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에서 이미지의 현상학, 주체의 방식(4)
<4> 이미지는 과학적 인식, 진리로서 개념화를 낳지도, 객관성을 ‘가능성pouvoir’으로 전환하는 하이데거의 “laisser être/Sein-lassen”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이미지는 우리의 창발성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지배, 근본적인 수동성을 표시한다.각주1)
이미지의 근본적인 수동성은 우리가 영감에 사로잡힌 예술가는 뮤즈의 소리를 듣는다고 하듯이 “음악적”이다. 레비나스가 음악성이라고 부르는 이미지의 수동성은 다만 음악에서만 아니라, 시에서, 모든 종류의 예술에서 드러나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으로 음악이 가진 리듬의 주술적인 역할에서 설명된다. “리듬의 수동성이 우리에게 강요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책임짐이 없이sans que nous assumions”(IH, 128) 그렇게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은 레비나스가 레비 뷔랄각주2)에 대해서 말하면서 원시사회의 참여의 개념을 반성할 때 말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리듬 안에서 “주체는 그 안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실려 가기 때문에” 그 안에는 “주체에도 불구하고malgré lui”조차 없다. 왜냐하면 “리듬 안에는 더 이상 ‘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에서 익명성으로 이행”으로 여기에는 시, 음악의 주술, 시의 매혹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사라잡는entraînant 리듬/이미지의 의미에서, 예술의 무관심성이 아니라 ‘관심’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듯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와는 구분되는 그 말의 어원적 의미ㅡinter-esse(parmi les chose)ㅡ에서 말이다. 리듬 안에 주체는 그래서 “사물들처럼 사물들 사이에서, 스펙타클의 참여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밖에 스펙타클에 존재한다. 그런데 신체의 ‘밖’이 아닌 한 외재성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배우의 자아moi-acteur’의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관객의 자아moi-spectateur’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공감조차도 없는 이 외재성은 말하자면 내밀성의 외재성extériorité de l'intime이다.” 예술의 이미지가 불러내는 이 마법은 리듬이 가진 역설로 “꿈의 상상적인 세계의 정념”(129)의 역설이다. 이 역설은 의식과 무의식 밖에 놓인, 의식도 무의식도 아닌, 다시 말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놓인 것으로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모든 탈자적 제의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미지가 가진 이 근본적인 구조에서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이러한 구조가 다만 감각에서 행위로 이어지는 “idéo-moteurs"(129)의 한 메타포로만 사용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이미지로부터 다른 것을, 결국 레비나스 철학을 형성하는 어떤 것을, 이미지의 존재론을 ‘넘어서’, 더 정확히 이미지와 다르게autrement qu'image 레비나스 철학을 형성하는 한 영역을 끌어내고자 한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말하듯 ”가능성을 참여로 전복“(129)하면서만 가능하다.
리듬이 수행하는 또 다른 기능은 “실재의 탈개념화”이다(긍정적 가치). 소리는 대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것으로 우리를 어떤 것으로도 개념으로도 이끌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미지의 음악성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를 순수한 감각으로, 아직 지각되지 않은, 파악할 수 없는, 경험 심리학자들이 순수하게 “가설적”으로만 주어지는 소여라고 말한 “형용사적인 순수감각”(130)으로 이끈다. 레비나스에게 감각은 더 이상 “지각의 잔여”(메를로-퐁티, 22)가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가진다. 그것은 우리가 앞서 말한 리듬의 우리에 대한 전적인 지배emprise이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내-존재”가 개념적 실존existence avec concept(소리, 마세텍스)이라면 감각은, 이와 구분되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상상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것이다. 앞서 말하는 것처럼 예술이란 대상을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더 나아가 예술은 존재를 이미지로, 미적인 것의 요소인ㅡ그 말의 어원적인 의미에서ㅡ‘감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질 현상학’의 한 시초가 마련된다. 그것이 표상에 근거한 고전 예술이건 표상과 결별한다고 주장하는 현대예술이든 이미지가 가지는 이러한 기능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그래서 “표상된 모든 대상은 그것이 이미지가 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비-대상이 된다”(131)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미지에 의한 실재의 이러한 “탈-육화désincarnation는” 레비나스에게 이미지의 존재론적 지위를 ‘격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리듬과 교류하는commerce”(131) 이미지 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론적 영역을 제시한다.
각주1) IH, 127. (IH, Les Imprévus de l'histoire, 역사의 예측할 수 없음에 대하여)
각주2) "Léviy-Bruhl et la philosophie contemporaine" in Entre nous (4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