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affectivité

aurorepark 2010. 11. 21. 05:23

 Affectivité, 이 개념은 앙리 철학의 핵심이면서, 그의 철학의 본질로, 내가 <촉발성>이라고 옮기고 있는 이 말은 그의 책 어디를 펼치나 발견할 수 있는 말이다. 우선 앙리의 이 개념에 대한 고유한 철학적 정의 이전에, 철학 개념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념 규정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프랑스의 철학  "개념 사전"(Les Notions philosophiques, in Encyclopédie Philosophique Universelle) 안에 "affectivité" 항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Capacité d'épreuve des sentiments. 감정들을 느끼는 능력", "(pouvoir, force, pulsion)"이다. 그 아래로 철학사 안에서 이 개념을 전개한 멘느 드 비랑, 셀러, 하이데거, 그리고 앙리의 affectivité의 차이와 그 예문들이 실려있다. 나는 이어지는 이 설명들을 여기에 옮기지는 않을 것이다. 불어 사전, <호베르 Robert에>서도 우리는 위의 정의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전에는 이 말의 축자적인 의미와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의미로 나워서 적고 있다: 하나는 l'ensemble ou caractère des phénomènes affectifs, ensemble des sentiments, des emotions, des affects이다. 정서적 현상들의 성격 혹은 그러한 것 전체이다. 다른 하나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Aptitude à être affecté de plaisir ou de douleur, 쾌 혹은 불쾌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이 말은 sensibilité, 감수성 혹은 감성과 같은 의미의 폭을 가진다.  그런데 앙리의 affectivité는 그가 매번 기회가 있을 때만다 강조하듯이 칸트나 후설이 사용하는 감성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이 affect,즉 l'état affectif; 즉 정조 일반과 관계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말은 affecter, affectif, 그리고 아주 늦게 affectif로부터 affectivité로 전개된 것이다.  affecter 그 동사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exercer une action sur sensibilité de qqn. = émouvoir, impressionner, toucher, frapper 등등. "누군가의 감(수)성에 작용을 가하다, 촉발하다, 인상을 주다, 감동시키다,등등.


앙리는 위의 사전적인 의미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앙리의 최초의 저서(공식적으로 출판된 순서에 의하면) <현시의 본질>의 4부은 "affectivité"에 바쳐진다. 이 장의 § 52, <De l'essence originaire de la révélaration comme affectivité, affectivité로서의 드러냄의 본래적인 본질에 대해서>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제목에서 우선 확인되는 것은 révélation=affectivité의 공식이다.


여기서 앙리는 자신의 affectivité와 칸트 혹은 하이데거의 affectivité 혹은 sensibilité와 어떻게 다른지를 우선 보여주고 그 끝에 그가 생각하는 affectivité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CE QUI SE SENT SANS QUE CE SOIT PAR L'INTERMEDIAIRE D'UN SENS EST DANS SON ESSENCE AFFECTIVITE. L'affectivité est l'essence de l'auto-affection, sa possibilité non théorique ou spéculative mais concrète, l'immanence elle-même saisi non plus dans l'idéalité de sa structure mais dans son effectuation phénoménologique indubitable et certaine, / elle est la façon dont l'essence se reçoit, se sent elle-même, de telle manière que ce "se sentir" comme "se sentir soi-même", présupposé par l'essence et la constituant, se découvre en elle, dans l'affectivité comme se sentir soi-même effectif, à savoir précisément comme sentiment. / C'est là ce qui constitue l'essence du sentiment, l'essence de l'affectivité comme telle: se sentir soi-même, de telle manière que le sentiment n'est pas quelque chose qui se sent lui-même, tel ou tel sentiment, tantôt celui-ci et tantôt celui-là, mais précisément le fait de se sentir soi-même considéré en lui-même dans l'effectivité de son effectuation phénoménologique, c'est-à-dire dans sa réalité. Comme tel, comme ce "se sentir soi-même" phénoménologiquement effectif, constitutif de l'essence et la rendant possible, le sentiment n'est pas différent de celle-ci: l'affectivité est l'essence originaire de la révélation.(EM, 577-578)


셋으로 나눠 읽는다.


1.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감각의 매개 없이 느껴지는 것(스스로 느끼는)은 본질적으로 affectivité이다. L'affectivité는 자기-촉발의 본질,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아닌, 구체적인 자기-촉발의 가능성이며, 내재적인 구조의 이념성에서 파악된 것이 아니고 그것의 의심할 수 없고 확실한 현상학적인 실행성에서 파악된 내재성 그 자체이다."


-이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사실들은 우선 affectivité는 칸트에서처럼 감각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내감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 시간의 초월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affectivité는 auto-affection의 본질로 affectivité는 affect가 아닌 auto-affection과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내가 자기-촉발을 자기-정서로 옮겼다면, 나는 affectivité를 "정서성"이라고 옮겼을 것이다. 만일 자기-정조였다면, "정조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감응이면 감응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칸트의 우리말 번역을 따라서 자기-촉발을 따랐다. 그리고 사실 나는 촉발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여기에는 toucher와 réveler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toucher는 만지다라는 아주 일반적인 의미가 있지만, 이 내가 좋아하는 이 단어는 우리의 감성에 상처를 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révéler 드러난다. 그런데 다른 것이 건드려서, 만져서 상처입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의해 상처입고 스스로 드러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촉발성" 이외에는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없다.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자기 촉발성"이라고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앙리는 auto-affectivité라고 쓰지 않았다. 위의 문장에서 "구체적인" 다시 말해 현상학적인 "실행성effectuation" 혹은 실천성을 강조해서 이것을 이런 저런 감정의 내용들로 생각하는 것은 잠시 유보하자. 아래 이러지는 글에서 앙리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현상학적인 실천성 혹은 실행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2. "l'affectivité, 그것은 [자기 자신을 실질적으로effectif으로 느끼는 것으로서, 즉 정확히 감정으로서의 affectivité 안에서  자기-자신을 스스로 느끼는 것으로서 이 "자기를 느낌"이 본질 안에서 발견되는 - 이것은 본질에 의해서 전제된 것이며, 이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  그런 방식으로,] 본질이 자기를 수용하고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방식이다."


-이 문장의 주요내용만 옮기면, 앙리는 "affectivité"는 본질이 자기를 수용하고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방식이다라고 말한다.이 진술만으로 판단하면, affectivité는 방식, 즉 양태modalité, mode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 방식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 affectivité는 감정으로서 comme, 자기 자신을 실질적으로, 실천적으로, 실행적으로, 실제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난 자기를 스스로 느낌은 본질 안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affectivité는 ..[이렇게 발견되는 방식으로] 본질이 자기를 수용하고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방식이다. 위에서 앙리의 펜에서 나오듯이 감정=affectivité의 등식이 comme에 의해서 확인된다. comme ...으로서, ...와 같은 것으로, ..처럼, ...의 자격으로 등등. 이 경우 우리는 affectivité는 감정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OK. affectivité는 감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감정 sentiment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래에서 앙리는 설명한다.   



3. "바로 여기에 감정의 본질, 즉 affectivité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있다:  스스로 자신을 느끼는 것, 그런데 감정은 스스로 느끼는 어떤 것, 즉 이런 저런 감정, 어떨 때는 이렇고 어떨 때는 저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자기 느낌의 실행의 실행성 안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고려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로, 현상학적으로 실질적이고 본질을 구성하는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느낌"으로서, 감정은 본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 affectivité는 드러냄의 본래적인 본질이다."


- 감정과 affectivité의 등식은 다시 확인되면서 앙리는 그것의 본질은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de telle manière que,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감정은 어떤 것, quelque chose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다. Le sentiment n'est pas quelque chose qui se sent lui-même,  tel ou tel sentiment, tantôt celui-ci et tantôt celui-là 어떤 것이 자기-자신을 느끼는, 이런 저런 감정으로, 이럴 때는 이렇고, 저럴 때는 저런, 이 때는 이 감정, 저 때는 저 감정으로 드러나느 식으로, 드러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자기-느낌(스스로 자기를 느낌)이라는 실행의 실행성 안에서, 그것의 구체성 안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고려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낀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우리는 affectivité를 이런 저런 감정으로서의 구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실행의 실행성 안에서 본질을 구성라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즉 초월론적인 조건으로서의, 스스로 자기를 느낌으로서의 affectivité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정은 affectivité이다. 그래서 감정은 이 affectivité의 본질과 다른 것이 아니며, affectivité는 드러냄, 드러내는 힘-ation, pouvoir de révélation이다. révéler, révél-ation. 


이제 앞서 말한 철학사전의 정의로 - Capacité d'épreuve des sentiment[s] - 다시 돌아가면, affectivité는 capacité ou pouvoir ou modalité de s'éprouver soi-même du sentiment 이다.


이제, 본질이라는 말로 돌아가보자. 본질이라고 보통 우리가 적고 있는 essence, 혹은 독일어로 Wesen은 모두 esse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l'être 존재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상학에서 본질은 후설이 그렇게 사용하듯이, 하이데거가 그렇게 사용하듯이 중세의 "본질"의 본질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 존재를 의미하듯이 앙리가 사용하는 본질도 마찬가지로 존재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존재는,  후설의 현상학적인 본질을 넘어선 앙리가 말하는 본질, 존재는 그에게 sub-jectivité,  아래 놓여있는 것,  주체성이다.  그것은 순수질료로, 형상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그런 자기-촉발의 질료, 실재réalité로서 살아있는 것이다. capacité ou pouvoir ou modalité de s'éprouver soi-même du sentiment, ou de l'essence ou de l'être ou de la sub-jectivité; 촉발성은 감정 혹은 본질 혹은 존재, 혹은 아래-놓여있는 것 즉 주체성의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능력, 힘, 양태이다. 촉발성은 촉발적인 힘, 자기를 드러내는, 계시의 힘이다. 스스로 자기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물질의 자기를 드러내는 힘이다. 그 힘을 앙리는 삶, 생명이라고, 후에 이라고 부른다. 이 안에서 질료는 그 자신 안에 형상의 원리를 지니기에, 더 이상 빛으로 던져질 이유도, 그것을 위해, 형상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본질 밖으로, 스스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힘 밖으로 나갈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완벽한 무신론이 여기서 완성된다. 이미 후설이 시도했던 완벽한 무신론이 어떤 의미에서 완성된다. 이 무신론이 그의 기독주의의 본질로 넘어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한 신, 생명, 자기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후기) 철학하는 사람에게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믿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반박되기 전까지는 끝까지 내가 직접 몸소 느낄 때까지는 자신을 시험에 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