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위에 하양

지향성과 초월성 - 후설과 하이데거(2)

aurorepark 2010. 2. 25. 18:52

지향적 의식의 존재


논리연구에서 이념으로 그 독서를 옮겨가면서 하이데거가 다시 후설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지향성의 존재"와 "지향적인 주체의 존재"의 관계의 문제이다. 25년 강의에서 하이데거가 우선 피하고자 하는 것은 지향성의 주체화(subjectivation)의 경향이다. .하이데거는 모든 주체의 주체성의 규정은 지향적인 관계에 대한 현상학적인 분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주체에 대한 이념으로부터 지향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는 지향성으로부터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지향적인 관계는 전적으로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 안에서 발견되는 그 주체의 토대로부터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지향성의 현상학적 탐구는 다자인의 초월성의 발견에 이르며, 이것은 이어서 지향성의 존재론적 토대를 계시한다.(52-53)


이 절차를 다시 요약하면 지향적인 주체의 존재의 질문은 그 주체의 초월성, 즉 세계의 개념에 이르며, 이 세계의 개념은 세계 그 자체, 다시 말해 그 선험성의 로고스에 대한 질문을 통해 결국 존재의 개념을 계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거칠게 요약한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존재론이다. 이 절차를 거치는 동안 주체의 주체성은 그 의미를 전적으로 변경한다. 주체는 더 이상 대자적 의식으로서의 인간 주체가 아니며, 그 주체성은 더 이상 후설적인 의미의 주체성이기를 그친다. 지향성이 더 이상 의식 주체의 지향성이기를 그치고 존재의 역사성으로 이해될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주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사건을 말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의 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그 변형은 현상학의 지각의 전적인 변동을 가져온다. 우리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두 개의 현상학적 전통이 있다고 한것은 바로 이 전적인 지각의 변동을 예고했던 것이다. 계속 읽어보자.


<논리연구>에 이어서 후설의 <이념 I>을 읽으면서 하이데거가 제기하는 문제는 이미 전제된 <주체>의 이념이 지향적 관계의 '존재'와  지향적 주체의 '존재', 혹은 후설식으로 지향적 의식의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현상학의 토대로서의 존재론의 형성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후설의 초월론적이고 본질적인 환원이 그를 지향성의 객관화를 피하고 반대로 지향성의 주관화로 향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정확히 이 방향의 반대로 나아간다.


하이데거가 전혀 좋아하지 않었던 후설의 <이념>은 우선 순수한 의식의 절대적인 학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후설이 고심한 문제는 우선 의식의 소여의 가능성, 현상학의 제 일의 문제는 주어짐, 소여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소여가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단지 의식의 소여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현상학은 고유한 자신의 독립적인 탐구의 장을 확보한다. 순수한 의식이 그 자체로 하나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과 독립적인 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후설의 고심은 그가 의식의 순수한 영역을 자연 혹은 세계와 더 나아가 인간의 물리-심리적인 구조 혹은 본성과 분리하고자 하는 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한다. 만일 우리가 의식과 신체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를 위해 순수하고 독립적인 의식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현상학자에게, 의식은 인간의 경험적 실존과는 다르게 그것보다 더 잘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을 함축한다. 가장 원본적이고 가장 순수한 이러한 의식의 소여는 후설에게 의식의 반성적 소여이다. 후설에게 반성의 지위는 상당히 중요하다. 레비나스가 후설의 환원을 다루면서 말하듯, 그의 반성은 비판의 지위를 가진다. 잠든, 독단적인 의식을 깨우는 이 반성적 의식은 경험적인 타자성 안에서 소외된 의식의 존재를 깨운다. 다시 말해 반성은 직접적이고 의심되지 않는 명증성 안에 빠져 있는 의식의 존재를 깨어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반성의 지위는 후설에서 환원의 지위와 같다. 


반성은 우선 지향적 행위이다. 이 안에서 순수 의식은 지향성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지향적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향성의 이중적 성격은 의식 내의 주체의 이중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인 삶, 나이면서 내가 아닌 삶, 나와 자기의 분리,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은 자기 안의 초월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반성적인 의식은 외적 세계의 지각에 대해 자기보다 덜한 명증성을 가진다. 의식의 저 밖의 초월적 대상들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주체의 내면성으로부터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지향성의 존재를 질문하기 위해서도 우선 주체의 내면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명해야 한다. 하이데거에게 이러한 후설의 지향성은 지향성의 주체화일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에 현상학을 다시 떨어트리는 것으로 보인다.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자신이 데카르트주의자라고 공언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지향적인 의식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보다 의식을 지속하는 실체적인 대상의 수준으로 떨어트렸다고 비판한다. (54-55)


<이념 I>에서, 지향성의 주체화는 순수한 의식이 구성하는 힘을 가질 때, 이 의식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한다. 의식에 의한 대상들의 초월론적인 구성의 이념은 관념론의 틀 안에서 행해진 지향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온다. 초월론적인 관념론은 자신의 토대를 의식과 그것에 대해 현재하는 존재와의 가능한 관계 안에 놓인다. 다시 말해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의식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안에 놓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러한 후설의 관념론은 1)우선 모든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를 현재하는 의식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환원하며, 2)이어서 모든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를 내재적 대상과 초월적 대상이라는 구분을 통해 해석하며, 3) 초월적인 대상의 존재의 의미는 내재적인 존재의 의미에 의존해서, 다시 말해 구성하는 의식에서 말해지며, 반면에 내재적인 대상의 존재의 의미는 다른 내재적 대상에 의존해서 말해진다. 4)모든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는 그 존재자의 실재와 그 존재자의 현실태(actualitas)와 동일시된다. 이로부터 초월적인 대상의 현실태는 내재적인 대상의 현실태에 의존하며, 반면에 이 내적 대상은 존재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nulla "re" indiget ad exitendum)(<이념 I> § 49) 이로부터 초월적인 대상들의 상대적이고 가정적인 실존과 "세계의 무화(annihilation du monde 이념, § 49)"에도 불구하고 어려움 없이 살아남은 초월론적인 의식의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실존이 있게된다. (55-56)


이러한 하이데거의 후설 읽기는 다음의 3개의 내기가 걸려있다 1) 하이데거는 우선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는 현재하는 의식에 의해 파악된 자신의 가능성(le pouvoir)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판한다. 이러한 사유는 존재론적 차이와 이 존재가 시간성 안에 근거한다는 것에 대한 무지일 뿐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무지는 근본적으로 지향적 행위들의 지향적 대상 intentum의 존재론적인 선험성과 관계한다. 2) 하이데거는 지향성이 주체의 내재성의 영역 안에 거주허는 정신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반박한다. 지향성의 주체는 절대로 자기 안에 갇힌 존재의 영역이 아니라, 한 존재자의 존재에의 열림이며, 초월성이다. 결국 하이데거가 보기에 후설은 지향, 특히 지향적 주체의 존재의 의미를 몰랐다고 주장한다. 3) 하이데거는 이 지향적 주체의 존재는 인간의 실존의 사실성으로 등을 돌림으로써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비판한다. 하이데거에게 그 반대가 그에게는 진실이다. 지향적인 존재의 현상학적인 접근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구체적인 세계와 사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56)


위의 하이데거의 주장들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위의 내용들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다자인의 실존적 분석(l'analytique existentiale)과 근본적인 존재론에 대한 주장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후설의 현상학은 하나의 감춰진 존재론, 즉 데카르트적 존재론을 가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현상학적인 환원은 분리의 활동으로 인간과 그의 의식, 내적인 의도와 초월적인 대상, 구성하는 존재자와 구성된 존재자, 절대적인 의식과 세계를 분리한다. 그에게 환원은 사실의 지향적 행위를 합법적인 분석으로 이끄는 것을 허락한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환원은 intentio와 intentium을 분리하기 보다는 그 둘의 공속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지향적인 행위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실행으로부터 지향성의 선험성을 질문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세계의 전-이해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대상의 지향적인 발견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에서 존재에 대한 이해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전 이해를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의 전-이해는 우리에게 실존론적인(existentielle) 열림과 초월성으로서의 지향적인 것의 존재를 알려온다. (58-59) 이 초월성과 그것의 지평은 우리에게 시간의 탈존적 지평의 본성을 알려준다.


지향성과 초월성 


세계-내-존재의 지향성은 사물의 존재와 자기의 존재(ipséité)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 세계-내-존재의 지향성은 이제 "초월성"이라고 불린다. 다른 곳에서 하이데거는, 칸트가 <실천 이성 비판>에서 "법은 자유의 인식이성이며, 후자는 전자의 본질이성이"라고 하듯이, "지향성은 초월성의 인식이성이며, 초월성은 그것의 다양한 양태들 안에서 지향성의 본질이성이"(GA 24, 1927)라고 부른다. 결국 지향성과 초월성의 관계는 하이데게가 나중에 "존재론적 차이"라고 부르는 것의 관계를 지시한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 차이는 지향성과 초월성의 차이에서 알려지며, 이 차이는 두 철학자에게 주체와 진리와 시간에 대한 각각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 그들의 차이는 주체의 주체성과 주체의 사실성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후설에게 주체가 하나의 단일체로 초시간적인 본질로 다만 지향적인 삶 안에서 이차적으로만 시간적이라면, 하이데거에게 주체는 처음부터 파열된 주체로 다자인의 세계-내-존재는 남김 없는 지향성으로 초월성을 의미한다. 진리의 문제에서도 두 철학자가 동시에 지향적인 관계를 통해 주-객의 이원성을 벗어났다면, 다른 한편 후설에게 진리는 명증성의 일이며, 지향적 행위들 사시의 직관적 채움의 일이다. 반면 하이데거에게 진리는 해석학적인 개념으로, 정당화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탈은패를 밝히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후설의 경우 사물의 시간성이 아닌, 하이데거가 내적 시간성이라는 것에 전념한다. 그렇다고 그의 시간론이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63-64) 후설의 시간성의 논의는 비객관적인 지향성, 존재화 이전의 흐름으로서의 시간 등등 아직 밝힐 것들이 무수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의식의 내적 시간이기를 그치고 존재의 역사성, 시대성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을 근거로 사르트르의 초월성으로서의 지향성을 생각해 보면, 그는 우선 세계-내-존재로의 파열로서의 초월성으로 하이데거의 초월성과 유사하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의식의 초월성은 하나의 의존적인 절대로 이 세계의 부정으로 그 세계와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분리이기도 하다. 무로서의 투명한 의식으로서의 사르트르의 의식은 후설의 절대적인 의식을 닮았으나, 그것은 전적으로 세계에 의존적인 존재이며, 반면 그것은 저 밖으로의 파열이면서, 항상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의식으로 세계-내-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지향성은 모든 현상학자들이 후설에 반해서든 동의하면서든 현상학 논쟁의 중심에 놓여있다. 하이데거의 비판에서 보듯이 그 비판이 항상 정직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비판은 자주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후설에 대한 비판을 보면, 한편으로는 그의 자아론적 관념론적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다른 한편 주지적 객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전자는 우리가 위에서 읽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비판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후자의 경우 레비나스, 특히 앙리의 비판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러한 경향에서 전자의 극단주의자는 사르트르가 그 한 예일 것이다. 반면에 후자의 한 극단은 앙리일 것이다. 사르트르와 앙리의 후설 비판은 어떤 내용도 그 자신 안에 가지지 않은 순수한 지향성으로서의 의식의 개념화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모든 종류의 지향성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낸 의식의 순수한 박동에 의존하든지 간에 이 두 철학은 모두 데카르트적인 주체의 개념화 아래에 자리하는 주체성에 대한 동일한 열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다른 전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을 둘 모두 후설에서 끌어온다. 그에게는 이 두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풍요로움은 그것이 하나의 주장이 아닌 방법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후설이 제시한 그 방법론은 그 자체 고정되어서 적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현상학의 역사 안에서 다시 해석해서 다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관계를 단절로 아니면 심화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렇게 쉽게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단절의 입장에서 두 철학자의 특히 하이데거의 비판에 그 촛점을 맞춰서 읽었다. 또 다른 읽기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텍스트의 열려있음은 재난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행운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