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사랑
또 다른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레비나스의 "지식에 대한 사랑"의 앞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사랑에 대한 지식"를 말하는 레비나스의 "사랑" 말고 [조금 나중에, 그에 대해서는 호젠쯔바이크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 마치고 다시 말하자], 미셸 앙리가 말하는 사랑에 대해서 한 문장을 읽어보자.
안식일에 아픈이를 치료한 요한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예수는 "Mon Père ne s'arrête pas d'oeuvrer, et j'oeuvre, moi-aussi, 나의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Jean 5, 16-17)라고 반박한다. 사랑이 속성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것은 아마도 위의 예수의 말에서 "oeuvrer"라는 말에 들어 있을 것이다. 미셸 앙리는 이 요한의 말에 대해 "더 이상 법이 윤리의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것이 명령하고, 그것이 새로운 법을 구성한다"(삶의 현상학, IV, 62)고 말한다. 이로써 삶의 현상학 안에서 명령과 명령되는 것과의 관계가 놀랍게 밝혀진다: "삶la Vie과 살아있는 것le vivant의 관계, 즉 그것들의 연계, 계보 filiation, 자아의 초월론적인 탄생 - 세계로부터 구성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아들Fils의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기독교적 초월론적인 인간의 탄생 - , 절대적인 삶의 자기성 안에서 생성되는 살아있는 자기Soi vivant의 탄생이 밝혀진다. 새로운 법 안에서, 이미 살아있는 자의 삶vivre과 실천agir의 의무는 아들의 조건 안에 기입된 예정된 것prédestination[호젠쯔바이크의 말로는 prédiction예언]을 자신 안에서 완수하는 것이다. 이 예정된 것을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인 삶의 자기생성 안에서 생성되는 이 살아있는 것이도록 정해진다. 인간은 절대적인 삶의 본질 안에서만 자신의 고유한 본질일 수 있고 그것을 완수할 수 있다. 바울의 로마서(8, 28-30)를 인용하면서 앙리는 불려진 자는 삶으로부터 불려진 자들이고, 그의 아들이 되도록 삶에 의해 불려진 자라고 말한다. 이런 삶이 그들에게 앞서서 알려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삶이 최초의 살아있는 것le Premier Vivant의 자기성 안에서 자기 자신과 결합되면서, 삶은 그들 각각의 자기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삶이 자기 자신에게 계시되는, 나타나는 것은 삶의 로고스 안에서 삶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계시되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정은 그 탄생 안에서 각각의 살아있는 초월론적인 자기가 삶 안에서 최초의 아들의 최초의 생성의 조건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아들의 조건 안에 함축된 이런 예정, 혹은 약속은 요한에 의해서도 알려진다. 앙리의 해석을 계속 따라가면, 이러한 약속은 사랑의 명령으로 통각된다. "사랑은 칸트가 믿었던 것처럼 명령된 것이 아니다. 사랑은 명령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명령이다. 삶의 명령은 삶이 사랑일 때에만 사랑의 명령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자기성의 자기의 향유 안에 끝없이 자기를 체험하면서만(s'éprouvant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한에서만) 삶은 영원한 사랑의 이 자기성 안에서 자기를 사랑한다. 이제 삶은 모든 살아있는 자들에게 삶을 주면서, 그들의 삶의 아들들로 생성하면서 이들에게 사랑을 명령한다. 자기의 체험 안에서 삶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체험하는 자들은 이 체험, 이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도록 정해진다."(63)
이러한 함축은 하나의 조건 안에서만 완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초월론적인 에고이즘의 체계가 파괴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염려(Souci) 안에서 자기의 탈자적 관계, 이 염려와 함께 모든 자아와 모든 자기가 세계의 현상성으로부터 설명되는 그런 체계가 파괴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염려는 물론 하이데거의 것을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