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과 지식

데리다, 믿음과 지식(22)

aurorepark 2010. 8. 28. 14:01

22. 정의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욕망은 바로 이런 기다림과 연결된다. 정의상, 이런 기다림은 어떤 지식, 어떤 의식, 어떤 예시,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서도 보증되지도 보증될 수도 없다. 이 추상적인 메시아성은 우선 신앙, 믿음 혹은 지식으로 환원불가능한 신용, 증언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근거짓는 믿을 만함 fiabilité에 대한 경험에 속한다.  내가 법 le droit과 구분하는 이 정의만이 메시아니즘 (구세주주의)을 넘어서, 단독자들의 보편적인 문화, 불가능한 번역의 추상적인 가능성이, 그럼에도, 알려져 오는 문화를 희망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 정의는 우선 약속, 신앙의 행위 혹은 타자에게 건네지는 모든 언어행위에 존재하는 신앙에의 호소에 우선 기입된다.  이러한 신앙의 보편화가능한 문화만이"  다른 것이 아닌 이것만이 "이성적인" 언술을 가능하게 하며, "종교"가 주제가 되는 경우 그것이 보편적인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벌거벗겨진 메시아성(구세주성), 도그마 없는 신앙는 절대적인 밤의 위험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예를 들어, 이성과 신비의 대립과 같은 전통적인 어떤 대립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접힘이 없이 접히는 것으로 réfléchissant sans fléchir, 순수하게 이성적인 분석이 이 역설을 드러내는 어디에서나 알려진다. 즉, 법의 토대 - 법의 법 - 제도의 제도, 구성의 기원 - 은, 그것이 근저짓고, 시작하고 혹은 정당화하는 전체에 속할 수 없는 "수행적인"사건이다. 그와 같은 사건은 그 사건이 열어보이는 것의 논리 안에서는 정당화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결정할 수 없는 것 안의 타자의 결정이다. 그 때에, 그로부터, 이성은 여기서 몽떼뉴와 파스칼이 반박할 수 없는 "권위의 신비적인 토대"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된 신비적인 것 mystique은 믿음 혹은 신용 le crédit, 신용 le fiduciaire 혹은 믿을 만함 le fiable, 비밀 ("신비적인 것"이 의미하는 것)을 토대와, 지식과, 그리고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행위 faire"로서, 이론, 실천, 그리고 이론적 실천으로서 과학과, 다시 말하면, 신앙과, 수행성과 그리고 기술 과학적인 혹은 텔레-기술과학적인 수행과  결합한다. 토대가 자신을 허물면서 자신을 세우는 거기에서, 토대가 그가 세운 것의 토대 아래로 사라지는 거기에서, 사막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토대가 자신의 비밀의 기억을, 그 흔적 조차도 잃어버리는 그 순간에, 종교는 시작되고 다시 시작된다: 거의 자동적으로, 메카니즘적으로, 기계적으로, 자발적으로 spontanément. 자발적으로, 다시 말해 마치 그 단어가 지시하듯이, 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의 기원을 지시하면서, sponte sue 동시에 기계적인 것의 자동성 둘다를 지시한다.  최선의 것을 위해 그리고 최악의 것을 위해, 인류학적-신학적 지평의 여하한 보증도 없이. 이 사막 안의 사막 없이는 어떤 신앙의 행위도, 어떤 약속도, 어떤 미래도, 어떤 죽음과 타자의 기다림 없는 기다림도, 타자의 단독성과의 관계도 없다. 이 사막 안의 사막의 기회 (그리스-유대-기독교적 전통 이래로 신앙의 길을 열었던 부정의 길과 실수할 정도로 닮은 그런데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제공하는 기회). 왜냐하면 지탱하는 전통의 뿌리를 뽑는 것에서, 반신학화에서, 이 추상은, 신앙을 부정함이 없이, 보편적인 이성성과 이것과 분리될 수 없는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해방하기 때문이다.



'- 믿음과 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리다, 믿음과 지식(24)  (0) 2010.08.29
데리다, 믿음과 지식(23)  (0) 2010.08.29
데리다, 믿음과 지식(21)  (0) 2010.08.27
데리다, 믿음과 지식(20)  (0) 2010.08.27
데리다, 믿음과 지식(19)  (0) 2010.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