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미셸 앙리, 고통의 무능과 힘

aurorepark 2010. 11. 14. 07:28

"Ce n'est pas de faiblesse, mais de tes pouvoirs que tu succombes." (Michel Henry, Le Fis du roi,Gallimard, 1981, p. 65.)


"네가 허리를 굽히는 것은 허약함 때문이 아니라, 네 힘.가능성들에서이다."(『왕의 아들』 중에서)


내가 복종하고, 내가 짖이겨지는 것, 나를 낮추는 것, 나를 포기하는 것, 나를 전적으로 누군가에 맡기는 것, 이 전적인 수동성이 우리가 쉽게 믿듯이 나의 허약함에서가 아니라, 이 힘, 가능성, 혹은 앙리가 자주 멘느 드 비랑의 용어를 빌려  "Je peux, 나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의 무능, 자기와 떼어낼 수 없는, 자기를 파괴할 수 없는 이 고통의 무능 앞에서, 다만 따를 뿐인 그 고통 안에서, 이 힘은 무엇인가? 이 힘에의 의지는 무엇인가? 극단의 수동성에서 힘으로의 이 이상한 이동, 이 일치, 이 역설은 무엇인가?


앙리가 고통을 말하는 곳은 우리가 앞서 읽은 한 논문에서 뿐만이 아니다. 그의 텍스트 아무 것이나 열어도 우리는 "고통"이라는 단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파토스 혹은 수난이 삶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고통이란 단어가 맨 앞에 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Incarnation 『육화』 §9-10에서 후설의 수동성을 비판하면서 앙리는 다시 고통의 전적인 수동성을 주장한다. 고통의 전적인 무능(impuissance),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기에의 몰린 - "고통이 모든 자리를 차지했기에, 지평도 희망도 없는 , 전적으로 자기에 의해 점령된 고통, 그래서 고통에게는 고통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와는 다른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I, 84) - 이 고통의 무능은 앙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의 (force, puissance)이고 혹은 능력이다. "시련의 무능에서 자기에 대한 감정의 힘이 밝혀진다. Dans l'mpuissance du souffrir se fait jour la puissance  du sentiment vis-à-vis de soi. 감정의 은 감정의 용출이며, 그것의 자기에 의한 사로잡힘이며(son être-saisi par soi), 있는 바의 것과의 일치이며, 자기와의 절대적인 단일성이다."(EM, 593-594) 이러한 표현은 이미 우리가 앞서 읽은 글("고통과 삶")의 § 27-28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을 얘기하면서 이미 우리에게 그렇게 낯설지 않은 진술이다. 앙리는 위의 우리가 인용한 책에서 거의 같은 언어로 그대로 반복한다: "고통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의 불가능성 - 봄, 종-합(syn-thèse),이 -  그것이 수동적이든 아니든 - 전체 안에서 자기와의 간격을 만들면서 자기와 관계하는 것의 불가능성 - 은 따라서 절대적인 실증성의 이면일 뿐이다: ...고통의 수난은 자기 안에서 고통의 용출이며, 고통의 자기에 의한 파악됨이며, 그것의 자기와의 연대이며, 고통이 자기와 일치하는 힘(la force)이다. 그리고 고통의 수난은 이 일치(cohérence)의 꺽을 수 없는 힘 안에서, 이 자기와의 절대적인 동일성 안에서, 자신을 느끼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계시된다. 수난의 계시 - 그것의 현전(Parousie)."(I, 88-89)


자기에 대한 고통의 수동성은 자기에 대한 감정의 무능, 자기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감정, 이런 감정은 자기에 전적으로 잡혀있는 것이다. 앙리가 "숙명(fadeau)처럼 느껴지는, 되돌릴 수 없는 것"(I, 89)이다. 존재하기 위해 자기에 의해 짖눌린 이 자기에 대한 고통의 수동성은 앙리에게 힘과 동일하다. 그런데 이 힘은 인식의 주체로서 파악하는 주체의 힘도, 지배하는 주권으로서의 힘도 아니며, 저항도 아니다. 이 힘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도 아니다. 자기에 낯선 것을 이기고자 하는,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해서 투쟁하고 저항하는 그런 힘이 아니다. 극복해야 할 자기에의 어떤 타자성도 없는 앙리의 이 힘, 이 정감성, 이 이상한 힘, 이 삶의 본질, 이 "감정의 힘은 타자에 대한 규정처럼 그것의 무능과 대립되지 않는다. 전자는 후자에 동일하며, 전자는 후자 안에 자리한다. ...그러한 한에서, 이 창조적인 모음은 무능 안에서, 결국 시련 안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이런 모음은 어떤 행위를 가하는 것도, 자기 자신과 분리된 존재의 찢어짐 안에서 분리된 것을 모으는 것도 아니다. ... 존재의 창조적인 모음은 ...어떤 투쟁, 자기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도 아니다. ...그것은 시련의 절대적인 수동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완성되는 감정 안에는 어떤 부드러움(la douceur)이 있다. La douceur du sentiment est sa force tranquille, la venue silencieuse de ce qui vient en soi, est avec soi, s'éprouve. ...Une telle douceur où l'être vient à lui sans effort, s'éprouve dans la passivité du souffrir dans le sentiment, pénètre tout ce qui est. 감정의 부드러움은 조용한 힘이며, 자기 안에서 도래하는 것의  조용한 도래는 자기와 함께 존재하며, 느껴진다. ... 존재가 노력 없이 자기에 도래하는 이런 부드러움은 감정 안에서 고통받기의 수동성 안에서 느껴지며, 있는 바의 모든 것에 침투한다."(EM, 594-595)


감정의 무능에 대립되지 않는 감정의 힘은 "인상에 찍힌 낙인"처럼, 혹은 "편지봉투에 찍힌 도장"처럼 감정의 무능이 자신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힘, "부드러움"이다. 이 부드러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앙리가 명시하듯 "아주 이상한 예비적인 것(un préalable)", 내재적인 앞섬으로부터만 가능하다: "그것이 이상한 것은, 그것은 인상 전에는 개입하지 않으며, 그것은 지나가지 않으며, 그것은 인상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 qui demeure en elle comme cela même en quoi elle demeure elle-même en soi, 그것은 인상 안에 머문다, 마치 이것 안에 인상이 그 자체로 자기 안에 머물듯이."(I, 89) 이것은 , 이 힘은 바로 앙리가 초월론적이라고 부르는 정감성, 자기를 스스로 느끼는 힘이다.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에서 "고통의 내용은 고통을 자기로부터 떼어내는 것의 불가능성이다"(TA, 55)라고 말했을 때, 이 불가능성은 앙리가 말하는 자기에 대한 감정의 "무능"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불가능성을 우리는 그의 철학의 여정을 여는 글, 『탈출에 대해서』에서 "구역질(nausée)"의 현상에서 그 원형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불안의 신체적 징후인 구역질은 그가 밝히는 고통의 구조와 다르지 않다. 구역질은 제거할 수 있는, 장애물처럼 내 앞에 놓인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붙어있는 것이다: "우리와 구역질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구역질 그 자체이다. 구역질의 되돌릴 수 없음(irrémissibilité)은 구역질 그 자체를 구성한다. 이 피할 수 없는 현전의 절망은 이 현전 그 자체를 구성한다. 이로부터 구역질은 자신을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놓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정립하는 행위 그 자체로서 자신을 놓는다: 이것은 존재 그 자체의 긍정이다. 이것은 자기-자신하고만 관계하며,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창문 없이 닫혀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인력의 중심을 가진다. 이 정립의 토대는 자신의 고유한 실재에 대한 무능 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재 그 자체를 구성하는 이 무능 안에 존재한다. ...구역질의 본성은 자신의 현전, 이 현전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음, 그 무능과 다른 것이 아니다."(DE, 118)


자기 자신의 실재로부터, 자기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없는 이 구역질의 무능, 자기에 대해 거리를 취할 수 없는, 그것을 파괴할 수 없는 고통의 무능 앞에서, 레비나스는 앙리처럼 이 무능의 이면에서 힘을 불러내지 않는다: "구역질 안에, 그것은 우리가 있는 바의 것일 수 없는 불가능성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목을 조이는 듯한  좁은 원 안에 갇힌 자기에 못박혀 있음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으며, 더 이상 아무 것도 해 볼 것도, 우리가 전적으로 보내진 이 사실에 더 이상 덧 붙일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소비되었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이다. 그런데 "더-이상-아무-것도-해볼-것이-없음"은 한계 상황의 표시로, ...탈출하는 것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최상의 순간이기도 하다. 순수한 존재의 경험은  동시에 탈출이라는 내적 대립의 경험이기도 하다."(DE, 116)


결국, 앙리에서 지복(béatitude)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현전은 레비나스에게 현전의 절망, 그가 고독이라고 말하는 존재자와 존재의 떼어낼 수 없음, 자기와 자기의 떼어낼 수 없는 절망으로, 탈출의 욕구만을 남긴다. 이 무능이 힘으로, 복종을 거부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 이해되기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요구된다. 분리와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