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반한 사회

aurorepark 2010. 8. 6. 01:08


           PIERRE ClASTRES: La société contre l’État(1974)

탁월한 정치학자, Miguel Abensour의 책을 읽다가, 한 철학자, 인류학자를 알게 되었다. 교통사고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그 때 그의 나이는 단지 43세였다) 혹자는 아니키스트로 부르기도 하는 피에르 클라스트르 (1934-1977)의 74년 저작 <국가에 반한 사회>, 남미의  아마존 주변의 인디안들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 이후 나온 것으로, 그 저작이 제기하는 혁명적인 문제 제기는 오랫동안 침묵에 갇혀있었다. 69년 잡지 Critique 에 실린 <코페르니쿠스와 원시인들 Copernic et les sauvages>은 이 책의 첫 장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책의 11장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국가에 반한 사회>이다.


우리는 주 종류의 인간의 사회를 구별할 수 있다: 국가 없는 사회와 국가라는 형태의 사회. 일반적으로 후자는 전자로부터 발전한 형태로 인류학자들에 의해서 기술된다. 또한 전자의 형태가 무엇인가가 결핍된, 불완전한 사회로 기술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가 없는 사회에서 국가가 발생하는가의 문제가 합법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클라스트르의 문제제기는 바로 여기에 자리한다. 그리고 국가 없는 사회는 불완전한, 결핍된 정치적 형태인가를 물을 수 있다. 남미의 인디안들을 연구하면서 그는 <국가 없는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그리고 그 사회에서 정치적인 권력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형태가 현재의 정치적인 문제에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는지, 국가 없는 사회가 현재에 어떻게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개의 글을 읽으려고 한다. 우선 그의 저작 <국가에 반한 사회>의 1장과 11장을 읽을 것이다. 그 전에 이 책이 출판된 해에 인터뷰를 읽을 것이다. 그리고 76년 한 잡지에 실린 <원시 사회에서 권력의 문제>를 읽을 것이다. 


그의 정치와 권력에 대한 질문은 그가 코페르니쿠그적인 전향이 필요하다고 말하듯 이전의 인류학자들의 연구의 관점의 전향을 요구한다. 그의 연구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연구가 권력에 대한 푸코와 들뢰즈의 관점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 (지배적인 강제적인, 명령과 복종의 메카니즘으로서의 권력이 아닌 권력) 때문이다.  이로부터 정치와 권력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어질 수 있다. 물론 나의 독서는 아벤수의 독서의 연장이다. 세세한 독서 전에 <국가에 반한 사회>의 1장의 몇몇 구절을 옮겨논다.



< 우리는 사회를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권력의 사회와 권력이 없는 사회. 우리는 (인류학적 소여에 일치해서) 반대로 정치적인 권력은 보편적이며, 사회에(그것이 피로 연결된 사회이든 혹은 사회적 계급으로 연결된 사회이든지 간에) 내재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개의 근본적인 양태로 실현된다: 강제적인 권력과 비 강제적인 권력.


강제로서의 정치적인 권력 (명령과 복종의 관계)은 진정한 권력의 모델이 아니라, 한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서양의 몇몇 문화의 정치적인 권력의 구체적인 실현일 뿐이다. ... 따라서 이것을 다른 것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로서 취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정치적인 제도가 부재하는 사회에서 조차 (예를 들어 추장이 부재하는 사회에서 조차) 정치적인 것이 존재하며, 권력의 문제가 제기된다: ... 만일 정치적인 권력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본질적인) 필연성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라며 (바로 여기가 니체가 실수한 곳이다), 반면에 그것은 사회적인 삶에 내재하는(본질적인) 필연성이다. 우리는 폭력 없는 정치를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정치 없는 사회를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권력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코페르니투스적인 혁명이다. 현재까지, 일단의 관계 하에서 인류학은 원시적인 문화를 서양의 문명을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관점의 전적인 전복이 필요하다. 이것은 바로 정치적인 인류학이 우리에게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고향의 끌림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유의 수직적 자유로 고양하기 위해서, 사유가 발담고 있는 자연적 명증성으로 자신을 떼어내기 위해서, 권력에 대한 반성은 태양중심의 전복을 행해야 한다: 이러한 반성은 아마도 타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 자신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될 것이다.>(<국가에 반한 사회>, 1장, p.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