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과 지식

데리다, 믿음과 지식(24)

aurorepark 2010. 8. 29. 14:57

24. 만일 우리가 이 접경지대 lieu limitrophe의 안과 밖을 동시에 질문하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가 내적 설명(신앙, 종교, 언어 혹은 문화 그 자체의 역사 안에서의 설명)에 만족 한다면, 만일 우리가 이 안과 명백한 외적인 영역 사이의 (기술과학, 텔레-비오테크놀로지, 다시 말해 정치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등등) 이행의 장소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스람"의 열풍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과 아브라함적인 계시를 가로지르는 존재-신학-정치적인 전통을 모두 질문하면서, 안으로부터 혹은 그 안에서 작동하고 저항하는 밖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부터 아마도 여기서 아직도 저항하는 것에 대한 체험, 여기서 항상 저항할 것에 대한 시험 혹은 체험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코라 khôra, "코라의 시험"1은, 적어도 내가 시도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해석을 따라서 보면, 장소의 이름, 장소의 어떤 이름이며, 그것은 단독적인 것을 형성하며, 어떤 신학적인, 존재론적인, 혹은 인류(인간)학적인 계기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공간화 혹은 거리내기 espacement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 나이도 없고, 역사도 없고 그리고 모든 대립(예를 들어 감성적/지적 대립)보다 더 "오래된" 이 공간화는 부정의 길을 따른 "존재 너머"로서 자신을 알리지도 않는다. 이로부터 단번에 코라는 절대적으로 모든 역사적인 계시 혹은 인간학적-신학적 경험의 모든 과정에 전적으로 이질적이며, 통할 수 없는 것(지나갈 수 없는 것)으로 남으며 impassable, 이 모든 것의 추상(분리)을 전제한다. 코라는 절대로 종교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로 자신을 성화, 신성화, 인간화, 신학화, 문화화, 역사화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살아남은 것과, 성과 성적인 것과 낯선 코라는 절대로 구해지는 것, 살아남아 보상받는 것 indemniser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재에서도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코라는 자신을 절대로 현재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도, 선도, 신도, 역사도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에 항상 저항할 것이다. 그것은 무한한 저항의, 절대로 지나갈 수 없는 남아있는 것 restance의 장소 그 자체로 남을 것이다 (어떤 전미래도, 신앙 없이, 법 없이는 코라를 자기화할 수도, 굽게 할 수도, 혹은 반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얼굴 없는 전적인 타자 un tout autre sans visage.


- 코라, 플라톤의 <티메>의 52에서부터 전개하는 이것은, 존재와 생성, 즉 영원한 것, 부동하는 것과 사라지는 것, 그리고 이 둘이 아닌 제 삼의 것으로 코라 즉 장소 lieu를 다룬다. 데리다는 여기서 무한한 저항의 장소, 절대로 지나갈 수 없는 남아있는 것, 얼굴 없는 전적인 타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데리다에게 주체의 자리와 관계할 것이다.


- espacement, 공간화, 혹은 자리잡기, 그로부터 간격내기, 거리내기가 생겨난다.


- 여기서 데리다는 그 단어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코라의 시험, l'épreuve de khôra>라고 말할 때, 그 단어, <schibboleth> 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아주 어려운 시험, 한 사람의 운명을, 생명을 결정하는 아주 어려운 시험을 의미하는 이 말은 구약의 판수기 12장 6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길리앗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던 에브라함 사람들이 도망치다 그들에게 잡힐 경우, 그들은 쉽볼렛이라고 발음해보라고 해서 그가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그를 요르단 강에 내어던져 죽였다고 전한다. 이 말, scibboleth, 이 은밀한, 비밀스런, 불법적인 말은, 일종의 표지로, 서로 알아보고, 모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 impassable, 지나갈 수 없는, 거널 수 없는, 통과할 수 없는, 번역될 수 없는, 자기화될 수 없는, 잊혀질 수 없는, 그래서 여전히 남아있는 그런 상태를 지시한다.


  1. 원주) Sauf le nom, p. 9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