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앙리, 고통과 삶(3)
17. 고통겪음(souffrir), 고통을 느끼는 것의 근본적인 수동성에서, 결국 모든 고통의 정조 안에서, 고통이 자기를 회피하는 것의 불가능에서 실현되는 것은 정확히 고통의 자기-자신에 도래(sa venue en elle-même), 고통에 자기에게 주어짐(son être donné-à-soi), 고통의 자기에 의한 파악(son être-saisi-par-soi)이며, 고통의 자기에의 완벽한 연대 안에서, 자기의 획득인 자기의 시험 안에서 고통에 자기에 못박힘(son être-rivé à soi)이며, 자기의 향유 안에서 그리고 기쁨 안에서, 자기 안에서 감정의 솟아남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현상학의 두 번째 정조(la seconde tonalité)가 우리 안에서 발견된다. 고통겪음 안에서, 고통을 느끼면서 삶, 생명이 자기에 이른다면, 그 안에서 자신을 시험하면서, 삶, 생명은 자기를 향유한다. 감정의 무능, 그것의 자기를 버릴 수 없는 무능(impuissance) 혹은 불능, 불가능성은 동시의 감정의 능력(puissance), 혹은 가능성, 즉 삶이 자기와 결합하고, 자기 자신에 밀착하는 이 구성적인 닮음이며, 삶의 자기 안에서의 돌출이며, 삶의 정념적인 도래(Parousie)에서 나타나는 본래적인 현전(présence)의 번쩍임(fulguration)이다. 기쁨은 도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존재 앞에서의 놀라움처럼, 플라톤이 말하듯 놀라움(thaumadzein)의 방식으로, 도래 후에, 오는 것의 도래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긍정적인 정조라고 말해지는 향유하기는 양태화(mdalisation)이며,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 앞에서 정립하는 것과, 어떤 앞에서의 태도와, 사상가의 혹은 철학자의 놀라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향유하기(le jouir), 즐김은 살기(vivre)를 구성하는 "자기-시험(s'éprouver soi-même)"의 초월론적인 가능성에 공-속한다. 이런 이름으로 즐김은 그것이 나오고 그것과 동일한 고통받기와 같은 이름으로, 같은 자격으로 근본적인 현상학적 정조이다. 고통받기와 향유하기, 고통과 기쁨은 그것들의 본래적인 가능성에서, 함께, 분간할 수 없이, 삶의 고유한 현상성, 즉 삶의 혹은 생명의 도래의 실제성(l'effectivité de sa Parousie) 안에서 삶의 현상화의 양태(le mode), 방식이다.
- souffrir = éprouver = subir = supporter, 이 모두는 같은 의미를 가진 말들이다. 견디다, 참다, 겪다, 인내하다, 감내하다. 감수하다, 견디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불행, 불쾌, 고문, 슬픔, 고통, 절망, 등등. 자동사로는 괴로워하다. 고통을 느끼다, 고통을 겪다이다. 고통이 고통의 전적인 따름, 견딤일 경우, 그것은 고통받기이다. 이 단어는 수동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은 ...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어깨를 짖누르는 무게를 견디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support 지지, 바닥에 놓여 있는 것 sous-jacent au fond, hypokeimenon, subjectum이며, 종속 sujétion이다. 무엇인가를 견디기 위해서도 어떤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지는 어떤 종류의 의지인가? 모든 견딤은 시련의 견딤, 시험을 치름을 말한다. 고통은 한계의 경험, l'épreuve de la limite, 한계의 시험, 실행 effectuation이다.
Parousie, 대문자로 쓰인 이 말은 기독교 안에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두 번째 도래, 즉 세계의 종말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의미한다. 어원적으로 이 말은 parousia, 희랍어로, 방문, 현전을 의미한다. 앙리의 fulguration이라는 단어는 glori eux로 읽힌다. 여기서 앙리는 자기-시험, 자기-시련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고통과 향유의 동일성에 대해서 말한다.
- 이 번쩍임이, 이 향유가, 이 기쁨이 철학의 근본적인 정조로서 "놀라움(étonnement, thaumadzein)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레비나스는 철학의 근본적인 정조는 놀라움이 아니라 트로마티즘(trauma et non pas thauma)이라고 말한다. trauma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향유와 고통의 동일성에서만 가능하다.
18. 우리는 삶의, 생명의 자기에의 도래 안에서 고통받기와 향유하기의 단일성을 삶의 "자기-시험"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통받기는 향유하기이다. 왜냐하면 고통받기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삶의, 생명의 자기에서 주어짐이 완성되기 때문이며, 이 고통받기의 현상학적인 실행(effectuation)은 이 향유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향유하기는 이 향유하기의 향유가 고통받기의 자기-시험 안에서 실현되는 한에서 다만 그것 안에서 그러한 한에서 자기 안에서 이 고통받기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각할 수 있는 살기의 현상학적인 촉발성(affectivité) 안에서 고통받기와 향유하기의 친근성(affinité), 차라리 동시성(contemporanéité)이 알려져 온다.
- 고통의 견딤, 고통 이후에 도래하는 삶, 생명의 자기에의 도래, 자기의 실현, 완성은 기쁨이다. 그래서 앙리는 고통받기의 수동성, 부정적인 정조는 향유하기의 능동성, 긍정적인 정조와 동시적이라고 말한다.
19. 삶의 본래적인 본질 안에서 고통받기와 향유하기의 동시성은 촉발성의 이원성을, 다시 말해 우리의 실존의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정조들 사이의 수수께끼 같은 분할을 설명한다. 부정적인 것, 그것이 제시하는 다양한 뉴앙스들 - 고통의 극단의 형태들에서 드러나는 불쾌, 불만, 불안, 수고, 견딜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절망 - 이 그것들의 현상학적인 가능성을 삶의 시험(l'épreuve de la vie)에 공-속하는, 원초적인 고통받기(souffrir primitif)에서 발견하듯이, 긍정적인 것도 전자와 같은 방식으로 만족, 쾌, 즐거움, 행복 그리고 최상의 즐거움(béatitude)과 같이 여러 양태화 안에서, 전자와 마찬가지로 삶이 자신의 충만한 현전 안에서 스스로 시험하는 삶의 원초적인 향유하기(jouir primitif) 안에 그 자신의 뿌리를 가지며, 삶의 자기에의 도래가 완성되는 다양한 방식들일 뿐이다.
- 생명이, 삶이 자기에 도래한다는 것은 탄생을 말한다. 태어나기. 카프카는 "Ma vie est hésitation devant la naissance, 나의 삶은 탄생 앞에서 머뭇거린다"라고 말한다. 앙리에게 이 머뭇거림이 있는가? 그를 읽으면서 나는 항상 묻는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 머뭇거림, 켜지고 꺼지는 단속적인, 불연속의, 저 멀리 하늘의 별빛의 간헐적인 반짝임과 같은 주저이다. 부재와 현전의 중단 intermittence이다. 레비나스에게 촉발성은 되돌릴수 없는 것, irrémissible, irrémittente이 아니라, 중단적 intermittente, 간헐적, 주저이다. 고통은 삶의 자기에의 도래, 자아의 개체화, 동일화이면서 자아의 탈개체화, 탈동일화이기도 하다.
20. 그런데 이 모든 다양한 정도들로부터 현상학의 질서에 속하는 하나의 어려움이 생겨난다. 만일 우리가 이 정조들의 이원적인 짝, 예를 들어, 고통과 쾌를 고려할 때, 우리가 그것들이 자신을 시험하는 그 방식들을 그 자체로 파악할 때, 이것들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어떻게 고통과 즐거움 같은 대립된 두 정조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기원, 삶의 현상학적인 유일한 본질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가?
21.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 대립은 사람들이 고통을 피하려고 하고 쾌를 찾으려고 인간의 행위를 동기지울 정도로 아주 결정적이다. 이 노력은 욕망의 아주 직접적인 기획 위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며, 이 둘 사이의 긴장은 필요와 관련된 불만을 만족으로 변형하고, 부정적인 정조를 긍정적인 정조로 대체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22. 그런데 이제 위에서 제기된 반대는 사라진다. 우리가 매 촉발적인 정조를 분리되고 독립된 것으로 고려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각각의 정조가 그 반대의 것으로 변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고통이 행복에 이르는 지를 알 수 없게된다. 인간의 가장 하찮은 욕망에서 인간의 행위 일반에 이르기까지 거기서 발견되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은 우리 자신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고정된 정조들의 합이 아니라,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끝없는 이행이다. 이 이행을 이제 설명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행복은 유리와 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부터, 그 자체에 의해 그 반대인 불행으로 변할 수 있는 선험적이고 초월론적인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변형,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실존 안에 삶의 의지의 저하 혹은 우울증(dépression)이 도래할 경우, 그것의 이유와 동기를 어떤 내상(트로마티즘) 안에서 찾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것에 작용을 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실존 안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형은 이 실존 안에 원리적인 가능성으로 기입되어 있다. 이 원리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떻게 고통은 즐거움으로 변할 수 있으며, 행복은 끊을 수 없는 한 없는 슬픔으로 변할 수 있는가?
23. 고통은 기쁨으로 변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원초적인 고통받기로부터 모든 형태의 고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원초적인 고통받기 안에서 자기에 대해 근본적인 수동성 안에서 삶은 자신을 감내하고 견딘다 - 바로 이 원초적인 고통받기 안에서 삶은 자기를 소유하며 자기를 시험하고 향유하기의 향유 안에서 자기를 향유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형태의 행복은 고통으로 변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자기를 향유하는 것은 이 삶이 자기에 도래하는, 그리고 잠정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여는 고통받기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받기와 향유하기의 최초의 놀이 안에서 우리가 우울증 혹은 삶의 의지의 저하(dépression)라고 부르는 것이 태어난다. 그리고 이 우울증이 극복되는 것은 이 놀이 안에서이다. 만일 우리가 보다 가까이 삶의 현상학의 수수께끼 같은 법칙들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고통받기와 향유하기의 이 본래적인 관계를 심화해야 한다. 이 법칙들의 손 안에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걸려있다. 이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극단적인 형태에서 우울증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우울증은 절망의 옷을 입고 드러나며, 모든 우울증은 그것의 근저에서 절망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 전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키에르케고르의 탁월한 『절망에 대한 소고』를 우리는 고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