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믿음과 지식(37)
"Au fond sans fond de cette crypte, l'Un + n engendre incalculablement tous ses seppléments....""이 지하무덤의 바닥 없는 바닥에서 하나+ n은 계산불가능하게 자신의 모든 보충들을 낳는다..." 이 문장은 데리다의 믿음과 지식의 끝절인 52절의 첫 문장이다. 오랫동안 읽기ㅡ 번역을 그쳤었다. 이 바닥 없는 바닥의 지하무덤, '데리다의 크립트', '데리다의 지하무덤'을 읽기 위해서 이 읽다만 절들을 다시 읽고 옮긴다.
37. "종교를 생각하기?"라고 당신들은 말한다. 마치 이런 제안이 질문 자체를 앞서서 제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우리가 종교를 그것의 고유성에서 그 자체로 생각할 수 있는 것 pensable이라고 주장한다면, 비록 생각한다는 것이 보는것, 아는 것,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종교를 그것들에 대한 존중 안에서 유지하고 그것을 생각하는 일은, 이미 끝난 것으로, 판단된다. [...] 베르그손의 유명한 결론 부분: "[.. .] l'effort nécessaire pour que s'accomplisse, jusqu'à sur notre planète réfractaire, la fonction essentielle de l'univers, qui est une machine à faire des dieux. ... 신들을 만드는 기계인 이 우주의 본질적인 기능이 우리의 이 저항하는 위성에서까지 완성되기 위한 필요한 노력." 만일 베르그손이 말하고자 했다고 믿었던 것과 다른 것, 그런데 어쩌면 비밀스럽게 전달되도록 내버려 둔 것을 그에게 말하도록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만일 그에도 불구하고, 주저함, 비결정, 의심에 의해, 그가 일종의 증상적인 후퇴rétraction로의 이행, 그러한 장소를 남겨두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뒤로 돌아감, 물러섬(retactare, 시세로가 종교적인 행위 혹은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 말하는 것)에서, 종교의 두 기원 - 뿌리 - 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가설에 두 번 mécanique 기계적인 형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적인"은 여기서 일종의 "신비한"으로 이해된다. 그것이 신비한 혹은 비밀스런 이유는, 이 기계성이, 이 자동화가 피할 수 없이 가족과 (heimisch, homely), 친근한 것과, 길들일 수 있는 것과, 고유한 것과, 생태적이고 경제적인 집oikos과, 관습 éthos과, 거주의 장소와 결탁하고 결별하는 것을 산출하고 재산출하는 한에서, 접근 불가능하고 낯설면서 동시에 친근한 umheimlich, uncanny 것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혼란 때문이다. 거의 순간적이고 자동반사처럼 비반성적인 이 자동성은 국가, 관용구, 혹은 우리가 "동일한 것"이라는 용어 아래 모을 수 있는 모든 것과 결탁하면서 동시에 결별하는 분리abstraction와 당김attraction의 이중운동을 반복한다: 논리를 따라서 탈-자기화ex-proprie, 재-자기화ré-approprie, 뿌리를 뽑고dé-racine 뿌리를 다시 내리는 ré-enracine, 그리고 탈-재자기화 ex-approprie하는 이 두 단어에서, 이어서 auto-indemnisation auto-immune 자기-면역의 자기-보상이라는 논리로 형식화해야 한다.
"종교적인 것의 회귀"에 대해서 차분히 말하기 전에, 하나 안에서 둘을 설명해야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계, 원거리 기계télé-machine이다.
1) "종교적인 것의 회귀", 즉 복잡하고 과도하게 규정된 어떤 현상의 전개(déferlement)로서 단순한 회귀(retour)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세계화와 그것의 전개 양태들 (원거리-기술-메디아-과학적이며, 자본주의적이며, 정치-경제적인 모습들)은 아주 독창적이고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것의 회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경향들 중의 하나로서 종교적인 것의 근본적인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과 유럽인들의 권리를 체화한 것으로서 로마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은 그러한 정치와 권리에서 기독교가 아닌 모든 "근본주의자들", 물론 일단의 형태의 정교, 신교, 카토릭과 전쟁을 한다). 이들과 대면해서, 이와 다른 자기-파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내가 종교의 자기-면역이라고 과감히 부르는 것은 "평화적인" 기획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전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형제화, 신의 아들로서 인간의 화해를 요청한다. 그리고 특히 이러한 형제애는 아브라함의 종교들의 일신론적 전통에 속한다. 그래서 항상 평화 운동을 이 이중적인 지평 (한편으로 감추면서 다른 한편 나누는) 에서 떼어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a)신의 죽음의 자기무화(kénotique)의 지평과 인류학적인 내재화(신적 질서의 참여하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모든 권리에 앞서서, 인간과 인간적인 삶의 권리들: 이로부터 어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기를 거부하고, 그러한 광기는 아예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가 ...교회의 대표자들, 교황의 연설을 들으면, 우리는 또한 일종의 "신의 죽음"을 알리고 그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때때로 단지 이것만을 말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신의 또 다른 죽음은 수난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어디에 차이가 있는가?
b) 이런 평화의 선언은 또한 유럽인들의 신민지 정책이 그러했듯이 평화적 제스쳐 뒤에 다른 수단을 통해 전쟁을 행한다. 이러한 제스쳐가 로마로부터 온다면, 그것은 유럽 안에서, 유럽에서 일어난다. [...] 유럽을 넘어서, 같은 도식, 같은 유대-신학-정치적인 전통을 통과해서, 평화의 이름으로 세계화modialisation를 강요하는 것이다.이 세계화는 결국 유럽-영미화로 그들의 관용구 안에서 일어난다.
2) 같은 운동은 종교와 보다 비판적인 원거리-기술적인 이성과 떼어낼 수 없으며, 자신 안에서 à lui-même 다시 적용된다. 그것은 해독제를 투여할 뿐만 아니라, 자기-면역의 힘을 투입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살아남은, 성스러운 것의 자기-방어 체계가 자신의 고유한 힘에 대항해서, 자신의 고유한 경찰에 대항해서, 자신의 고유한 저항에 대항해서, 자신의 고유성 그 자체에 대항해서, 다시 말해 자신의 고유한 방어체계에 대항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그러한 공간에 있게된다(..doit se protéger contre sa propre pouvoir, sa propre police, son propre pouvoir de rejet, son propre tout court, c'est-à-dire contre sa propre immunité.) 이것은 바로 항상 과학과 종교가 연대하는 화를 면한자(살아남은 자)의 자기-면역의 끔찍하고 치명적인 논리이다(C'est cette terrifiante mais fatale logique de l'auto-immunité de l'indemne(note1) qui associera toujours la Science et la religion.).
note 1)[ l'auto-immunité de l'indemne에 긴 각주가 붙어있다] L'"immun"(immunis)이라는 말은 책임(charge), 봉사, 세금, 의무(munus는 공동체의 공동(commun de la communauté)의 어원이다)의 면제이다. 이 면제는 국가의 혹은 국제법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예를 들어 국회의원이나 외교관의 면죄특권). 또한 이 면제는 교회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전의 불침범성. 사람들은 이 곳에서 종종 피난처를 발견한다. [...]또한 이것은 생물학의 영역에서 그 권위를 얻기도 한다: 면역. ... 여기서 특히 우리의 관심인 자기-면역(auto-immunisation)의 과정이 문제인 경우, 이것은 우리가 잘 알듯이 한 유기체가 자신의 고유한 면역체계를 파괴하면서 자신의 자기방어기기에 반해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덧붙이지만 밖으로부터 항원을 받아서 유기체 안에서 항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스스로 항체를 산출하는 병리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항체(anticorps)의 형성의 현상은 병리학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관을 이식할 때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확장을 빌어 일종의 자기-면역의 일반 논리를 말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명과 사유의 이중의 기원으로서 믿음과 지식,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한 듯이 보인다.
한편으로, 비판과 원-거리기술의 이성의 "빛, 계몽"은 다만 믿을만함(fiabilité)을 전제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환원불가능한 "믿음foi", "사회적 연대"의 믿음 혹은 어떤 증인의 "약속한 믿음"과 같은 믿음("모든 증거와 모든 이론적인 검증을 넘어서 이 진리를 너에게 약속한다. 나를 믿어라, 등등)을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거짓말과 거짓된 약속에서도 일어나는 이런 약속의 수행(performatif de promesse)의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타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믿음의 수행적 경험 없이는 어떤 "사회적 연대"도, 타자에게 말건냄도, 어떤 수행 일반도 없을 것이다: 어떤 협약, 어떤 설립, 어떤 헌법, 어떤 국가, 법도 없을 것이다. 이 생산적인 수행의 구조적인 수행성이 처음부터 과학적인 공동체의 지식을 실행에 연결하며, 과학을 기술에 연결한다. 만일 우리가 과학기술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것은 ...과학적 행위는 전적으로 실천적 간섭이며, 그 본질에서 기술적 실행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여기서 과학적 행위는 장소와 놀이하며, 거리와 속도를 작동시킨다. 그것은 장소를 변경하며, 멀어지거나 접근하며, 현실화하거나 가상화하며, 가속하거나 늦춘다. 그런데 원거리 기술과학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는 곳 어디에서나 비판은 적어도 본질적이거나 종교적 소명을 가진 근본적인 믿음(foi)의 신탁적 신용(crédit fiduciaire)을 적용하거나 긍정한다. 우리는, 이 근본적인 믿음이 원거리기술의 본질적으로 경제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이성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신용, 믿을만함, 혹은 위탁등을 말한다. 어떤 계산, 어떤 보증도 이러한 이성성의 궁극적인 필요성, 즉 증인의 서명의 필요성을 줄일 수 없다. (따라서 서명의 이론은 반드시 주체, 인격, 혹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자아의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현실화하는 것, 그것은 오늘날 소위 "종교의 회귀"라고 말하는 것에서, 한편으로 근본주의 혹은 그들의 정치와 다른 한편 방송과 세계와의 영역 안에서 이성성, 다시 말해 원거리-기술-자본주의적-기술주의적 신탁성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소위 우리가 "근본주의들"이라고 말하는 이 이성성은 또한 극-비판적(hypercritique)(note 2)[데리다의 (각주)가 걸려있다. 이 곳에서 데리다는 이스람주의와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뒤에 우리가 잊어먹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이들이 전개하는 현재의 민주주의와 그것의 한계와 시장과 이 시장을 지배하는 원거리-기술과학 이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일 수 있으며, 심지어 적어도 해체의 비판적 행위의 근본화와 닮을 수 있는 것 앞에서도 뒤로물러서지 않는다. 우리가 아주 자주, 아주 쉽게,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이 근본주의들에 대해 무지, 비이성성 혹은 암흑주의라고 분류하는 현상들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이것들은 종종 잔여들, 표면적 결과들, 자기-면역 작용이 남긴 잔여들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떤 구조를 또한 자기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에 대한 반응을 감추고 있다: 원거리 기술과학이 산출하기를 그치지 않는 탈골 dislocation, 이전 délocalisation, 탈근 déracinement, 탈이디옴화(탈관용구화) désidiomatisation 그리고 탈소유 dépossession (이 모든 영역들 중에서, 특히 성적-남근적 영역). 원한의 반응은 이 운동을 나누면서 자기 자신에 대립시킨다. 이 반응은 면역과 자기-면역인 어떤 운동 안에서 스스로를 보상한다. 기계의 반응은 삶과 마찬가지로 자동적(즉 기계적)이다. 이런 내적 분열은 거리를 열며, 또한 종교의 "속성", 즉 종교를 고유성에 맞춰 자기화 하는것이며(종교가 또한 상처입지 않음인 한에서: heilig, saint, sacré, sauf, immun, etc.), 종교적인 보상을 모든 형태의 소유, 대지와 피와 얽힌, 가족과 국가와 얽힌 "문자" 안에서 드러나는 언어적 관용구에 맞춰 자기화하는 것이다. 이런 내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은 면역적이며 자기 면역이며, 우리가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현상 안에서 종교적 쇄도(殺到déferlementㅡ 波濤)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déferlement이라는 단어는 자기 안으로 감으면서, 자기에 대립해서 - 동시에 때때로 테러와 테러리즘 안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것에 반해, 자신의 고유한 항체에 반해서 - 전개되는 것을 자기화하는 파도의 운동과 같은 이중화를 제안하기에 여기서 자연스럽게 요구된다. 적과 연대하면서, 항원을 받아들이고, 타자를 자기와 함께 이끌면서, 전개는 적의 힘으로 증가되고 부풀어오른다se gonfle. 어떤 섬의 해변가에서, 순간적인 아주 자동적인 부풀어오름 안에서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 것이라고 믿는 파도의 부서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평없이 그것이 온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더 이상 봄에 대한 확신도 없으며, 그것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다. 미래는 어떤 예보도 어떤 예언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안에 사로잡혀, 그것에 놀라며 우리는 어떤 진리 안으로 실려간다. 우리가 이 단어를 아직 사용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미래이다. [역자주) déferlement, 데리다가 선택한 이 단어는 자기 자신 안으로 감기면서 부서지는(자기를 부수는) 파도를 이르는 말이다. 해변에서 파도의 움직임을 보면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vague'라는 말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 말이 파도의 이러한 움직임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파도에 대한 데리다의 애착은 여기가 처음이 아니다. "폭력과 형이상학(Violence et métaphysique)" 안에 한 주1(p. 124 in L'écriture et la différence)을 보면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의 주제들의 전개 방식을 파도(vague)에 비유한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옮기는데 나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한 번은 앞서서, '흐름'으로 혹은 '전개"로 옮겨봤다. 이제 다시 '쇄도' 혹은 '파도'로 옮겨보지만 이 단어가 지닌 의미를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 유비적 사용이 아닌 직접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 '파도의 부서짐'이라고 옮기기도 했다. 결국 파도의 부서짐과 같은 운동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말이 요구된다. 이 단어는 미래의 예측할 수 없음에 대해,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의 불안을 예비한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끝없는 돌아옴과 반복 앞에서, 그 예측할 수 없음 앞에서 느낀 어떤 불편함의 정체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내가 바다보다 강과 시내를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나 덧붙이자만 데리다는 위에서 'se confle'을 이태리체로 적는다. s'augumente는 힘의 증가를 지시한다면 se confle은 풍선이 바람으로 부풀어오르는 것을 지시한다. 모두가 커지는 증가를 지시하지만 뒤의 것은 불다보면 터지는 풍선처럼, 사그러드는 거품을 지시한다.]
따라서 오늘날 종교는 그것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반응하는 원거리-기술과 연대한다. 종교는 한편으로 세계화이다. 그것은 자본과 원거리-매체의 지식을 산출하고, 그것과 결합하고, 그것을 전개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교황의 여행과 그으 여행의 세계적인 광경화, 루시디 사건의 전 세계적 확산, 전지구의 테러리즘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종교는 그들의 고유한 장소에서, 장소 그 자체에서, 그 진리의 발생에서 종교를 축출하는 자에게, 그리고 동시에 종교에 새로운 힘/권력을 부여하는 자에게 반응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종교는 면역과 자기면역이라는 모순적인 이중적 구조를 따라서 그것을 위협하는 것에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보호하는 것에 대항해서 전쟁을 이끈다. 그런데 이 두 행위, 두 기원 사이의 관계는 피할 수 없다. 즉 자동적이고 기계적이다. 하나는 기계의 형식을 가지며,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자발성, 삶의 상처받지 않는, 혹은 화를 입지 않는indemne 속성, 다시 말해 또 다른 자기규정autodétermination의 형식을 가진다. 그런데 자기면역은 공동체와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의 강조로써 자신의 면역적 생존survie의 체계에 사로잡힌다hante. 자기-면역의 위험이 없는 가장 자율적인 살아있는 현재le présent vivant 안에는 어떤 공통의 것commun도 어떤 면역도, 어떤 살아남음 saint et sauf 도, 어떤 성스러음heilig et holy도, 어떤 상처입지 않음indemne도 없다. 항상 그렇듯이, 위험은 두 번, 동일하고 유한한 위험을 짊어진다. 한 번이라기보다는 두 번: 위협menace과 기회chance(나의 강조). 두 단어 안에서, 위험을 감당해야 하며, 우리는 담보로써 근본악의 가능성 - 그것 없이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 할 수 없는 것- 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파도의 운동에 비유되는 종교의 예측불가능한 반복과 회귀의 논리는 이어지는 글에서 itérabilité, 반복가능성과 근원적인 "예(oui)", 무수한 예들에 대해서 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