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블랑쇼, 날의 광기 - 최후의 출구

aurorepark 2010. 5. 31. 00:42


"밖, 나의 시야는 아주 좁았다: 두 발짝, 내가 막 떠난 거리 모퉁이에 한 여자가 아이를 태운 자동차를 가지고 섰다. 나는 아주 어렵게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집 주차장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차를 돌리고 있었다. 이 순간, 내가 미처 다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한 한 남자가 그 문으로 들어 가고 있었다. 그가 몸을 뒤로 돌리고 다시 나올 때까지 그는 이미 그 문의 문턱을 벌써 넘어선 상태였다. 그가 문 옆에 바싹 붙어 서 있는 동안, 아이를 태운 차는 그를 지나서 그 문턱을 아주 가볍게 넘어갔다. 그리고 젊은 여자는 그를 보기 위해 머리를 들었고, 이어서 사라졌다.


이 짧은 장면은 나를 미칠 지경으로까지 이끌었다. 나는 완벽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확신했다. 나는 그 순간을 파악했고, 그 순간으로부터 날은, 진짜 사건에 이른 날은 서둘러서 끝으로 향했다. 끝이 도달한다. 나는 중얼거린다. 끝이 온다. 뭔가가 도착한다. 끝이 시작한다. 나는 즐겁게 잡혔다. 


나는 그 집으로 갔다. 들어가지는 않았다. 틈새로 나는 정원의 검은 시작을 보았다. 나는 아주 추웠다; 추위가 머리에서 발 끝까지 덮었다. 나는 어제 이래로 내 몸이 이 거대한 추위에 사로잡힌 것을 느꼈다. 그리고 추위는 그것의 자연적 권리를 따라서 소리 없이 그 힘을 넓혀갔다. 나는 이 기쁨 안에 머물렀으며, 이 완전한 행복에 머물렀다. 한 순간 머리는 하늘의 돌 만큼 높았으며, 발들은 자갈길 위에 있었다."


 

                                                                                             - 모리스 블랑쇼, <날의 광기> 중에서


타자와의 관계 - 최후의 출구,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 관계는 반복된다.


한 장면, 좁은 문 앞에, 한 남자가 자동차를 비켜서 한 발을 물러선다. 여기에 무엇인가가 <합의 없이>일어난다.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해서 물러서고, 하나가 다른 이에 대해 존재한다. 그 차는 마치 존재를 가볍게 너머 가듯이 문턱을 넘어간다. 속임수. 이 거짓의 사건은 곧 익명적인 어두운 차가움과 혼동되면서, 화자를 관통하는 우주의 차가움과 곧 혼동되면서, 어두운 집 안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무한한 침묵으로 번져간다. 이 땅에서 서로 죽이는 저 무수한 인간들, 존재의 거대함 앞에서, 당신에게 한 발을 양보하는 이 불확실한 운동은 무엇인가? 


구별된 정신, 정신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만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침묵 안에서 쉼없이 웅웅되는 이 정신. 자기를 염려하는 자아 - 존재 안에서 자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 - 코나투스 -  은 서양 사회의 예의의 양태 안에서 에고이즘이 취소되는 지점에서 그 자아의 심연 안에서 "타자에게 바쳐져 있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제대로 잘 밝혀져야 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 안에서 고통받기는 탈-존재사건(dés-intér-essement)에 이르지 못한다. 이타주의적 의식은 다시금 의식으로 돌아간다. 타자를 위한 , 타자에 대한 고통, 그것은 나를 괴롭히는 타자들이다 ! 블랑쇼는 "이 거대한 타인은 내가 그들을 원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나에게 돌려주었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살인의 시도로 끝이난다. 확실히, 타자들, "그들이 저질은 최소한의 방해도 나에게는 무한한 악이 되었다", "필요하다면, 나는 그들을 의지적으로 희생시키며, 나는 그들에게서 모든 행복한 감정을 떼어낸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 나에게 일어난다)"라고 말한다. 


자기 위안으로서의 타인과의 관계에서, 희생은 유럽의 개인주의로의 회귀일 뿐이며, 자기의 강화일 뿐이다: 나는 누구보다고 강하다! "나는 나에 앞서서 누군가를 땅에 묻어야만 했다." "나의 실존은 놀랍도록 단단했다" 우리의 위대한 철학자들에서 결국 타인과의 관계가 말해지는 것은 자기의식에 의해서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다르게(autrement)" 안에서 "원해진 것(voulu) 타자"와의 관계, 신처럼 원해진 것, 종교 그 자체인 원함의 원해진 것. 원함(vouloir)은 서서히 지워진다: "그런데" 내 안에 무엇인가 원하기를 재빨리 그친다. 의식에 의해서, 그런데 내재성이 없는 의식에 의해서, "독자의 어두운 정신"의 시선 아래에서 곤충이 될 수 있는 조건인 의식에 의해서 타인과의 관계는 항들 사이의 소통을 연결하는 행위로 환원된 체계 안에서 단순한 연결이 된다: "전화는 울리지 않는다. " 형식주의 - 혹은 존재론적 지위. 화자는 투명성에 의해 상처입고 병원에 수용된다.


"나는 많은 책들을 읽었다"라고 블랑쇼는 말한다. 그런데 "내가 사라지면, 소리도 없이, 모든 책들은 변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더 이상은 책은 없다. 나의 주석도 없다. 나의 주석은 단지 유럽인들의 그치지 않는 오락일 것이다. 책도, 읽기도, 글쓰기도 더 이상 없다. 아무 것도 침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내재성도 더 이상 심연도 없다. 모든 것이 존재 안에 되돌릴 수 없이 단단하다. 형식들은 무한히 봉투를 포장한다. 신도 없다. 금이 간 핵 안에는 다시금 새로운 핵이 태어날 뿐이다. 지하의 속임수의 심연에서 한 책에 다른 책으로 가는 주석은, 좁은 도서관 지하의 복도를 곡예를 하듯 큰 걸음으로 걸어가듯이,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 한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기의 없는 이행한다. 인간들이 소통하는 지성은 알려진 동전들을 교환하는 것일 뿐이다. 이미 하늘 사이를 나는 여행의 권태가 자리한다. 우주인은 그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광경 앞에서 눈을 부셔하면서, 그는 아담의 족속이 아닌 인간의 "말하기"를 듣지 못한다.


"피"에만 관심이 있는 병원에서, 우리는 밖으로부터 다뤄진다. 그리고 우리는 비밀에 의해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노출에서 항들이 부정된다. 나의 삶의 공간은 내가 타자들에게서 탈취한 장소이며, 나의 비참 그 자체 마저도 무엇인가를 자극하는 것이고, 고발하는 것이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옷 위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밖으로 돌어선 정의, 그런데 통로가 없는 밖으로 열린 정의, 아무도 이 상호성의 체계를 벗어날 수 없다. 탈출은 마약에 의한 거짓된 환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이 거짓의 잠, 정립이 아닌 것, 테즈가 아닌 것, 을 다시 잡고, 항상 갑자기 그것을 떼어낸다. 왜 이 떼어냄은 거짓인가? 무엇이 존재와 환상을 구분하는가?


그럼 정치적 질서는? 자선에의 열림? 시민으로서의 인간의 저 놀랄 만한 초월성, 빛의 저 거대한 희망. "나는 타자 안에서 어두웠다. 그런데 나는 주권자," 주체, 그런데 왕자, 자유로운 인간 옆에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이 평등의 이름으로 우리가 나눠가지는 이 지상권은 이 자유로운 인간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가하는 폭력과 받는 폭력, 받은 학대는 다시 가하는 폭력으로, 폭력과 학대의 교차. 익명의 법은 누구도 위로하지 못한다. 법은 대화 밖의 독백이 아니다. "나는 조용히 법을 불렀다: 정면으로 볼 수 있게 가까이 와라! (나는 한 순간 그것을 따로 취하고자 했다). 신중하지 않았던 부름, 법이 대답했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깊이의 탈신비화에 이어서, 높음의 탈신비화. 1948년의 이 텍스트에는 대낮이 밝히는 모든 것에 대한 20년 후에 제자리 놓여있는 광기와 텅빔의 원환에 대한 불안한 예감이 있다. 타인 - 밖이 열리는 유일한 점 - 은 출구가 없다. 그는 내 살에 칼을 꽂는다. 타인를 견디기, 타인 안에서 고통받기, 첼란Celan 의 숭고한 말,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너를 짊어져야 한다", 이 말은, 잃어버린 자들이 모여 있는 요양원에서, 환자들이 네 발로 걷는 화자에 등에 올라타는 이 곳에서 코메디로 화한다. 상호주관적인 초월성은  짖누름이며, 이타주의는 피곤한 것이다: "자아"는 말(cheval)의 본질 안에 숨이 막힌다.


                                                                                   - 레비나스, <"날의 광기"에 대한 연습>에서 



다시 블랑쇼의 <날의 광기>, 에서(18-26)


"유리는 제거됐다. 누군가 눈꺼플 위에 투명한 필름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눈커플 위에는 붕대가 감아졌다. 나는 말을 해서는 안됐다. 말은 상처 위의 고정된 가제를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의사는 조금 뒤에 "주무셨군요"한다. 내가 잤다! 나는 일곱 날의 빛을 머리를 들고 지켜 봤었다. 일곱 날, 전체의 빛이 한 순간의 생동이 된, 일곱 날은 나에게 계산을 요구했다. 누가 이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때때로 나는 자신에게 "그것은 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더 자주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나는 죽었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날의 광기를 대면해서 본다고 확신했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빛은 광기가 되었고, 빛의 작열은 그것의 선의를 잃어버렸다; 빛의 작열은 이성을 잃어버리면서, 규칙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나를 학살했다. 이 발견은 나의 삶을 거쳐서 저주가 되었다. 


내가 잤다! 내가 깨어났을 때, 한 남자가 나에게 "고소하시겠습니까?"하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깨어난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건네는 이상한 질문.


회복되고 나서도, 나는 존재를 의심했다. 나는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나는 북쪽의 찬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 끔찍한 접촉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커튼 뒤에서, 연기나는 유리잔 뒤에서 삶을 조그씩 조금씩 죽이고 있었다. 나는 대낮의 무엇인가를 보고 싶었다. 나는 안락에 취했으며, 나는 날을 의해 물과 공기에 대한 욕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그것은 불이었다. 니는 불의 충만을 요구했다. 그것은 보면, 광기의 전염이었다. 니는 미친듯이 이 광기를 욕망했다.


병원에서, 나는 전화를 받고 피검사를 하고(그들은 피에만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약을 먹고, 작은 침대에 몸을 뉘이고 그들은 잠들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공식적인 약을 먹고, 독을 마시고 코마에 빠졌다. 의사는 이것을 '저하상태'라고 불렀다. 그는 깨어났고 그는 이 거짓의 잠에 대해서 의사를 고발했다. 다시! 이 병, 병에 이름에 가장 적합한 이 병.


시각이 조금 저하되었을 뿐인데고, 나는 게처럼 벽에 의존해서 걸었다. 벽에서 손을 떼는 순간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 벽 위에 나는 자주 동일한 광고를 보았다: "너 역시, 너도 그것을 원한다." 확실히, 나는 그것을 원한다. 그리고 매번 나는 이 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안에서 무엇인가 더 이상 원하기를 그쳤다. 읽기는 나에게 아주 피곤한 것이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말 조차도 나에게 알 수 없는, 없는 어떤 힘을 요구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은 당신의 어려움 안에 쉬움을 놓았다"고 말한다. 이상한 제안. 20년 후에도, 같은 조건에서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40년 후에, 나는 비참해 질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길에서 얻었다. [...] 비참은 사람들이 보듯이 거기에 불편하게 있고, 그것을 보는 자들은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한다고. 누가 나를 공격하는가? 그런데, 나는 전혀 나의 옷들 위에 정의를 짊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


나는 의사들을 좋아했었다. 그들의 의심에도 나의 감정은 줄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그것은 그들의 권위가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그들은 왕들이다. 내 병실문을 열면서 그들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나의 내력을 반복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피와와 나의 내밀성을 나눠주었으며, 나의 우주를 그들에게 빌려주었으며, 나는 그들에게 날을 주었다. 그들 눈에는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지만, 나는 한 방울의 물이었다. 나는 항상 그들의 눈 아래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나의 완벽한 무능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을 때 더 이상 나에게서 볼 것이 없었을 때, 그들은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신경질적으로, 그들은 일어서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어디에 숨을 수 있습니까? 숨는 것은 금지입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등등.


그들의 등 뒤에서 나는 법의 모습을 모았다. 우리가 아는, 엄격하고 전혀 부드럽지 않은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위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위협하고 있었다. 나의 시건은 번개였으며, 나의 손이 닿으면 그것을 파괴했다. 게다가 우습게도 그들은 나에게 모든 권리를 부여했으며, 내 무릅 아래에서 그것을 선언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는 요구할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모든 장소에 거주할 권리를 가진다고 인정할 때, 나는 어느 곳에도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이 나에게 모든 권위들 위에 나를 놓았을 때, 이것은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에 그것이 위반되면, 당신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것의 목적들 중의 하나를 알았다. 그것은 나에게 "정의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법은 나에게 "지금 너는 분리된 한 존재이며, 누구도 너에게 반대할 수 없다. 너는 말할 수 있고, 아무 것에도 너는 연루되어 있지 않다. 맹세들은 아무 것에도 나를 연결하지 않는다. 너의 행위들은 아무런 결과도 산출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발로 짖 밟는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너의 하녀가 아니다." 하녀? 나는 어떤 대가도 치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법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정의를 사랑한다. - 그렇다. 그런 것 같다. - 왜 너는 너의 인정할 만한 인격 안에서 정의가 공격받도록 하는가? - 그런데 나의 인격은 너에 대해서 그렇게 인정할 만한 것이 아니다. - 만일 정의가 너 안에서 약화되면, 정의는 고통받는 다른 이들 안에서도 약화된다. - 그런데 이 일은 너하고는 상관없다. - 모든 것이 관계가 있다 -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는 분리된 한 존재이다. - 만일 너가 행위하면, 너는 분리된 à part 존재이다. 만일 너가 다른 이들이 움직이도록 내버려 둔다면,  너는 절대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무의미한 말들이 법으로부터 왔다: "진리, 그것은 그것이 우리와 분리될 수 없기에 진리이다. 나는 너를 어디나 동행한다. 나는 너의 지붕 아래 산다. 우리는 같은 '잠'을 잔다."


나는 내 안에 나를 가두웠다. 가끔 아주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말했다. 몇 시간 동안, 하얀 수염의 늙은이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서 나의 머리 위로 몸을 흔들었다. 그는 나에게 "너는 그러니깐 톨스토이라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 의사도 나에게 바로 이 때문에 내가 미쳤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나의 등에 모든 이들을 실고 그들을 산책시켰다. 서로 밀접하게 얽힌 존재들의 매듭, 경솔함에 의해, 지배하고자 하는 공허한 욕망에 의해 저 위에서 부터 끌어내온, 성숙한 인간들의 사회, 그리고 내가 쓰러지면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이 아니었기에) 내 동료들 거의가 같이 굴러 넘어졌다.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 블랑쇼의 낮의 광기에서



- à part, 혹은 레비나스가 'a parte'라고 라틴어로 쓰고 있는 이 말은 동 떨어진, 분리된, 상관없이, 아무런 연루 없이 존재하는 존재를 말한다. 이 말은 연극에서 극의 상황과 상관없이, 대화의 상대자와 상관없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a parte 말하는 상황을 지시한다. 연극의 독백이 이러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위에서 "La loi n'entre pas dans l' a parte d'un dialogue.", "법은 대화와 상관없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존재자의 분리는 이러한 a parte가 아니다. 한 항과 다른 항의 분리는 무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법은 무관계한 a parte한 법이 아니다. "법의 문 앞에서"라는 이야기의 끝에서(소송의 마지막에 신부가 K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따로 단편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카프카는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남긴다. 몇 해를 법의 문 앞에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요구하던 농부는 문지기에게 묻는다.


- "모든 사람들은 법에 접근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나는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앞에서 그 안으로 들여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 


- 문지기는, "누구도, 너를 제외한 누구도 이 문을 들어갈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이 문은 너에게만 이르도록 정해진 것이다(cette porte t'était destiné, à toi seul) . 이제 나는 가야하고, 문을 닫는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문은 너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다(cette porte n'était faite pour toi", 이것은 정확히 대자의 경우를 지시한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를 덧붙이자면, 각자 자신의 문을 만든다"(EN, 1943,  p.635)라고 쓰고 있다.


이 문장 자체에 나중의 것은 사르트르이 해석이고 앞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카프카 단편집에서 (Bernard Lortholary번역, folio, 그리고 <소송>의 마지막 장에서도, 번역자가 달라도 같은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옮긴 것이다. 그 뉴앙스가 다르다고 할지라고 그 의미는 하나로 수렴된다. 문은 너에게만 너만을 위해서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만들어진 것이다. 사르트르는 바로 그 누군가를 지시한다. se fait  soi même,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만드는 것은 레비나스에게나 사르트르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보지 못한 것은 지향적인 초월성과 다른 초월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레비나스가 위에서 내재성이 없는 의식, 이라고 부른 것이 정확히 사르트르를 지적하는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자기 밖으로의 순수한 파열인 이 의식은 자기 안의 분리 안에서 일어나는 초월성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것처럼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면, 그 자신의 문은 그 자신의 존재를 자신 위에 선고할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인만이, 타인의 얼굴의 현시만이 이 자기에의 갇힘과 단절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인과의 관계는 나에게 최후의 출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타인, 존재의 갇힘으로부터, 밖이 없는 존재의 낮의 질서에서, 밖이 열리는 유일한 점인, 이 타인은 그런데 출구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와 타인과의 비대칭성이 확인된다. 여기의 짖누름이 견딤이 자리하게 된다. 나는 타인을 구원하지 않는다. 나는 타인이 열어준 그 밖에서 출구 없는 타인을 견디면서 나를 구원할 뿐이다. 그는 요구하는 자이고, 나를 비난하는 자이고 나는 대답해야 하는 자이고 죄를 지은 것이 없이도 "내가 존재하는 것이 정당한지, 그럴 권리가 있는지" 묻는, 카프카의 대부분의 이야기와 소설들이 묻듯이,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니냐"라고 우리가 농담 삼아 묻는  불온한 의식(la mauvaise conscience)이다. 블랑쇼의 의사는, 그래서, 그가 아프다고 말한다.    


그 출구 없음은 나에게만  정해진 이 문, 내가 피해갈 수 없는 이 문 앞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