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데카르트, 1645년 9월 15일 엘리자베트에게 보낸 편지
aurorepark
2013. 5. 12. 23:49
"신의 선의와 우리의 영혼과 우주의 거대함을 인정한 후에도, 여전히 한가지, 나에게 아주 유용해 보이는 한 진리가 남아있다. 그것은 우리들 각자는 다른이들과 분리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각각의 관심은 세계의 다른이들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각은 우주의 부분이며, 특히 우리가 거기에 머뭄에 의해서, 혹은 맹세에 의해 혹은 출생에 의해 우리가 통합되는 이 지구, 한 국가, 한 사회, 한 가족의 부분이다. 그리고 자기의 이익보다 자신이 속한 모두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물론 매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모, 자신의 나라의 작은 선을 끌어내기 위해 큰 악에 노출되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홀로, 그가 속한 도시의 모두보다 더 가치가 있다면, 도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잃어버릴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다."
- 위의 글은 데카르트가 1645년 9월 15일 엘리자베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위에서 데카르트에서 도덕은 '선호'로, "...보다 ...하는 것이 낫다"는 형식으로 말해진다(필경사 바틀비의 "...하지 않는 것을 더 낫겠다"는 진술은 이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어디서 오는가?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알듯이 노발리스가 말한 두 방식의 수동성-supérieur et inférieur passivité 상승.최상과 하강.최하의 강조법으로서 두 방식의 수동성). 그런데 거기에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가 "avec mesure et discrétion"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행위에 따르는 나의 판단의 중요성, 나의 행위에 항상 나를 동반해야 하는 나의 판단을 조용히 알려준다. 위의 글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의 머리를 내려친다. "un homme vaut plus, lui seul, que tout le reste de sa ville, il n'aurait pas raison de se vouloir perdre pour la sauver." 데카르트의 도덕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관대함générosité은 '자기존중'으로부터 나온다. 자기 존중에 없는 관대함은 주축돌이 없는 집과 같다. 레비나스ㅡ카데지안ㅡ의 "자기에도 불구하고"가 울려 나오는 곳도 여기이다. 세계와도, 어떤 대의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존중이 이 마지막 문장에서 말해진다. 1645, 데카르트의 이 진술은 중세의 질서가 다시 무덤에서 일러나는 것을 저지하는 최전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