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과 지식

데리다, 믿음과 지식(1)

aurorepark 2010. 8. 1. 22:23

데리다의 글 중에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또한 가장 어려운 책으로 책상에 눈에 띠는 곳에 항상 있는 책, 가끔 생각나면 한 절씩 읽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믿음과 지식: 단순한 이성의 한계에서 종교의 두 기원, Foi et Savoir, Les deux sources de la "religion" aux limites de la simple raison>(1996)이라는 길지 않은 글 (정확히 100페이지)이다. 이 글의 제목을 보면, 200년 전에 헤겔이 쓴 <믿음과 지식>, 그리고 그 전에 칸트가 쓴 <단순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상기시킨다. 칸트와 헤겔. 이 책은 2000년 <르몽드>지에 발표된 대담, <시대와 용서, Le siècle et le padon)가 그 뒤를 잇는다. 이 글을 다시 읽으려고 한다. 이 글은 절마다 번호가 붙어있다. 52번까지 적혀있다. 하루에 한 절씩 읽으면 52일이 걸릴 것이다. 사실 한 나절이면 끝날 수도 있는 분량의 책이다. 그런데 한 나절에 읽기에는 그 책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Foi et savoir

           Jacques Derrida, Foi et savoir, Paris: Seuil (coll. "points essais"), 2000(1996).


1절부터 26절까지는 <Italiques>라는 제목이 붙어 이태리체로 적혀있다. 27절에서 52절까지는 <Poste-scriptum> 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나는 현재로서는 모른다. 다만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1. 종교는 어떻게 말을 하는가?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가? 오늘날, 종교에 대해서 단수적으로  종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오늘날 두려움과 전율 없이 단수로서의 종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아주 조금, 아주 빨리? 누가 동일화할 수 있고 새로운 주체가 여기서 문제라고 신중하지 않게 주장하는가? 누가 여기서 몇몇 난제들을 정돈할 전제를 가지는가? 용기, 오만 혹은 필수적인 침착함을 위해 아마도 한 순간 모든 것과의 혹은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추상(abstraction), 어떤 추상을 가장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가장 구체적인 것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에, 그런데 또한 추상들 중에 가장 사막같은 것에 내기를 걸어야 하지 않는가? 


추상에 의해 혹은 추상으로부터 도망쳐야(se sauver, 자신을 구원해야) 하는가? 구원(salut)은 어디에 있는가? (1807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 Wer denkt abstrakt ": " Denken? Abstrackt? - Sauve qui peut! "(누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가: 사유? 추상? -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모든 힘을 다해) 도망쳐라!) - 먼저 불어로 읽는다, " Rette sich, wer kann " 이 외침에 대한 번역으로 -  도망치고자 하는 이 배신자에 대해, 유일한 이 운동에 대해 그리고 페스트 같은 사유와 추상과 형이상학에 대해서.)   



- 우선 데리다가 말하는 1807년의 글은 무엇인가? 1807년, <정신 현상학>이 발표된 해이기도 한 같은 해에 헤겔은 신문에 글을 하나 실른다. <누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가?> 이 글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Denken? Abstrakt? - Sauve qui peut! Rette sich wer kann! So höre ich schon einen vom Feinde erkauften Verräter ausrufen, der diesen Aufsatz dafür ausschreit, daß hier von Metaphysik die Rede sein werde. Denn _Metaphysik_ ist das Wort, wie _abstrakt_ und beinahe auch _Denken_, ist das Wort, vor dem jeder mehr oder minder wie vor einem mit der Pest behafteten davonläuft. 이 글에 대한 불어 번역은 여럿이다. 그 중의 하나를 옮기면 (E de Dampierre의 번역) 다음과 같다: Penser? Penser de façon abstraite ? Sauve qui peut ! J’entends déjà crier ainsi quelque traître, soudoyé par l’ennemi, qui va clabaudant contre cet essai parce qu’il y sera question de métaphysique. Car métaphysique - tout comme abstrait, et même penser - est un mot devant lequel chacun, plus ou moins, prend la fuite comme devant un pestiféré.  


"사유? 추상적으로? 도망칠 수 있으면 해봐라! 여기에 이미 적에게 팔린 배신자의 외침이, 이 글을 비판하는 외침이 들린다. 왜냐하면 여기서 제기하는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형이상학, 추상으로서의 모든 것, 거의 사유와 동일시되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페스트처럼 도망치는 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 추상 abstraction에 대해서, 추상은 구체에 대립되는 것으로 분리의 능력을 말한다. 추상을 말하면서, 단수로서의 종교를 말하면서 -  la religion, non pas les religions - 추상에의 의존을 말하면서, 데리다는 헤겔에의 추상에의 경계를 끌어온다.


- se sauver, salut, sauf에 대해서, sauver는 불어에서 생명을 구하다, 라는 뜻이다. se sauver라고 하면 위험으로부터 피하다, 혹은 도망치다, 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는 종교에서 구원하다, 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의 명사형은 salut이다. salut는 또한 가까운 아주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인사, 영어에서 hi정도에 해당되는 인사이기도 하다. sauf/sauve는 형용사로 죽음과 같은 극단의 위험으로부터 구해진, 이라는 형용사이다. sain et sauf라고 하면, 어떤 위험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경우를 말한다. 이 세 단어는 데리다의 글을 읽으면서 자주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