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orepark 2012. 4. 19. 15:59

Parages, 데리다의 블랑쇼에 대한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바다와 접한 연안, 해안이라는 뜻이다. 데리다는 블랑쇼를 읽으면서, 그에게 친숙한, 그런데 그의 fictions 그의 이야기récit 혹은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글들은, 그의 철학적 에세이나 문학비평과는 달리, 그에게 "접근불가능함 그 자체", "다가가면 갈 수로 멀어지는", "안개"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로잡는, 어떤 "힘", 혹은 "매혹", "매혹의 법" - 그런데 법의 매혹에 주의할 것 - 어떤 계산에 의해 파악할 수 없는 이 경험, 이 사건들, 보이지 않고 마구 산재해있는 듯이 보이는 그의 글들에 어떤 논리, 이론적으로 함께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것,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그의 이야기, 어떤 장르의 법칙으로도 파악되지 않는, 그 "사유의 운동"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Parages, 해안이라는 이 말이 주는 이미지일 것이다. 예전에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글을 읽으면서 "파도"라는 표현을 썼던 적이 있기도 하다. 파도, 해안 모두 어떤 운동, 반복된 운동, 정해질 수 없는 형태, 영토를 지시한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항상 존재하지만 항상 같지 않은, 그 도래, 사건. 그것은 도래하기도 도래하지 않기도 한다.  그 항상 같은 운동처럼 보이는 그 사건과 또 다른 사건은 그 사건들 사이의 거리는 무한이라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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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아주 가깝고 아주 먼, 다가오고 멀어지는 이중의 운동, 종종 같은 걸음,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눠진, 자기-자신보다 더 늙었거나 더 젊은, 다른 항상, 사건의 연변에서, 그것이 이르고 이르지 않을 때, 다른 연변에 접근이 무한히 먼, 이 모든 것이 이 유일한 말에 맡겨진다."  


 

"사건 - 만남, 결정, 부름, 명명, 표지 - 은 결정될 수 없는 경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여전히 계산의 질서에 속한 결정불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계산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결정불가능성. 이 경험 없이는 한 발도 나아갈 수 없지 않은가? 사건의 부름(오라)? 줌, 책임? 다른 것, 인과성과 다른 이유가 있는가? 모든 것이 다 프로그람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viens" - "오라"라고 블랑쇼는 말한다. 사건의 불러냄, 이 이상한 부름, 사건의 초대, 이 이인칭 단수 명령에 대해서 데리다는,


"오라"는 명령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기서 어떤 권위로부터, 어떤 법으로부터, 어떤 위계질서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 한 "단어", 전혀 한 단어가 아닌, 이것은 문법적, 언어적 혹은 여기서 - 명령법, 현재, 인칭등을 지시하는 -  의미론적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언어의 규칙을 위반하는 가장 위험한 글쓰기가 있다. 무엇이 이 법을 빠져나가는가? "사유"?  "언어 밖"의 사유? 


오라는 명령형도 현재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건이 자유롭게 도래하도록 내버려두는 비언어적인 일종의 야만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고유한 방식의 언어 안에서, 언어가 보장하는, 그것의 문법적 의미론적 구조가 보장하는 모든 종류의 안전을 염려하는 그런 언어를 고집한다. 오라가 누군가에게 현재에 명령하지 않는다면, 2인칭 단수에게 현재의 시제로 명령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명령도 주지 않고 어떤 법의 법의 질서도, 어떤 언어의 질서도 받지 않는다. 어떤 것도 받지 않기에 어떤 것도 주지 않으며, 아무 것도 교환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류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으며, 기술하지고 규정하지도 주장하지고 않는다. 그것이 발음되는 그 순간에, 아무 것도, 그것은 누구도, 무엇도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그것은 그 부름 앞에 거기 존재하는 누군가를 부르지 않는다. 부른다고 말하는 것, 거기에는 어떤 사변적인 반성의 연장이 없다. 오라, 그것은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도 요구도 욕망도 아니다. 이 모든 양태를 가능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초월론적인 기원으로서, 최초의 선험적인 말처럼,  그것들을 앞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반 고유한 사건이다. 매번 유일한 그런데 영원히 반복되는 오라라는 조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