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과 지식

데리다, 믿음과 지식(8)

aurorepark 2010. 8. 23. 15:18

8. 빛이 있었다. 그리고 날이 있었다. 우리는 태양의 광선과 지형학적 기입의 동시성을 절대로 분리하지 않는다: 종교의 현상학, 현상학으로서의 종교, 나타남의 지형학에서 동양의, 해가 뜨는 곳의, 지중해의 신비. 계시적 언술에서 혹은 계시성, 즉 현시의 가장 원천적인 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언술에서 만큼 철학적인 언술에서, 기원 arkhè이 언술을 명령하고 시작하는 곳 어디에서나, 빛(phos)은 동기 일반 (빛 phos, 현상 phainesthai 이미지 phantasma, 이어서 유령 spectre 등등)을 제공한다. 가장 원천적인, 다시 말해서 가장 기원에, 유일하며, 동일한 근원에 가장 가까운. 어디에서나 빛은, 예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순진하게 종교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게다가 그것에 대립된다고 믿는 것을 명령한다. 그 사실로부터 미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계몽, Aufklärung, Lumières, Enlightenenment, illuminismo). 다음의 사실을 잊지를 말자: 벵베니스트가 지적하듯이, "종교 그 자체, 제의, 제사장, 인격적인 신들을 지시하는" 어떤 공통의 용어도 없을 때조차, 인도-유럽어는 이미 "신, 그것의 "고유한 의미"가 "빛"과 "하늘"인 그러한 신(deiwos)의 개념"1 위에 모여진다.


-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에서 혹은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 빛의 은유는 원초적인 기원을 지시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말해진다.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이 빛의 은유를 문제 삼는다. 벵베니스트는 보증을 가지고 말하는 이러한 빛과 연관된 신의 개념에 대한 언술에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빛과 그것의 대립에 대한 사유로, 종교와 철학, 계시와 이성, 믿음과 지식의 대립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1. 원주) 에밀 벵베니스트, Les vocabulaires des institutions indo-européennes; Paris; éd. de MInuit, &1969; t. 2, p. 180. 우리는 여기서 특히 태양과 빛의 경우에 또한 다른 것들에 대해서 확실성을 가지고 그것의 고유한 의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기 위해 자주 벵베니스트를 인용한다. 이 보증은 대단히 과장적이며, 더욱이 문제적이기도 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