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과 너머(2)
1장은 긴 한 단락이다. 각 문장으로 나눠 읽는다. 이 장은 후설의 지향성의 공식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대해서 말한다. 이어지는 2장부터 레비나스의 후설 읽기가 항상 그러하듯이, 후설 안에서 후설을 넘어서 그를 읽는다. 후설의 진술의 가능성을 그 가능성의 최상으로까지 확장한다. 말해진 것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해진 것에서 말하기를 다시 끌어낸다.
Nous prendrons pour point de départ la phénoménologie husserlienne de la conscience. Son principe essentiel - que, dans une large mesure, on peut considérer comme le réciproque de la formule "toute conscience est conscience de quelque chose" – énonce que l’être commande ses façons d’être donné, que l’être ordonne les formes du savoir qui l’appréhende, qu’une nécessité essentielle rattache l’être à ses façons d’apparaître à la conscience.
여기서 우리는 후설의 의식의 현상학을 우리의 탐구의 출발점으로 취한다. 그의 현상학의 본질적인 원리 - 가장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공식을 (의식작용과 의식대상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로서 고려할 수 있다 - 는 존재가 자신의 주어지는 방식들을 명령한다는 것을, 존재가, 그것을 파악하는 지식의 형식들을 명령한다는 것을, 어떤 본질적인 필연성이 존재를 그것이 의식의 나타나는 방식들에 연결한다는 것을 진술한다.
- 후설의 현상학의 근본적인 원리, 즉 지향성, 그것의 공식은 우리가 잘 알듯이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레비나스는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 원리가 드러내는 최초의 명백성은 상호관계, 즉 무엇인가와 이것을 지향하는 의식 사이의 관계, 의식작용noèsis과 의식대상noéma, 존재와 인식 사이의 상호관계이다. 이 지향성의 본질적인 원리는 우선 존재가 즉 의식의 대상적 존재가 자신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들을 명령한다는 것을, 존재가 지식의 형식을 명령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본질적인 필연성이 이 존재를 그것이 의식에 나타나는 방식들을 연결한다는 것을 말한다.
Ces formules pourraient certes s’entendre comme affirmant a priori ou même empiriquement un certain état de choses, comme une vérité "éidétique" d’entre les vérités "éidétiques", si elles ne concernaient pas ce qui, portant sur la corrélation être-connaissance, assure la possibilité de tout vérité, de tout empirie et de tout éidétique; ce dont dépendent l'apparaître comme exhibition et la conscience comme savoir.
만일 존재-인식이라는 상호관계에 의존하는 이 공식들이 모든 진리, 즉 모든 경험적인 진리와 모든 본질적인 진리 둘다를 보증하는 어떤 것과, 즉 노출로서 나타남과 지식으로서의 의식이 동시에 의존하는 것과 관계하지 않는다면(즉 위에서 어떤 본질적인 필연성이 없다면), 이 공식들은 물론 선험적인 것으로서 혹은 심지어 경험적으로 일단의 사물들의 상태를 긍정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인 진리들 가운데 하나의 본질적인 진리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La relation entre la conscience et la réalité du réel n’est plus pensée ici comme une rencontre de l’être avec une conscience qui en serait radicalement distincte, soumise à ses propres nécessités, reflétant l’être rencontré – fidèlement ou infidèlement – au gré de "lois psychologiques" quelconques, et ordonnant des images en rêve cohérent dans une âme aveugle.
그런데 여기서 의식과 실재적인 것의 실재(성)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존재와 그것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그것의 고유한 필연적인 법칙에 복종하는, 만난 존재를 심리적인 일련의 법칙을 따라서 - 충실하게 혹은 불충실하게 - 반사하는 그리고 눈먼 영혼 안에서 일관된 꿈 속의 이미지들을 정돈하는 그런 의식과의 만남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La possibilité d’un tel psychologisme est désormais ruinée, même si la différence entre l’être et la subjectivité à laquelle l’être apparaît noue en ipséité le psychisme qui est conscience ou savoir.
이러한 심리주의 가능성은, 비록 존재와 존재가 나타나는 주체성 사이의 차이가 자기성 안에서 의식 혹은 지식인 심리적 삶psychisme을 엮는다고 할지라도, 이 지향성의 원리로부터 파괴된다.
- 사실 이 장에서는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의식과 존재와의 관계가 심리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것만을 지적하자. 이어지는 장에서부터 레비나스의 후설 읽기의 독창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