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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탈출자, 위반의 사유, 소외, 헤겔의 마트리스

aurorepark 2010. 7. 28. 19:08

소외의 개념이라는 끈을 연결하고 끊는 몇몇 매듭을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헤겔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헤겔의 철학의 체계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의 여러 텍스트가 불려질 수 있다. 우선 로마 제국에서의 최초의 역사적인 형태의 소외를 말하는 그의 <역사철학>을 들 수 있다. 이어서 이 문제는 다시 <법철학>에서 소유와 계약에서 말해진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인간의 권리는 사적 인간의 지위와 사적 소유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소외는, 또한 <젊어서의 신학적인 글쓰기>에서 여전히 그 말의 일상적인 의미에서, 즉, 불행으로 말해진다. 이 불행은 헤겔이 유대적인 유형에 부여한 것으로, 절대적인 초월성, 혹은 유한과 무한의 분리, 외재성, 저 밖, 저 멀리 있는 것이 피조물을 억압하고 으깨는 것으로부터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낯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신도 이방인이 된다. 텍스트들 중에 가장 풍요로운 텍스트는 <정신 현상학>일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불행으로서 소외뿐만 아니라, 의식이 정신의 삶에서 자신을 형성하고 자신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외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외재화의 과정인 객관화라는 이중 기입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 현상학>에서 소외는 비극적인 상처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직접적인 것에서 매개로 이행하는 논리적 이행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분열과 매개를 지시한다.


맑스로 돌아가기 전에, 반-헤겔주의로서 포이에르바흐를 읽는 맑스로 돌아가기 전에 앞서 언급한 것들을 상기하자.


헤겔은 로마 제국을 소외의 최초의 역사적 형태로 간주한다. 보편성과 단독성, 무한과 유한, 실체와 자기의식 사이의 관계는 이 안에서 법제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은 헤겔의 이상화 안에서 드러나는 그리스 시대의 폴리스와 달리 국가와의 다양한 관계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된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이 "외적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서 자신을 전개하기 위해 아테네에서 와는 달리 시민들과 관계하지 않으며, 개인들과 관계한다. 그리고 이 영역 안에서 개인들의 자유는 그들의 존재를 외재화하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개인들은 소유의 실존 안에서 자신을 객관화해야 한다.1 법의 탄생: 로마법은 모든 법의 모태(matrice)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의 정신 없는 보편성"2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유법으로서의 법의 탄생: 모든 법은 그 근저에서 그것의 일방성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필연성에서 소유법이다. 로마제국에서 개인들은 소유와 다른 객관적인 실존을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는 그들에서 낯선 것이 된다. 개인들과의 관계는 소유들 사이의 관계의 구성(법)으로서 국가 안에서 사라진다. 헤겔은 사실 소유이면서 나에게 고유한 이것에 주의한다. 여기서 헤겔이 나에게 고유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나에게 외적인 것에서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유한 것과 개인 사이의 관계는 우선 로마법의 의미에서 법적 개인이 자기 의식의 소외라는 개념, 즉 외적인 것에서 일어나는 것을 제공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법의 발전 안에서 정신은 자신에게 낯선 것이되는 이 과정은  역사 그 자체의 가능성을 결정한다. 정신은 자신의 작업에서 살아있으며, 정신은 스스로를 만드는 것에서 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성(effectivité, 실제성) 혹은 현실(la réalité), Wirklichkeit는 정신이 주어지는 정신의 작업(oeuvres, Werke)이며, 예를 들어 윤리적인 현실성, 즉 전체의 실제적인 도덕 안에서 정신의 자기는 세계가 된다. 포이에르바흐와 젊은 맑스의 모든 비판은 이 주장 전체를 뒤업는다. 주어와 술어를 뒤집으면서 그들은 정신과 자기의 산물 사이의 전복3을 전복하고자 한다. 헤겔이 소외 안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개념의 요구"는 의지의 "계기"가 소외의 장소가 될 것을 요구한다. 나의 의지는 경험적인 실존을 유지하기 위해 소외된다. 그리고 "소외된 나의 의지는 다른 의지가 된다"4. 소외는 이중적으로(Verdoppelung)5 작용한다. 주체의 두 겹, 주체의 이중성, 그것은 타자의 이중성, 자기에게 타자가 되는 것, 두겹으로서의 타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좋은 소외(필연)와 나쁜 소외(불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것, 젊어서의 신학적인 글들은 이것을 기술한다. 현상학의 불행한 의식의 장도 이것을 기술한다. 이 소외는 죽음을 유발할 뿐인데, 그것은 자기 위에 고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제 3의 항이 없는 항들 간의 대립은 공하한 반복의 비산출성에 이를 뿐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젊어서의 신학적 글들에서 기술되는 유대주의의 모습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이러한 분리를 생각하게 한다. 다시 말해 신-전지, 신-주인에 반대되는 신-정신이라는 쌍이 그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계시하는 것 안에 전적으로 내재적인 것과 달리, 무한, 초월, 무한히 초월적인 외재성과 이 무한히 낯선(Fremd) 무한의 힘에 의해 으깨진 유한 사이의 분리는 아무 것도 산출하지 못하는 공허한 분리로 생각된다. 철학사에서 칸트주의는 여기에 해당된다: 칸트의 이율배반에 대한 성찰, 사유의 한계에 대한 사유, 극복되지 않는 것이 지니는 지속-인내에 대한 사유, 흔히 이원성이라고 말하는 것, 비변증적인 사유. 이 모든 것은 정획히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내재화하는 의식인 불행한 의식에 정확히 일치한다. 이 관계에서 의식은 자신이 대립하는 절대적인 타자, 주인에서 소외되며, 이중화 안에서 다시 고착된다.6 


의식화된 분리는 모든 경우에 필연적으로 극복되어져야 한다. 타자 안에서 자기의 전적인 상실을 지시하는 불행한 소외는, 판매로부터 유래하는 소외나 계약적 소유의 탈취와는 달리, 재이중화, 즉 외재화 안에서 이중화한다. 여기서 변증법적으로 외적인 것에 의한 낯섬은 사라진다. 여기서 운동은 다시 한번 정신의 것이다: "자기 자신 안에서 소외되는 것을 정신은 실제적으로 즉 보편적으로 획득한다."7 "자기 자신에게 낯선 정신"8은 하나의 과정으로, 이 과정 안에서 장신은 자기 소외 안에서 자신을 형성한다. 문화 혹은 형성은 정신의 자기 자신과의 매개의 계기이다. 여기서 정신은 자기-자신에게 낯선 것이 된다. 즉 자기(le Soi)에 의해 자신의 자연적인 것과의 분리(Entfremdung)의 계기이다. 정신은 다만 자기 밖으로, 즉 여전히 자연적인 현존재의 밖으로 던져진 것일 뿐만 아니라, 이 밖으로 던져짐은 정신에게 뿐만 아니라 현존재에게 자신의 끝-목적(fin, Zweck)9이다. 문화 안에서 정신은 자기형성의 계기를 지속하며, 자기-자신을 마치 단독적인 자기(Soi singulier), 자기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각각의 자기는 자연적인 자기를 제거하는 한에서 실제적인 자기가 된다. 이러한 지양의 길은 보편의 길이다. 


따라서 자아는 자신의 소외 안에서만 실체를 가진다. 헤겔이 말하듯, 자신에게 부분적으로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낯선 것이 되면서 자아는 인간과 세계의 예비적인 통일성(단일성, unité)의 부서진 한 부분, 즉 고유한 것과 낯선 것 사이의 이중화, "실제성의 세계(le monde de l'effectivité)", 즉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와 의식 그 자체 사이의 분리(Spaltung; Entzweiung)10를 산출한다. 이러한 이중화들의 지평에서, 사실과 가치 사이의 분리 - 우리가 보통 한편으로 가치가 아닌 본질과 다른 한편 실제적이 아닌 실존이라고 말하는 분리 - 를 산출한다. 헤겔에게 프랑스 혁명의 위대함은, 그것을 특징지우는 파괴적인 폭력을 넘어서, 그가 "절대적인 자유"11라고 부르는 것, 즉 자기에의 소외에서 자신으로 돌아오는 운동을 산출하고자 했다. 역사는 이러한 대립의 끝없는 극복으로 유지된다. 헤겔에게 정신은 정신의 역사이며, 역사는 역사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외는 따라서 과정, 역사, 운동, 자기운동,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자기형성, 문화이다. 인간이 산출하는 모든 것은 동시에 객관화된 산물들이다: 작품, 문명, 종교, 제국 그리고 이러한 산출 자체, 이러한 형성 자체, 이러한 활동은 개인, 개체가 자기의 부정, 소외, 상실을 통해 보편성으로 고양하는 것이다. 형식들 전체를 구성하는 이러한 모든 것에 의해 주체는 실체적인 현실(réalité)로 된다.


결국 여기는 헤겔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만일 자기형성의 과정으로서 정신이 작품으로 주어진다면, 그리고 이 작품 안에서 정신이 객관화된다면, 이 객관화의 전제가 있을 것이고, 정신화의 과정에 따라서 소외가 스스로 소외되는 계기12가 있게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화에 의해서 상실은 자신의 개념 안에서 자신을 다시 취하고, 상실의 상실은 해방을 의미할 것이며, 의미를 전달할 것이다. 그 의미는 정확히 다음의 것이다: 붕괴와 재획득, 불행과 인정, 외재화와 기억을 통한 내재화. 해방은 이 때에 작품의 실현을 통한 자신의 인정에서 정신의 고양을 의미할 것이다.


헤겔이 자신의 손으로 써서 자기에게 바친 자기의 초상화가 존재한다:"unsere Kenntnis soll Erkenntnis werden - wer mich kennt wird mich hier erkennen". (우리의 인식은 재-인식(인정)이 되어야 한다 - 나를 인식하는 자는 여기 지금에서 나를 재-인식(인정)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현실태의 시간에 접근하는 양태로서 '인식하다 connaître, erkennen'는 항상-이미 '재-인식하다 re-connaître'이며, 단순한 '인식하다 kennen'를 넘어서 보다 능동적이고 보다 많은 것을 약속한다. 독일어에서 관계적인 의미로서 그리고 사회적 형식들의 나눔의 질서로서 'anerkennen, reconnaître 인정하다'라는 동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유일한 인식은 인정으로서 도래해야 한다. 인식은 단순한 직접적인 인식의 변형을 구성한다. 인식하다, 그것은 이 단어의 속어적 사용이 지시하듯이 '해방하다'를 의미한다. 해방의 주제는 소외에 대한 맑스의 읽기의 중심을 이룬다. 또한 이것은 맑스가 "쥐가 갉아먹는 것 같은 비판"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해방의 주제는 헤겔에서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형식들과 계기들을 요청하지만, 그것은 사건들과 관계하지 않는다. 정신은 사건들을 알지 못한다. 정신은 그에게 도래할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 바로 이 이유로 인해 그에게 아무 것도 도래하지 않는다. 정신은, 메를로-퐁티가 이끌어낸 것처럼, 그가 자신으로부터 실행하는 작동들 안에 존재한다. 모든 사건은 따라서 정신의 어떤 형식(모습)과 관계하며, 모든 사건은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도래한다. 실제적인 해방을 위한 인간들의 투쟁, 인간들의 조건들에 대한 실제적인 해방은 물론 헤겔을 비켜가지 않는다. 이것은 헤겔이 혁명적인 의식의 계기와 관계시키는 것이가도 하다. 이렇게 그는 혁명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다시 말해 그는 혁명을 그것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포함하는 어떤 운동 안에 위치짓는다. 이 운동은 맑스에 의해서 지적되듯이, 사변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역전될 수 있는 어떤 결과를 함축한다. 몽테스키으13의 표현을 따라서 헤겔이 귀족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의식은 의식의 객관적인 계기로서 국가의 권력과 부에 대립한다. "덕성은 보편적인 것을 위해 단독적인 존재를 희생하며, 덕성은 단독적인 존재의 고유한 목적들과 그의 실존과 그의 특수한 내용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14." 천박학(vile)의식은 자신의 불만족스런 순수한 부정성 안에서, 자신의 무한한 혁명(반항)과 아이러니 안에서 길러지고 고양된다. 권력과 부, 그리고 종교까지 모두 벌거벗겨진다. 그들의 거짓말은 비난되고, 세계는 소외된 세계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 소외는 자기의식 안에서  다시 취해지는 소외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헤겔에게 "계몽"의 한계로 드러나는 이 혁명적인 의식의 한계는 거부의 실체화에, 실제적인 내용들로부터 소외된 순수하고 단순한 형식들의 거부에, 유한한 대상들의 무한으로의 환원에 자리한다. 반대로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이 표상들을 개념의 권위로 고양하는 것이다. 헤겔에게 철학, 그리고 맑스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이 철학은 바로 이것(개념) 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 혁명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표상되는 절대적인 자유는 부정적인 자유이며, 모든 소여와 상관없는 자유이며, 스스로 소외되는 것과 아무런 공감도 없는 자유이며, 이것은 구체적인 보편성에의 접근을 여는 데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그리고 단독자와 추상적인 보편의 죽음의 융합 안에서 고착된 것으로 드러난다.




  1. 헤겔, <법철학의 원리들>, Vrin, p. 101. [본문으로]
  2. 헤겔, <현상학>, p. 333. [본문으로]
  3. 법철학, Philosophie du droit, § 66. [본문으로]
  4. 법철학, § 73. [본문으로]
  5. 정신 현상학, p. 165. [본문으로]
  6. 정신 현상학, p. 165. [본문으로]
  7. 정신 현상학, p. 333. [본문으로]
  8. 정신 현상학, 정신의 장, VI, Bildung 참조. [본문으로]
  9. 정신 현상학, p. 333. [본문으로]
  10. 정신 현상학, p. 332. [본문으로]
  11. 같은 책 같은 곳, [본문으로]
  12. 정신 현상학, p. 335. [본문으로]
  13. 정신 현상학, p. 337. 이 질문과 관계하는 헤겔의 페이지들은 아주 프랑스적이다. 그는 예를 들어 혁명을 말하면서 <하모의 조카>를 예로들고 있다. [본문으로]
  14. 정신 현상학, p. 34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