 목적을 실현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실제로 레비나스는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서 말하면서 명시적으로 이 두 방법6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초기부터 후기까지의 저서에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일단의 방법을 ‘분리와 회귀라는 현상학적 방법’7으로 요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이 글에서 우리는 분리와 회귀라는 이 ‘주체의 운동’을 주체의 한 시대에 한정된 특수한 모습이 아니라8, 주체가 자기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자기로 돌아가는 ‘주체의 주체화(la subjectivation du sujet)’ 또는 ‘주체의 자기 동일화(l'identification du sujet)’의 운동의 일반적인 원리로서9 주체는 이 운동을 통해 자신을 ‘동일자 안의 타자(l'autre dans le même)’ 혹은 ‘타자를 위한 주체 (l'un-pour-l"autre)’로 자신을 발견하며, 그 안에서 비로소 주체는 현상학의 '세계 개념'과 구분되는 초월성을 겪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이 주체의 주체성은 단번에(en un coup)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après coup) 자신을 발견한다. 레비나스가 후설로부터 배운 이 ‘발견의 질서’10는 그로 하여금 연역이나 귀납, 변증의 논리와 다른, 그리고 베르그손의 직관의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여는 것을 허락한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는 “어떤 것에 대한 한 시선은 동시에 이 어떤 것에 의해 가려진 시선”11이라는 사실로부터 한 이념에서 또 다른 이념으로, 그것의 최상급으로, 그것의 최대의 과장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레비나스에서 세계 안에 거주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안에서 늙어가는 인간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이 인간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것의 새로운 영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후설의 방법론을 다 준수하지 않았다고 할지라고 현상학을 실천하는 것”12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실, 진정한 사유 또는 사실 자체에 대한 사유는 후설에게 대상에서 그 대상의 지향으로, 그리고 이 지향에서 이 지향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지평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13. 레비나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대상에서 그것의 연출로, 다시 말해 대상에서 그것의 나타남이 함축하는 모든 현상들로 나아가야 한다.”14 이로부터 우리는 추상적인 대상 안에 감춰져 있는 지향성의 비밀스런 그리고 잊혀진 지향들과 새로운 양태의 구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비밀 또는 의식 안에서 잊혀진 것들에 대해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을 열면서 “진짜 삶은 부재한다”15라는 랭보의 시구로 대신한다. 바로 이 주체의 비밀 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가는 긴 여정’16은 주체의 주체화의 운동으로서의 분리와 회귀의 운동과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 이 글은 한 철학잡지 (철학과 현상학 연구 2008 겨울)에 실었던 글이다. 다만 매수 제한과 심사위원들의 몇몇 문장의 삭제 및 수정의 요구를 거치기 전의 원문임을 밝힌다.
- 리투아니에서 프랑스 북쪽 독일 국경 지역인 스트라스부르그의 대학에 1923년 입학 후 베르그손에 심취해 있던 그에게 현상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대학 동기였던 가브리엘 파이퍼(Gabrielle Peiffer)의 권유로 1927년 후설의 『논리연구』(1901)를 읽으면서였다. 그 다음해 1928-1929년 레비나스는 박사학위논문을 위해 프리부흐그에 머물면서 두 학기에 걸쳐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다음 해 스트라스부르그로 돌아와 『후설의 현상학에서 직관의 이론』을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한다. 이 논문에서 레비나스는 방법론으로서의 후설의 직관의 이론 속에서 어떻게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잉태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당시의 레비나스의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는 후설의 주지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미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 철학자로 그려진다. 레비나스가 한 대담에서 독일에 머문 2년을 회상하면서 “거기서 내가 배우고 발견한 것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후설의 철학이 하이데거에 의해 연장되고 변형되는 방식이었다. 여행자의 언어를 빌어서 말하면, 후설의 집에 갔다가 하이데거를 만났다고나 할까” (François Foirié, Emmanuel Lévinas Qui êtes-vous?, Lyon, La Manufacture, 1987, p. 74. 필자의 강조)라고 말하듯 그의 하이데거에 대한 그의 존경은 1933년 5월 27일 하이데거의 문과 대학 총장 취임 연설 - 『독일 대학의 자기 확립』과 더불어 막을 내린다. 1934년 쓰여 진 「히틀러이즘에 대한 몇몇 반성」으로부터 그의 마지막 저서까지 그의 철학의 목적은 “하이데거의 철학과 그 분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로부터 그의 후설에 대한 독서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이데거가 평가하고 비판하는 후설이 아니라, 후설 철학 그 자체 안에서 하이데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 레비나스는 여러 글에서 자신이 ‘현상학자’임을 그리고 자신의 글과 방법이 현상학에 근거해서 쓰여 졌음을 강조한다. 그것들 중의 몇몇 예를 보면 “비 지향적인 의식(la conscience non-intentionnelle)”(1983)이라는 논문에서 레비나스는 “나의 글들의 기원은 의심의 여지없이 후설에 근거하고 있다” (Entre nous (EN), (1991), Le livre de poche, biblio essais, p. 131)라고 쓰고 있으며, 독일어판 『전체성과 무한』에 붙인 ‘앞글’에서 “이 책은 현상학적인 영향과 영감에 의해 쓰여 진 책이다”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 Totalité et infini (TI), (1961), biblio essais, p. 11. “이 책은 주체성의 변호를 그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키에르케고르에서처럼) 총체성에 반한 자아의 순수한 자기 방어의 수준에 머무는 것도, (하이데거에서처럼) 죽음 앞에서의 주체의 불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기서 무한의 이념에 근거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본문으로]
- 같은 책, p. 41. “무한, 초월적인 것, 낯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대상을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 객관성과 초월성 간의 차이는 그래서 이 책에서 모든 분석을 이끄는 가장 일반적인 지침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 Le temps et l'autre (TA) (1947), Paris, Puf, 1983, p. 65. [본문으로]
- 레비나스의 방법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1975년 네덜란드 Leyde대학에 초청되어 가진 좌담회에서『전체성과 무한』의 독일어 판 출판에 붙여진 서문에서 드러나는 현상학적인 방법에 대한 Th. De Boer 교수의 질문에 대한 레비나스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다. (De Dieu qui vient à l'idée (DQVI), p. 138-143.) 여기서 레비나스는 한 이념에서 다른 이념으로 나아가는 방식에 대해, 세계에 단순히 거주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늙어가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현상학의 초월론적인 방법과는 다른 ‘과장의 방법(l'emphase)’이라고 부른다. 한 이념을 다른 이념에 의해 정당화하는 초월론적인 방법은 항상 그 이념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토대를 찾는다. 이와는 달리 한 이념에서 다른 이념으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이는 한 이념에서 그 이념의 최상급으로 그것의 최대의 과장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이념은 처음의 이념에 의해 정당화되지도 함축되지도 않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서 처음의 이념의 승화로서 나타난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레비나스는 “정립된 세계로서의 실제적인 세계의 존재 방식이 정립(la thèse)이라면, 자신을 진정으로 정립하는(se poser) 과장적인 방식은 자신을 내맡기는 것(s'exposer à)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분리와 회귀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분리에서 회귀로 나아가는 주체의 운동은 그가 과장의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과 겹쳐짐을 우리는 이 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분리(séparation)’라는 개념이 그의 저서에서 주제로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체성과 무한』에서이며, ‘회귀(récurrence)’라는 개념은 그의 후기 저서인 『존재와 다르게 존재의 사건을 넘어서』(Autrement qu'être au-delà de l'essence)에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분리와 회귀하는 이 두 주제는 따로 떨어진 두 사건이 아니며, 또한 한 시대에 한 저작에 국한되어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초기 저서인 『탈출에 대해서』(De l'évasion), 『존재로부터 존재자로』(De l'existence à l'existant) 에서 그 개념들이 비록 명시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그 주체들의 원시적인 모습들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분리와 회귀를 다룬 글들로, 필자의 정보의 한계 안에서, 두 명의 저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Joseph Libertson의 두 논문, “La séparation chez Lévinas” (Revue de Métaphysique de Moral, n° 4, 1981, p. 433-451), “La récurrence chez Lévinas” (Rvue philosophique de Louvain, n° 1, 1981, p. 212-251)가 있으며, Michel Vanni, “Le discours de la séparation chez Emmanuel Lévinas, ou autrement que la phénoménologie”, (Alter, n°6, 1998, p. 435-448)가 있다. 위의 글들은 분리와 회귀를 나눠서 비 상관적인 것으로 초기와 후기에 각각 다르게 한정된 사건으로 다룬다. 필자는 위의 주장과는 다르게 분리와 회귀는 떨어진 두 사건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의 사건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주체의 ‘자기 동일화의 운동’으로 보고자 한다. 자기 동일화의 운동은 자기로부터의 탈출과 자기로 돌아옴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운동은 레비나스의 사상의 전기와 후기에서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전재의 시간적인 질서에 따라서 다양한 양태로 드러난다. [본문으로]
- TA, p. 36. “한 개체의 동일성은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데에서만이 아니라, 자기로 돌아가는 운동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본문으로]
- Cf., \"La ruine de la reprsentation\" in En découvrant l'existence avec Husserl et Heidegger (EDE), Paris, Vrin, (1949, 1967), 1994, p. 130-131. “지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유를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함축된 것으로 통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사유는 더 이상 순수한 현재가 아니며, 순수한 표상을 벗어난다. (...) 대상으로 향하는 주체에게는 절대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이 필연적인 함축된 것에 대한 이념은 반성 안에서만 사후에 발견되며, 현재 안에서 산출되지 않고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이러한 사태는 표상의 이상과 주체의 지상권에 종말과 더불어 어떤 것도 자아 모르게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한 관념론의 종말을 선언한다.” [본문으로]
- F. Poirié, 위의 책, p. 73. [본문으로]
- \"Question et réponse\" (l'entretien, 1975), in De Dieu qui vient à l'idée (DQVI), Paris, Vrin, 1982, p. 139-140. [본문으로]
- “철학과 각성”에서 레비나스는 이 의식의 운동은 단순히 보여 진 것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한 기획에 속한 지평을 확장하거나 하는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세계관과 이 세계관 아래 놓여 있는 삶 간의 근본적인 이질성 - 변증법을 불가능하게 하는 차이 - 이 있다. 기획 자체를 변화시켜야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내적 경험에 외적인 경험을 덧붙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삶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다. 바로 이 자기의 본성에 반한(contre-nature) 이 운동 - 왜냐하면 세계에 반한(contre monde) 운동이기 때문에 -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의식의 운동(psychisme)과는 다른 의식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후설의 영원한 혁명으로서의 현상학적 환원이다. 이 환원은 바로 잊혀진 그리고 생기를 읽은 삶에 생명과 기운을 불어 넣어 그 삶을 깨워 일으키는 것이다”(\"La philosophie et l'éveil\" in Entre nous (EN), p. 92. 강조는 역자의 것임). [본문으로]
- 같은 책, p. 74. “비 지향적인 의식”(1983)이라는 글에서 레비나스는 “현상학의 철학에의 본직적인 기여는 생각되어진 것은 - 대상, 주제, 의미 -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를 요청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데에 있다”라고 말한다(\"La conscience non-intentionnelle\" in EN, p. 132). [본문으로]
- Totalité et infini (TI), Martinus Nijhoffe, 1961, 1994, biblio essais, p. 21. [본문으로]
- EDE, p. 14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이 여정은 후설에게 세계로 향한 시선에 의해서 잊혀진 주체적인 삶을 밝히는 초월론적인 환원에 다름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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