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신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과 그들 안에서 신을 사랑하는 것

aurorepark 2012. 6. 12. 05:13

『육화23절의 한 문장이다(175-176). 초대 교회의 터툴리안의 기도의 방식이 마음에 와서 여기에 적는다. 그들은(그리스적 사유에 반대하던 초대 교회의 사람들) "신 안에서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신을 사랑하게 해달하고신만을 사랑하게 해달하고 기도한다."(Ils prièrent alors avec Tertullien, demandant à Dieu non plus de s'aimer eux-mêmes en lui mais de l'aimer lui en eux-et lui uniquement.)


'신 안에서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과 '그들 안에서 신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안에 그가 말하는 '육화'의 비밀이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요한은 신을 삶으로서 이해한다. 구약성서는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에 대해 그 신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신이라고 말했다. 이 삶은 스스로 자기에 도래하는 절대적인 삶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신만이, 그 자신이 그 자체로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그 사실을 인정한 것처럼 말이다. 이 본성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최초의-수동성Archi-passibilité을 최초의 살의 최초의-정념 안에서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선험적인 가능성이라고 부르자. 이 때 우리는 아주 명백하게 이 최초의-수동성이, 삶의 본성으로서, 자기 자신에 본래적인 삶의 도래가 완수되는 현상학적인 물질로서, 절대적인 삶에 속한다는 것을 본다. 이것은 신이 자신에 앞선 어떤 규정에, 예를 들어 신도 피할 수 없는 어떤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이 삶이고, 신이 살아있는 것들의 신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Vie이 없이는 살아있는 것들vivants도 없다. 그런데 최초의-계시의 최초의-수동성 없이는 이 삶Vie도 없다. 모든 것은 역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삶의 선험적인 가능성은 순수한 가능성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은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 안에 와 있고, 삶은 최초의-수동성 안에서 영원한 자기에의 도래이다. 이 수동성 안에서 삶은 끝없이 자기를 느끼고 견디며, 영원히 자기를 스스로 사랑하는 영원한 사랑 안에서 자기를 향유한다.

기독교의 신은 따라서 그리스의 신이 아니다. 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생각하는 것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실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로 그들이 찬양하는 신이 무감각한impassible”, 인간의 일들과 낯선, 또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한그들이 신에게 바치는 찬양에 무관심하고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는신일 수 있다고 상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순진한 신인동형론의 결과로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과 정반대로 생각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자들로서 자기 자신을 현상학적으로 느끼고 견뎠으며, 그들은 수동적으로 그들의 고유한 삶을 경쟁도 동의도 없이 그들에게 도래한 삶으로서 느끼고 견뎠다. 그 삶은 그 자신들의 것이 아니면서 그들의 것이 된 것이다. 그 삶 안에서 그들은 고통을 견디고, 그 안에서 삶의 큰 기쁨을 끌어낸다. 이 삶 안에 그들에게 주어진, 이 삶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그들은 삶이 그들을 필연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삶의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고 견딘다. 다시 말해 삶의 사랑은, 삶이 자신의 고유한 기쁨에 취해서 그들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고, 그래서 삶에서 그것의 기쁨에 취해서 자기 자신을 느끼고 견디는 그들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터툴리안과 함께 신에게, 신 안에서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신을 사랑하게 해달하고ㅡ신만을 사랑하게 해달하고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터툴리안이 분노하면서 그리스의 신, 멀고, 거주하지 않으며, 공허한 개념으로 환원된, 모든 의미가 박탈된 신을 반박한 것이다. 신은 우리의 인식 안에, 우리의 삶과 그의 운명이 분리된 거기에서 도래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단자들이 진장한 신”, “위대한 신이라는 이름 아래서 상상했던 핏기 없는 신의 속임수들이다. “우리 안에 삶을 불어넣어 주는 진정한 신, (...) 누구도 알 수 없는, 인간과 소통하지도 않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관여하지 않는 위대한 신 (...)이라고 그들이 발견한 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신 자신에게도 또 인간들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는 에피쿠로스의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