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우리 사이에" 서로 동의하는 것으로, 우리가 여기에 "관용"을 위해 모여 있다고 가정하자, 비록 우리가 그것을 전진시키기 위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그것을 근거짓기 위한 대단한 의무를 가지고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 "관용"이, 그로부터 그러할 수 있는 것(그것의 그것임과 그것일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기 위해 모여 있다. 나는 이 단어에 그것의 기원들로부터 추상, 분리하기 위해 따옴표를 쳤다. 그리고 그것을 거쳐서, 그것의 역사의 두께를 거쳐서, 다만 기독교적인 것이 아닌 그것의 가능성을 알리기 위해서. 관용이라는 개념은그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으로 길들여진 것이다. 그것은 그 말의 그 본래의 의미에서 보면 litérallement, 나는 이 이름 아래에서 말하고자 하는 데, 기독교적 비밀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기도교적인 신앙 아래에 각인되고, 나오고 유통된 것이었다. 그 말은 또한 조상, 또한 기독교인인 칸트가 "반성적인 신앙"이라고 부른 것과의 - 또한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순수한 도덕성 그 자체와의 - 연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관용의 교훈은, 비록 그가 자주 듣는 것(이해하는 것 l'entendre) 그 자체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기독교인만이 세계에 줄 수 있다고 생각된 타에 모범이 되는 exemplaire인 교훈이었다. 이런 점에서, 계몽은 기독교적인 것의 정수, 본질이다. 그가 관용을 다룰 때, 볼테르의 철학사전은 기독교적인 종교에서 이중적인 특권을 가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관용의 모범이며, 확실히, 그것은 다른 모든 종교보다, 모든 종교에 앞서서 더 잘 그것을 교육한다. 약간 칸트와 유사한 방식으로, 요약하면, 볼테르는 기독주의는 유일한 도덕적인 종교라고 생각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관용은 본보기를 제공해야 하고 줄 주 있는 기독교의 제 일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ingénuité에 대한, 때때로 볼테르의 이름을 내건 자들의 단순함이 있게된다. 그리고 그의 깃발 아래에서 비판적인 현대성을, 그리고 더 심각하게는 현대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다른 한편(칸트가 볼테르를 인용하는 또 다른 특권적인 이유), 볼테르의 교훈은 우선 기독인들에게,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관용적이지 않은 인간들" 1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볼테르가 기독교와 교회를 비난했을 때, 그는 본래적인 의미의 기독주의의 교훈, "최초의 기독교인들의 시대"를 상기시킨다. 예수와 열두 제자는 "열두제자로부터 그리고 로마에서 발생한 기독교"에 의해 배반된다. 이 로마의 교회는 "그것의 제례에서 그리고 그것의 도그마에서 예수의 종교와 대립"2된다.
또 다른 "관용"은 "사막 안의 사막"의 경험에 일치할 것이다. 그것은 단독성으로서 무한한 타자성의 거리를 존중할 것이다. 그리고 이 존중은 거리, 분리dissociation, 이접 disjonction으로서, 모든 종교반복의 장소로서의 문턱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의 문턱으로서 혹은 공동체적인 관계의 문턱에서 삼가함으로서 다시 한번 religio가 될 것이다3.
시초에 있었던 로고스 이전과 이후, 성체(saint-sacrement) 이전과 이후에, 성경 이전과 이후에.
원주1) "관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그것은 인류에게 가장 우선하는 것"이라고, 가장 탁월한 예라고, 여기서 "인류"의 가장 고양된 영감은 기독교적인 것으로 남는다라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는, 비록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인간들 중에서 가장 관용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여지 없이, 더 많은 관용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종교이다."(철학사전, <관용>부분에서)
"관용"이라는 말은 하나의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볼테르는 우선 한 이야기, 기독교 내에서의 경험을 전해준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여기서 옮겨 놓는다. 기독교인들("가장 관용적이지 않은 인간들")은, 같은 종교를 가진자에 의해, 같은 종교를 가진 자의 본질적인 양태에서, 예수의 말에서, 그 기원에서 진정한 기독주의에서 불려진다. 만일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들의 적나라한 반기독주의에 의해, 그들의 로마교에 대한 반대에 의해서,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선언한 선호, 초기 기독주의에 의해서 볼테르와 하이데거는 같은 전통, 최초의 기독주의(카토릭) protocatholique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26으로, Italiques 이태리체가 끝난다. 이어서 Post-scriptum 추신이 덧붙여진다. 이 추신은 여러 종류의 여러 장소로 불릴 수 있는, Cryptes...로부터 전해져 온다. crypte는 지하무덤이라는 뜻이지만, 이 말은 또한 초기 교회가 예배를 보던 장소이기도 하다. 오래된 성당에는 모두 지하무덤이 있다. 주로 그 교회의 신부들을, 성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또한 이 말은 드러난 것의 지하를 의미하기도 한다. 종교의 지하무덤, 종교의 말해지지 않고 묻혀있는 지하의 무덤으로부터 오는 말들이다. 무덤은 유령을 비밀을 불러온다. 무덤, 유령, 비밀은 모두 데리다의 용어로 "결정할 수 없는 것, indécidabilité", 안과 밖의, 삶과 죽음 사이의 결정할 수 없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애도 deuil>에 대한 질문과 얽힌다. 이 질문은 살아남은 자에 대한, 다시 되돌아오는 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주제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그의 초기의저서 Glas가 <조종>이었다는 것을, 그의 프로이트 읽기가 이 <애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추신은 글 아래 덧붙이는 말로 이 말은 앞서 말한 것을 보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것을 다시 말하는,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의 틀과 같은 역할을 한다. 본질 밖에 놓인 것이지만 본질을 본질이게 하는 것이다.
- 원주) 주가 길어서 아래 본문 아래 적는다. [본문으로]
- 원주) 같은 곳, [본문으로]
- 원주) 내가 다른 곳에서, <맑스의 유령들>, 49쪽 이하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나는 정의의 조건을 일종의 연결의 자름(déliaison)으로부터, 항상 구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 항상 구해야 할 것으로부터 생각할 것을 제안했다. 이 분리의 비밀의 조건을 생각할 것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모음(Versammulung) 이 아닌 것으로, Diké 정의에서 Jus의 권위를, 즉 윤리-법적인 표상들로부터 떼어내는 그런 정의의 조건을 생각할 것을 제안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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