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어원학étymologies, 연대filiations, 계보학généalogies, 실천 pragmatiques. 우리는 여기서 필수적인, 그런데 지금까지 존중되지 않은 혹은 실천되지 않은 구분에 필요한 모든 분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종류의 구분들이 있다 (종교/신앙, 믿음; 종교/신에 대한 믿음piété; 종교/제의; 종교/신학; 종교/théiologie; 종교/존재-신학; 또 종교/신divin - 필멸의 혹은 불멸의; 종교적인 것/sacré-sauf-saint-indemne-immun - heilig, holy). 이것들 중에 우리는 믿음의 경험과 성성의 경험 사이의 구분에 우리가 부여하는 거의 초월론적인 특권을 시험에 놓을 것이다. 이것들은 구분된 두 기원 혹은 구분된 두 집(foyers)이다. "종교"는 그들의 타원(ellipse)을 그린다. 왜냐하면 종교는 두 집을 포함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때때로 비밀스런 그리고 생략의 réticente 방식으로 그들의 환원불가능한 이중성(l'irréductible dualité)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이다.[기하학에서 타원ellipse을 형성하는 두 점을 불어로 "foyers"라고 부른다. ellipse의 또 다른 의미는 수사학의 생략법을 지시하기도 한다.(역주)]
어쨌든, "종교"라는 말의 역사는, 원리상, 우리가 지시할 것, 동일화할 것 그리고 따로 떼어서 분리할 것에서 자기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기독교인들에게 "종교"라는 말을 명명하는 것을 금지해야 할 것이다. 왜 여기서 "비-기독교인"을 명시하는가? 다시 말해, 왜 종교라는 개념은 왜 기독교적인가? 어쨌든, 왜 이 질문은 제기될 가치가 있으며, 진지하게 다룰 가치가 있는가? 벵베니스트도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을 위한 인도-유럽어의 "공통된" 용어가 없다. 인도-유럽어는 벵베니스트가 "분리된 제도처럼" "이 편재하는 종교의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러한 "분리된 제도"가 알려지지 않는 곳 어디에서나 "종교"라는 말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언제나 어디서나(인간에 있어서 혹은 다른 곳에서) 어떤 것 quelque chose, 하나이며 동일한 것, 자기 자신에 동일한 것, 그것이 종교적이든 아니든, 모든 이들이 "종교"라고 명명하는 데 동의하는 그런 것은 있었던 적도, 있지도, 있을 것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듯, 대답을 해야한다. 라틴어의 뿌리 안에서, religio의 기원은 사실 끝나지 않는 논쟁의 주제였다. 두 읽기, 두 강의, 따라서 두 기원: 한편으로 시세론의 텍스트들에 의존하는 religere, 의미론적이고 형식적인 연계: 돌아가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모으다, 그로부터 religio, 삼가하는 주의, 존중, 인내, 즉 순수와 piété 신에 대한 믿음이 나오며, 다른 한편 (Lactance와 Tertuellien), religare, "기독교인들에 의해 발명된"(주.1) 어원이라고 벵베니스트가 말하는, 종교와 연대, 특히 인간들 사이의 혹은 인간과 신 사이의 의무, 빚, 등등과의 연계를 말한다. 여전히 여기서 또 다른 장소 안에, 또 다른 주제 위에 기원과 의미의 분리가 문제가 된다. 어원적인, 그런데 religio라는 말의 "종교적인" 두 기원에 대한 논쟁은 거의 수난적passionnant이다. (두 기원들 중의 하나가 기독교적이자마자, 이 논쟁은 수난 자체에서 유지된다.) [역주. 이 두 문장 사이에서 Passion와 passionnant이 조응한다.passion, 라틴어 passio로 이 말은 동사 patior,즉parti, passus sum으로, 고통을 겪다, 견디다, 순응하다의 의미로, 그리스어에 pathos와 가장 가까운 단어이다.) [...]
주.1) Le vocabulaire..., p. 265이하. [벵베니스트에 대한 긴 주가 걸려있다. 데리다는 벵베니스트의 "종교"라는 말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두 기원 중에 하나에 그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의를 반박한다.] 인도-유럽어는 "종교"에 대한 어떤 "공통의 용어"를 마련해두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어떤 하나의 지속적인 기원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이 말의 본성" 그 자체에 속한다. 이와 상관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제도적인 실재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또한 분리되어질 수 있는(독립된) 어떤 사회적 실체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더욱이 벵베니스트가 "이 말에 등가인" 두 용어, 그리스어와 라틴어만을 연구하자고 제안할 때, 우리는 두 개의 아주 문제적인, 역설적인, 다시 말해 논리적인 추문을 강조해야 한다.
1) "종교"라는 말의 보증할만한 의미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그는 "등가"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이 전-이해, 전제를 주제화하지도 문제삼지도 않는다. "그가 보기에도 아무 것도 기독교적인"의미가 여기서 논의의 인도의 끈을 제공할 것이라는 전제를 보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religare("lien, oblogation 연계, 의무")에 의한 종교에 대한 해석은 .... 순수히 역사적으로 잘못 발명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다른 한편 그리스어 threskeia ("culte et piété, observance des rites", et beaucoup plus tard "religion", 제의와 신심, 제의의 규칙, 그리고 나중에 종교라는 말로 정착한다) 를 말한 후, 벵베니스트는 이 말과 짝이되는 - religio 라는 단어를 불러낼 때, 그것은 "religion"과 "등가(équivalent)"(이 말은 identique일 수 없을 것이다)의 이름으로서 그렇게 한다. 우리는 한 쪽을 사이에 두고 그가 사용하는 "등가"라는 말의 이중적인, 그리고 아연실색할 사용에 의해 아주 역설적인 상황에 앞에 놓인다.
a) "우리는 두 용어(threskeia, religio), 하나는 그리스어고 다른 하나는 라틴어인 이 두 말만을 유지할 것이다. (266) 이 두 단어는 이것들 중의 하나와 등가로 생각될 수 있다. 그 하나는 그 다음 쪽에서 세계에서,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서양의 언어에서", "모든 면에서 무한히 아주 중요하다(infiniment plus important à tous égard)"는 의미에서 어떤 등가물도(역자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b)"이제 두 번째 용어, 무한히 아주 중요한 용어로 돌아가자: 그것은 라틴어 religio이다. 이 단어는 서양의 언어들에서, 유일하고 지속적인 단어로 이것에 대한 어떤 등가나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그런 것으로 머문다."(267) 여기서 벵베니스트가 말하는 이 단어는 시세로에 의해 입증된 "고유한 의미"로 그것은 "고유하고 지속적인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등가인 것으로(다른 것들 가운데에서 어떤 등가를 발견할 수 없는 등가)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는 사실 종교에 대한 그렇게 나쁘지 않은 정의가 아닌가? 어쨌든 이러한 논리적 혹은 형식적 부조리(inconséquence)는 결국 "인류의 역사"에서 일어난 것, 즉 우리가 "종교"의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충실한 반성, 가장 대표적인 증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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