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해석학과 너머(5)

aurorepark 2010. 12. 10. 16:31

앞서 읽은 2장에 이어지는 단락과 나머지 두 단락을 읽는다. 레비나스의 후설 읽기의 정교함과 그의 전 철학사적인 이해가 얽혀 있어서 그렇게 단번에 읽히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그의 후설에 대한 이해는 하이데거와의 관계에 따라서 변화된다. 그가 독일에 머물면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공부하던 28년 가을에서 29년 가을까지 그가 말하듯, 친구 집에가서 그 친구가 아닌 다른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자면, 후설 집에  놀러갔다가 그는 하이데거를 만난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하이데거의 발견은 (그 당시 후설은 이미 정년퇴직 상태로 집에서 제자들을 만나는 정도였고, 반면에 후설의 자리를 이어받아서 하이데거는 그 이름이 대학 안에서 정상으로 향하고 있던 때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레비나스는 회상한다.) 그 당시 그에게 하이데거는  후설의 주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박사논문, <후설의 직관의 이론>의 결론 부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대해 그가 가졌던 희망은 34년 하이데거의 대학 총장 취임 연설과 더불어 막을 내린다. 그는 하이데거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후설을, 그리고 철학사를 다시 읽는다. 앞서서 하이데거의 시선에서 후설을 비판했다면, 이제 반대로 후설의 시선에서 하이데거를 비판한다. 하이데거가 읽은 데카르트, 칸트, 셀링, 니체를 다시 읽는다. 왜, 무엇이 이러한 행동을 이끌었는지? 모든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이러한 질문은, 하이데거가 서양 철학의 하나의  요약, 그 절정이라면, 서양 철학에 대한 전적인 반성으로 이어진다. 서양 철학의 핵심에, 그 철학을 이끈 어떤 논리 안에 그 악의 본질에 자리하지 않는가?  아니 그 논리가 악을 조절할 수 없는, 그에 대해서 치료를 제안 할 수 없는 무능 그 자체가 서양 문명을 이끈,  그리스에 그 기원을 가진 철학의 핵심에 존재하지 않는가?  현재 우리의 야만의 문명을 이끈 그 철학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일종의 깨어남이다. 하나의 사건,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이 단독성singuralité은 본질 안에서 잠을 깬다.


지난번에 읽은 글은 다음의 문장을 끝났다:


Le temps de la conscience se prêtant à la représentation, c'est la synchronisation plus forte que la diachronie.


의식의 시간은 표상에 빚지고 있으며, 이것은 통시성보다 더 강한 공시성이다.


이어지는 글은 현상학의 지향성의 구조 안에서 이 공시성의 구조를 밝히면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야기 한다. 레비나스가 어떻게 후설을 읽으면서 지향성의 핵심에서 비-지향적인 을 건져내는지, 공시적인 시간성 안에 통시성이 어떻게 말해지는지를 볼 것이다. 후설 철학에 대한 비판과 이해로부터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그의 축자적 의미를 넘어서 밝혀낸다.    


Synchronisation qui est l’une des fonctions de l’intentionnalité : la représentation. C’est la raison de la persistance de la formule célèbre de Brentano à travers toute la phénoménologie de Husserl : la caractère fondamental de la représentation dans l’intentionnalité. Le psychique est représentation, ou a la représentation pour fondement. Il est, en tout cas, dans toutes ses modalités, transformable en thèse doxique.


공시성은 지향성의 기능들 중의 하나로, 그것은 표상이다. 이것은 후설의 전체 현상학을 거쳐서 브렌타노의 그 유명한 공식이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지향성 안에서 표상의 근본적인 성격. 심리적인 것은 표상이거나 토대로서 표상을 지닌다. 심리적인 것은 어쨌든 그것의 모든 양태 안에서 일반적인 견해로 변형되어질 수 있다.


- thèse doxique, doxa는 논의의 여지없이, comme évidence, 마치 빛 아래 드러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중의 견해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그래서 믿음, 일반적인 믿음이, 후설이 croyance에 대해서 말하듯, 일반적인 믿음이 전제된다. 이 doxa의 다른 말은 근대의 "sens commun, 양식"에 해당된다. 이 일반적인 견해는 명제적인 진술로 레비나스는 "le dit"라고 표현한다. 다른 말로 하면, "l'énoncé" (명제적) 진술, 혹은 apophansis에 해당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le dire sans dit 말해진 것 없이 말하기, 혹은 l'énonciation sans l'énoncé 진술 없이 진술하기를 주장한다. 보통 후설은 그 반대로 말해진다. 후설의 노력은 무한으로 나타날 수 있는 말하기의 가능성으로 하나의 명제적 진술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것은 후설의 과학적 신념이다. 그런데 그의 글 안에서 명제적 진술로 고정되지 않고 일어나는, 이름 할 수 없는 것들의 용출을 발견한다. 무수한 붉음의 현상들들 "붉음"이라는 본질로 고정하고자하는 시도는 그의 본질 직관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 직관 자체는 아직 다 말해지지 않은, 다 드러나지 않은 무한의 나타남을 전제한다.   


레비나스의 후설의 현상학 읽기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현상학이다. 다른 한편 그의 글쓰기 안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후설의 진술들로부터 그 드러난 것과 다른 것의 가능성을 열어보이는 것이다. 여기에 그가 자신을 후설의 글쓰기에 기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그의 현상학의 가능성의 한계로까지, 후설이 머뭇거리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 지점에서 키에르케고르처럼 죽음을 무릅쓴 도약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 한계에서 움직인다. 그의 "과장의 논리"가 그것이다. 위에서 우선 레비나스는 후설의 철학에 지속하는 표상의 우위의 전통을 비판한다. 그런데 후설의 철학은 이미 이 표상의 붕괴를 말하기도 한다.  


La conscience fait et refait de la présence – elle est la vie de la présence. Conscience qui déjà se fait oublier au bénéfice des étants présents : elle se retire elle-même de l’apparaître, pour leur faire place. La vie immédiate, pré-réflexive, non objectivée, vécue et d’emblée anonyme ou "muette" de la conscience, est ce laisser apparaître de par sa retraite, ce disparaître dans le laisser-apparaître.


의식은 현전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만든다 - 의식은 현전의 이다. 의식은 현재하는 존재자들을 위해 자신을 잊어버린다:  의식은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나타남으로부터 물러선다. 즉각적인, 전-반성적인, 비-대상적인 삶, 처음부터 익명적이고 "벙어리인" 의식의 체험은 자신의 물러섬에 의해 스스로 나타나도록 함이며, 나타나도록-내버려둠 안에서 사라짐이다.


- 하이데거는 후설과의 단절을 선언하면서 존재론으로의 전향을 말한다. 레비나스의 후설과 하이데거 읽기는 이러한 존재론적 전향과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들은 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 길어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이데거의 laisser être, Gelassenheit는 후설의 laisser apparaître, ce disparaître dans le laisser-apparaître 안에서 길어낸다.


"muette"라는 말은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의 한 문장(§ 16)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장의 한 구절은 메를로-퐁티가 <지각 현상학>에서 표현성을 전개하는 출발이기도 하다: "Le début, c'est l'expérience pure et, pour ainsi dire, muette encore, qu'il s'agit d'amener à l'expression pure de son propre sens. Or l'expression véritablement première, c'est celle du "je suis" cartésien; par exemple: je perçois - cette maison; je me souviens - de tel rassemblement, etc., et la tâche première et générale de la description consiste à distinguer cogito, d'une par, et cogitatum en tant que cogitatum, de l'autre."


"처음, 그것은 순수한 경험이다. 말하자면 아직 벙어리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벙어리를 그것의 고유한 의미에서 순수한 표현으로 이끄는 것이다. 혹은 진정한 최초의 표현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 즉 코기토의 경험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집을 지각하고, 그리고 일련의 지각들을 기억한다. 등등. 이러한 기술의 우선적이고 일반적인 과제는 한편으로 코기토, 사유와 다른 한편으로 코지타툼, 즉 사유 대상을 구분하는 것이다."


Mais dans quel cas et dans quelles significations différentes les données sensorielles pourront-elles être envisagées comme des éléments constitutifs de la conscience? La réponse a cette question présuppose un traveil descriptif de "découverte" dont la psychologie traditionnelle, à so grand dommage, s'est entièrement désintéressée. Ayant laissé dans l'obscurité les principes de sa méthose, elle a totalement perdu de vue l'immense tâche que représente la description des cogitata en tant que cogitata.


그런데 어떤 경우에 어떤 다른 의미작용에서, 감감적인 소여들은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생각되어질수 있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발견"의 기술의 작업을 전제한다. 전통적인 심리학은 아주 유감스럽게도 이 발견의 기술에 전적으로 무관심하다. 심리학은 이 기술의 방법의 원리를 전적으로 어둠 속에 내버려 둔 채, 심리학은 전적으로 사유 대상들로서의 사유 대상들에(사유 대상 그 자체에) 대한 기술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잊어버렸다.


Elle a perdu en même temps la notion exacte du sens de la description des cogitationes elle-mêmes, conçues comme formes de la conscience, et des tâches particulièrement qui incombent à cette description.


심리학은 동시에 의식의 형식들로서 간주되는 사유 작용들에 대한 기술의 의미라는 그 정확한 개념과 특히 이 기술에 부여된 과제를 잃어버렸다."(후설, <데카르트적 성찰>, 레비나스 번역, Vrin, § 16, p. 73.)


- 현상학의 과제는 이 벙어리인 이 최초의 순수한 경험, 혹은 순수한 소여, 현상, 느낌으로부터, 그리고 이것으로 하여금 어떻게 을 하게 하는가이다. 벙어리에게 말을 부여하는 것, 말을 하도록 하는 것은 후설에서 초월론적인 현상학적 환원의 작업, 과제에 속한다. 이 장은 "ego cogito"로부터 시작해서 순수한 심리학적 반성을 위한, 즉 초월론적인 반성을 위한 장이다. 이 장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초월론적인 "나는 존재한다 je suis"는 자신의 삶의 보편성 안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태들의 규정되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다원성을 포함한다. 이 상태들을 "드러내고(révéler)" 기술에 의해서 그들의 다양한 (변화하는 variables) 구조들을 파악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이 초월론적인 자아의 최초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 상태들의 고유한 "연결"의 양태들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 양태들은 자아의 구체적인 단일성에 이르기까지 이 상태들의 복잡한 단일성들을 구성한다....이 구체적인 자아는 이 기술의 보편적인 자아이다. 그런데 내가 현상학적인 성찰에서 제시하는 과제는 자아를 초월론적인 자아로 스스로 드러내는 것 se révéler moi même 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 행위의 상관자인 지향적인 모든 대상들을 포함하는 나의 충만한 구체성 안에서이다. ...기술적인 초월론적인 자아론을 위해, 말하자면 순수한 내재성을 위한, 다시 말해 실재적으로, 다만 내적 경험에 의존하는 기술적 심리학을 위해, 우리는 "ego  cogito"로부터만 그 가능한 출발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의식의 기술적인 이론이 절대적인 근본주의와 더불어 시작한다면, 이 이론은 이런 종류의 소여를 모른다. 처음, 순수한 경험이 있고...." 별 다른 해석 없이 당분간 내버려 두자. "처음의 순수한 경험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처음의 말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울림을 울린다. 레비나스의 글을 이어서 읽는다.


Conscience où l’intentionnalité identifiante est tournée téléologiquement vers la "constitution" de l’essance dans la vérité, mais que commande, selon ses modes propres – et véritablement a priori – l’énergie ou l’entéléchie de l’essance. L’énergie se déploie ainsi comme retournée dans la conscience œuvrante qui fixe l’être dans son thème et qui, vécue, s’oublie elle-même dans cette fixation.


의식 안에서, 동일화하는 지향성은 목적론적으로 진리 안에서 본질의 구성으로 향한다. 그런데 의식을 명령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고유한 양태를 따라서 - 그리고 진정하게 선험적인 양태를 따르는 - 본질의 에너지 혹은 엔텔레시(완성태)이다. 따라서 에너지는 마치 작동하는 의식 안으로 되돌아 온 것처럼 자신을 전개한다. 이 작동하는 의식은 자신의 주제 안에 존재를 고정하고, 이 [고정의 행위 안에서] 체험된 의식은 이 고정 안에서 자신을 잊어버린다.


- 이 문장은 의식의 활동에서 일어나는 소외의 문제를 다룬다. 의식은 대상을 구성하면서 그 대상 안에서 자신을 상실한다. 이 소외는 다만 헤겔의 문제도, 맑스의 문제도 아닌 철학의 시작에서 시작된 문제이다. 현상학에서도 그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지향성은 그 자신의 목적론을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따라서 대상으로 향하고, 그 대상을 진리 안에서 그 대상의 본질을 구성한다. 그런데 사실 이 의식을 움직이는 것, 그것으로 하여금 일을하게 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본질의 에너지, 즉 존재의 드러남이다. 따라서 일은 마치 에너지가 다시 의식 안으로 되돌아 온 것처럼 의식 안에서 자신을 전개하는 것처럼 일어난다.


La référence à la conscience s’efface dans son effet. "Précisément parce qu’il s’agit d’une référence universelle et nécessaire au sujet, laquelle appartient à tout objet comme tel dans la mesure où en tant qu’objet il est accessible(s'offre) à ceux qui font expérience, cette référence au sujet, ne peut entrer dans la teneur(contenu) propre de l’objet. L’expérience objective est une orientation de l’expérience vers l’objet. D’une façon inévitable, le sujet est là, pour ainsi dire, à titre anonyme… Toute expérience d’objet laisse le moi derrière elle-même, elle ne l’a pas devant elle." (Husserl, Psychologie phénoménologique, Vrin, 384)


의식의 담지가는 그것의 결과 안에서 지워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체에 가장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담지자가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상이 대상으로서 그것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인 한에서(제시되는 한에서), 모든 대상 그 자체에 속하며, 이 주체의 담지자는 대상의 고유한 내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대상적인 경험은 대상으로 향하는 경험의 방향설정이다. [(원문과 비교해서 중간의 한 문장이 빠져있다.) Dans la processus où, d'une façon conséquence, il est pris conscient de l'objet, l'expérience marche derrière l'objet dans son ipséité d'objet. 대상이 의식되는 이 과정 안에서, 경험은 자신의 대상적 자기성 안에서 이 대상 뒤에서 작동한다.] 피할 수 없이, 주체는 여기에, 말하자면 익명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대상적 경험은 그 경험 뒤에 자아를 남겨 놓는다. 모든 경험은 자신 앞에 자아를 놓지 않는다." (후설, 현상학적 심리학)


- 레비나스는 아주 빠르게 별 설명 없이, 의식의 세계 안에서의 자기의 상실을 말하기 위해 후설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사실 현상학의 근본적인 발견은 의식이 자신을 동사 être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 동사로서의 être는 실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제 의식은 다른 존재자들처럼, 마치 연장된 실체들 옆에 사유한 실체로서의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의식 혹은 의식 주체는 앞서 읽은 것처럼 순수한 사건, 레비나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 사건은 마치 "존재로서의 존재에 의해 이끌리는 기차, 이 정립의 구성 - 심각하거나 혹은 놀이인 - 으로,  이것 없이는 모든 의미가 그 생명을 잃는 것처럼 (le "train" mené par l'être en tant qu'être, la constitution de cette position - gravité ou jeu - sans laquelle tout sens est comme anémié)" 일어난다. "현상학적 환원의 그치지 않는 노력은  - 그것을 상호주관성으로까지 이끄는 - 바로 이 의식의 존재(esse)를 세계의 실증성을 작동시키는 것으로서, 그런데 자신을  이 존재의 사건으로부터 떼어(dés-inter-essement, )낼 수 없는 어려움 안에서(에도 불구하고), 세계 안의 자신의 고유한 정립으로 자신을 떼어내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후설에서 존재의 현전은  이어서 한 존재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의 삶으로서 기술된다(La présence de l'être, n'est pas, à son tour, un être, bien que, chez Husserl, elle se décrive comme vie d'un moi." (Positivité et transcendance, 13) 이렇게(이어지는 글을 계속 읽으면) "의식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즉자(l'en-soi)의 독립성은 존재의 현전을 보증하기 위해, 주체적인 것 - 대상으로 드러내는 지향성 - 이 갇혀있는 익명성 안에서 유지된다. 주체가 (우리가 존재함의 즐거움 joie d'être이라고 말하듯) 존재함의 삶(la vie d'être)이라면, 동사 être존재하다가 표현하는 삶, 존재가 나타나는 현전의 삶, 즉 현상(여기서 현상은 후설의 특별한 의미에서, 다시 말해 나타나는 것ce qui apparait이 아니라 나타나게 하는 것faire apparître으로서의 의식을 말한다. 즉 현상의 현상성(phénoménalité)을 의미한다), 이 주체는 익명적인 것(l'anonymat, 즉 주체ㅡ 의식의 삶, 존재) - 주체의 담지자는 존재하는 것의 내용에 속하지 않는다 a référence au sujet n'appartient au contenu de ce qui est  -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référence는 언어학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마치 하나의 기호가 보내지는 그것의 담지자 혹은 참조체계를 의미한다. 주체의 담지자는 주체가 대상화하는 대상의 내용 안에 속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것은 대상으로서의 대상, 칸트적인 용어로 "대상 일반 Objet en général", 즉 주체의 존재, 삶, 후설적 의미의 내적 초월성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의식은 대상을 드러내면서, 대상들의 "실증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마치 부재처럼, 핏기를 읽은 추상으로서, 자신을 그 대상의 대상성 안에 감추면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둔다(laisser être). 이렇게 의식은 환원의 운명, 즉 다시 시작해야하는 자신의 운명을 배반하면서 세계 안에 자신을 기입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의식은 익명성 안으로 자신을 접으면서, 그 안으로 후퇴하면서, 해방을 꿈꾼다. 이러한 의식의 이중적인 삶의 모순적인 형태를 후설은 위의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잠과 깨어남 사이에서 진동하는 의식의 이중적인 삶, 그로부터 사실 레비나스는 아주 은밀하게 자신을 철학을 끌어냈던 것이다. 


위의 후설의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대상적인 모든 경험은 그것 뒤에 자아를 남겨둔다. 경험은 절대로 대상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경험의 중심에는 "초월론적인 가상"이 존재한다. 이 가상 안에서 존재의 현전은 마치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작동한다. 칸트의 가르침을 따라서 말하면, "초월론적인 가상은 조건지어진 세계를 넘어서 비조건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세계가 그 세계를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의식을(자신을 그 안에 감추면서, 과학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의식을) 자신 안에 포함할 때, 초월론적 가상은, 바로 이 실증성 안에서 산출된다."     


Dans la conscience se "vit" et s’identifie la fermeté, la positivité, la présence – l’être – de l’étant primordialement thématisé et c’est en guise de conscience pré-réflexive, anonyme d’emblée, que la conscience se dissimule et reste, en tout cas, absente de la "sphère objective" qu’elle fixe.


의식 안에서 우선적으로 주제화 된 존재자의 지속성(흔들리지 않음, 견고성), 실증성, 현전 - 존재 - 가 자신을 살고, 자신을 동일화 한다. 그리고 의식이 자신을 감추고, 모든 경우에, 그것이 고정하는 "대상적인 영역' 안에 부재하는 것은 바로 이 전-반성적인 의식에 의해서이다.


L'effort permanent de la réduction transcendantale revient à amener à la parole la "conscience muette" et à ne pas prendre l'exercise de l'intentionnalité constituante amenée à la parole pour un être posé dans la positivité du monde. La vie de la conscience s'en exclut et, précisément en tant qu'exclue de la positivité du monde, "sujet muet", elle permet aux êtres du monde de s'affirmer  dans leur présence et dans leur identité numérique.


현상학적 환원의 지속적인 노력은 "이 벙어리인 의식"을 말로 이끄는 데 있다. 그리고 세계의 실증성 안에 정립된 한 존재자를 위해 말로 이끌린 구성하는 지향성의 연습을 취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의식의 삶은 세계의 실증성으로부터 배재되어 있으며, 정확히 그것으로 배재된 것이 한에서 "벙어리 주체"이며, 이 의식의 삶은 세계의 존재자들이 그들의 현전 안에서 그리고 수적인 동일성 안에서 긍정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 후설도 하이데거도 모두 이 벙어리인 최초의 경험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들의 현상학, 혹은 존재론일 것이다.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철학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로고스, 다시 말해 형상을 빌려온다. 질료는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의 프랑스 현상학의 현상학자들은 이 벙어리인 질료가 스스로 말을 하도록 한다. 레비나스의 서양 철학에 대한 반박은 이 로고스에 대한 반박과 일치한다.


Ainsi, dans l'idéalisme transcendantal de la phénoménologie de la phénoménologie husserlienne, nous sommes au au-delà de toute doctrine où l'interprétation de l'être à partir de la conscience conserverait encore un sens restrictif quelconque de l'esse-percipi, et signifierait que l'être n'est qu'une modalité de la perception, et où la notion de l'en soi prétendrait à une fermeté plus forte que celle qui pourrait jamais procéder d'un accord entre pensées identifiantes. Toute l'oeuvre husserlienne consiste, au contraire, à entendre comme abstraction la notion de l'en soi séparé du jeu intentionnel où elle est vécue.


따라서, 후설 현상학의 현상학적인 초월론적 관념론 안에서, 우리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한 존재의 해석은 지각-존재의 제한된 의미을 보존하며, 존재는 지각의 한 양태를 의미한다는 일반적인 주장 너머에, 그리고 즉자(사물 자체)의 개념은 동일성의 사유들 사이의 일치로부터 끌어낼 수 견고성보다 더 강한 견고상을 주장하는 모든 일반적인 주장 너머에, 존재한다. 모든 후설의 작품은 반대로  즉자가 체험되는 지향적인 놀이로부터 분리된 추상(분리)으로서 즉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 이제 남은 일은 이 초월성을, 이 익명성을 깨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