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탈출자, 위반의 사유, 소외, 정신의 작동
이 책은 길지 않은 책으로 189쪽이다. 본문은 맑스의
중심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외
모순
혁명
형식들의 분석
그리고 결
론이 있다.
<소외>는 작은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소한 소외는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계속 읽을 만하면 계속읽을 것이다.
소외
정신의 작동
나는 맑시즘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서로 대립되는 이론화들과 대상화들, 그
근본에서 서로 대립된 적대적인 정치적인 입장들과 연관된 이 질문의 논쟁을 다시 재구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과 가치를 가지는 이 문제에 수 천 페이지가 바쳐졌다. 나는 여기서 다만 1845-46년에1 문제의 대상이 된 이 개념의 거부로부터, 왜 소외가 맑스의 눈에 “이전의 의식 철학”의 중심적인
모범(paradigme)으로 보였는가를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큰 발을 띠어서 이 포기로부터 행위로서의 탈출에
이르는 -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분간할 수 있고 머물 수 있는 위상학적인 장소에 이르는 것이 아닌 - 길을 다시 만들고자 할
것이다.
나는 메를로-퐁티의 아주 의미 있는 한 텍스트로부터, 즉 맑스 앞에서, 이
경우 프랑스 철학이라는 어떤 상황과 연관된 그리고 그 철학의 질문의 지위와 연관된 한 텍스트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역사적인 유물론은 역사의 여러 영역들 중의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과 외재성, 주체와 대상 안의 주체의 소외를 근거 짓는 대상 사이의 연대에 대한 언표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 운동을 전복하면, 유물론은 세계와 인간의 재통합을 근거질 것이다. 헤겔에게 소외가 여전히 정신의 자기에 대한 작동이며, 소외가 드러남과 동시에 극복되는 반면에, 맑스의 새로움은 이 사실을 마치 원초적인 사실로 취한 것이다. 맑스가 자신이 변증법을 자신의 발아래 재정립했다고 말했을 때, 혹은 그의 변증법이 헤겔의 것과 정반대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문제는, 마치 변증법이 헤겔에 의해 정신에 속한 기능들의 자연적 상태를 수용하는 것처럼, 정신과 역사의 물질의 역할의 단순한 자리바꿈이 문제가 아니다: 물질적인 것이 되면서, 변증법은 무거워져야 한다.2
메를로-퐁티는 소외와
변증법의 지위를 아주 긴밀히 연결시킨다. 두 질문은 사실 서로 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나 알튀세처럼 방법론적인 불충분성
때문에 그 전복을 비판하는 대신에, 그는 맑스의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 따라서, 소외가 문제가 되는 경우 그 전복의 타당성을
강조하면서 맑스의 글자 그대로를 강화한다. 메를로-퐁티는 무엇을 정립하는가? 맑스는 변증법을 그것의 모든 세계의 무게와 두께를
가지고 무겁게 하면서 헤겔을 물질화했다는 것은 그 토대에서 그는 헤겔을 근본화했다는 것인가? 처음부터 하나의 사실을 말하고
넘어가자: 만일 맑스의 행위가 그와 같은 근본화라면, 그리고 만일 그
행위가 단지 역사적으로 놓인 것이 아니라, 근거 짓기의 연장선상에서 기능적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다면, 그 때의 맑스는 전적으로
헤겔 안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개념의 자기운동은 항상 이미 자신의 근본화 전체를 통합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헤겔을
근본화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헤겔주의자이며, “젊은 헤겔주의자”이며,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맑스가 한 때 속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메를로-퐁티에게, “젊은-맑스”는 완전히 헤겔의 불충분성이다. 이것은 소외를 정신의 행위로 정돈하는 것이다.
헤겔에게 사실 존재의 실제적인 두께는 자신을 외재화 하는 데에 놓인다. 만일 『논리학』의 처음의 “존재 아니면 아무것도 아님”이
어떤 지속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가 바깥 없이 무와 동일한 자기 안에 갇힌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quelque
chose)이기 위해서는 존재는 한 시대 혹은 한 장소와 같이 외재성에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존재는 이 외재성에서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야 한다. 정신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잃어버려야 하며, 자기의 바깥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런데 변증적으로 모든 이
돌아옴, 이 모든 자기의 객관화를 감당하는 자기로 더 잘 돌아오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헤겔이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현실은 자신의 객관적인 혹은 역사적인 모습의 반성적인 객관화를 수용할 수 있다. 이 반성적인 규정 안에서 현실은 결과를
획득하게 된다. 만일 정신이 자기로부터 나와서 이념과 다른 것이 되는 것처럼 “자연”을 산출하는 데에 이른 수 있다면, 정신은
자기 자신의 타자가 자신을 회복하고 자기로 돌아오는 만큼 자신을 다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그것을 자기로부터
자기에 의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맑스가 보다 깊이 보다 멀리 가는 데에 주의한다. 만일 잃어버림의 과정이 맑스와
헤겔에서 동일하다면 - 후자가 전자에게 그것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 “역사적인 유물론”은 주체의 상실을 대상 안에서 정신의 행위,
주체 그 자체 (Sujet
lui-mê̂me)의 행위로 만들 수 없으며, 반대로 메를로-퐁티는 대상 안에서 “원초적인 사실”을 구분해 낸다. 이 때에,
헤겔에 대해서 맑스가 취한 그 이상의 것은 여기에 자리한다. 소외는 더 이상 자기 자신(Selbst)과의 정신의 놀이가 아니라,
실존의 사건 더 나아가 물질적 실존이 조건이 된다. 소외는 “사람과 외재성”사이의 연대의 망의 중심을 차지하며, 여기서 주체들은
파악되며 지배된다. 실제적인 힘들에 의해 매개된 지배로부터 계급과 소유의 관계 정치적인 기구들은 산출된다. 헤겔에서 맑스로의
이행은 자신의 특수한 지속성을 헤겔적인 변증법의 맑스적인 “무겁게 하기” 안에서, 말하자면 맑스적인 “변증법”의 어떤 것을
회복하는 하나의 단어의 심화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의 행위의 사실화에 달려있다. 그런데 헤겔을 인간학적으로 다시 근거 짓고 전복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젊었을 때의 그의 텍스트 안에서 실행된다. 특히 1844년 수고에서 행해진다. 헤겔의 전통에
역동적으로 저항하는 다른 전통: 창조적인 자극, 포이에르바흐의 이름과 연결된 사유의 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