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블랑쇼, 날의 광기 - 상처내는 투명성

aurorepark 2010. 5. 28. 05:12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 (절망으로 극단적이 된 한 인간) 나의 손을 거머쥐고 거기에 그의 칼을 심었다. 피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온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을 이 책상 위에 혹은 저 벽에 못으로 박아달라고 나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에게 이 상처를 내었고, 인간, 한 광인은 나의 친구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내 품에 자기 부인을 밀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쫓았다: "나는 저주 받았다. 나는 비도덕적인 광기의 놀이감이다, 고백하라, 고백하라." 한 이상한 광인. 이 시대, 피는 나의 유일한 정장에 떨어졌다.


나는 주로 도시들에 살았다. 나는 한 때 공적인 인간이었다. 은 나를 끌어당겼고, 다양성은 나를 즐겁게 했다. 나는 타인 안에서 모호했었다. 나는 전혀 자주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내가 인간들만을 죽이는 돌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것을 해보기 위해, 나는 조용히 법을 불렀다: "이리 와라, 정면으로 내가 너를 보도록" (나는 한 순간 그것을 따라 떼어서 보려고 했다.) 신중하지 못한 부름, 만일 그것이 대답했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그것을 고백해야 한다, 나는 많은 책들을 읽었다. 내가 사라지면,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이 모든 책들은 변할 것이다; 가장 큰 여백, 가장 물컹한 사유. 그래,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햇다, 이것은 오늘 나를 내려친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나에게 한 민족이었다. 이 거대한 타인은 내가 원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나로 만들었다. 지금, 나의 실존은 놀라운 연대를 가진다; 비록 죽을 병들이 나를 너무 잔인한 인간이라고 판단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사죄했다. 그런데 나는 내 앞에 있는 몇몇을 땅에 묻어야 했다.


나는 비참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비참은 천천히 나를 중심으로 원들을 만들었다. 그 중의 처음 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남겨두는 듯이 보였다. 마지막의 것은 나만을 남겨두었다. 어느날, 나는 도시에 갇혔다: 여행은 단지 전설 속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전화가 대답하기를 그쳤다. 나의 옷들은 낡아갔다. 나는 추위로 죽을 것 같았다; 봄, 서둘러라. 나는 도서관에 갔다. 나는 거기서 일하는 한 사람과 알고 지냈다. 그는 나를 잘 데워진 아래층으로 인도했다. 그를 즐겁게 하기 위해 나는 좁은 복도를 아주 즐겁게 큰 걸음으로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책들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독자들의 어두운 정신들에게 그것들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아! 정신은 나에 반해서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말들을 돌려주었다; 그들의 눈 아래서, 나는 아주 작아졌다; 나는 그때 곤충, 어둡고 비참한 곳에서 먹이를 구하러 온 시커먼 딱정벌레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 때 나는 누구였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나를 고민에 빠트렸다.


밖, 나의 시야는 아주 좁았다: 두 발짝, 내가 막 떠난 거리 모퉁이에 한 여자가 아이를 태운 자동차를 가지고 섰다. 나는 아주 어렵게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집 주차장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차를 돌리고 있었다. 이 순간, 내가 미처 다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한 한 남자가 그 문으로 들어 가고 있었다. 그가 몸을 뒤로 돌리고 다시 나올 때까지 그는 이미 그 문의 문턱을 벌써 넘어선 상태였다. 그가 문 옆에 바싹 붙어 서 있는 동안, 아이를 태운 차는 그를 지나서 그 문턱을 아주 가볍게 넘어갔다. 그리고 젊은 여자는 그를 보기 위해 머리를 들었고, 이어서 사라졌다.


이 짧은 장면은 나를 미칠 지경으로까지 이끌었다. 나는 완벽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확신했다. 나는 그 순간을 파악했고, 그 순간으로부터 날은, 진짜 사건에 이른 날은 서둘러서 끝으로 향했다. 끝이 도달한다. 나는 중얼거린다. 끝이 온다. 뭔가가 도착한다. 끝이 시작한다. 나는 즐겁게 잡혔다. 


나는 그 집으로 갔다. 들어가지는 않았다. 틈새로 나는 정원의 검은 시작을 보았다. 나는 아주 추웠다; 추위가 발 머리에서 발 끝까지 덮었다. 나는 어제 이래로 내 몸이 이 거대한 추위에 사로잡힌 것을 느꼈다. 그리고 추위는 그것의 자연적 권리를 따라서 소리 없이 그 힘을 넓혀갔다. 나는 이 기쁨 안에 머물렀으며, 이 완전한 행복에 머물렀다. 한 순간 머리는 하늘의 돌 만큼 높았으며, 발들은 자갈길 위에 있었다.


모든 것이 실재였다. 적어놓아라.


나는 적이 없었다. 나는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때때로 내 머리에서 세계가 사라지는 거대한 고독이 창출되었다. 그런데 세계는 아무 손상도 없이 다시 돌아왔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누군가 내 눈에 유리를 던져서 깨는 바람에 나는 시각을 잃을 뻔 했다. 그 충격은 나를 뒤 흔들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벽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돌로 덮인 산에서 길을 잃은 듯이 인상이었다. 최악의 것은 갑자기 닥치는 것, 날의 끔찍한 잔인성이었다; 나는 바로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었다; 보는 것은 끔찍했다, 그리고 보지 않는 것은 이마에서 목까지 나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게다가 나는 나를 위협하는 야만적 짐슴, 하이에나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이 울부짖음, 나는 그것은 나의 것이었다고, 믿는다).


블랑쇼, <낮의 광기>, 14-18쪽. (강조는 나의 것이다)


 


- 절망으로 인해 극단적이되어서, 화자의 손에 칼을 찍고, 거의 미친, 자기를 벽에 못으로 박아달라고 소리지르는 미친 인간, 자기 부인을 그의 품에 던진 그는 누구인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는 누구인가? 그가 레비나스가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단숨에 읽었던 책은 단숨에 읽히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낮의 광기"에 대한 연습>에서, 낮의 투명성이 입히는 상처에 대해서 말한다.


알단 낮의 시간성에 대해서, 날, 오늘, 낮은 연속의 공시성이 아니며, 현재 안에서, 시간은 자신 안으로 침몰하고, 시간은 자신 안에서 자신을 조금도 지움이 없이 자신 안에 꽈리를 틀고, 지움은 그 자체 자신의 시간을 가진다. 날은 자기의 존재함의 힘으로 의식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울리게 하고 파열하는 실존의 과장(emphase)이 아니며, 빛과 봄의 이름으로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하는 존재의 양태이다. 다시 말해 의식은 자기를 이중화 할 수 있는, 분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의식, 그것의 표상은 더 이상  진리의 투명성 안에서 자신의 척도에 의해서 자신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측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투명성, 그 안에서는 영사막들이 사라지고, 대비를 만드는 그림자들이 사라지고 존재는 모순 안에 갇힌다. 그 안에서 존재는 진리가 되고, 이 진리의 열림이, 그 밝음이 공허의 투명성에 이르면서 망막을 찢을 수 있고 보는 눈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 상처는 마치 명증성처럼 정신의 깨어남처럼 탐구된다. 여기에 낮의, 날의 광기가 있다. 낮의 빛으로 욕망되는 광기는 무한히 반복되고 낮은 그것을 찾는 눈에 상처를 입힌다. 블랑쇼는 "누군가 내 눈에 유리를 던져서 깨는 바람에 나는 시각을 잃을 뻔 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날의 광기의 중심적 상징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Sur Maurice Blanchot, 64-65)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자유로운 정신이 자신의 탐구에서 스스로 위험에 처하게 되는 지식의 위기, 권태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와 그것의 행복이다. 이것들이 피할 수 없이 끌어당기는 것이고 찾아지는 것인 한에서, 이것들은 자신들의 원천에 반해서 돌아선다. 그것은 지식의 투명성 안에서, 혹은 동화되지 않는 형식의 뼈, 혹은 "규칙도 목적도 없는" 논리적 형식들 안에서 일어난다. 여기에 화자가 만나는 <법>이 자리한다. 그것이 이성적인 한에서, 그것은 <말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말함이 없는, 모든 담론에, 변명, 기도, 불평에 귀가 먹은 필연성이다. 이 필연성은 상처와 연결된다. 이성적인 개념의 바닥에는 사유의 투명성이 자리하는 이성적인 개념의 토대에서 어두운 언어들은 파열하고, 이 파편들에 상처입은 눈은 정신이 닫히는 밝음(lucidité) 그 자체라고, 그리고  판타즘은 이 투명한 공허에서 춤을 춘다. 낮의 욕망은 공격하는 낮의 광기에 대답한다; 이성의 힘, 헤겔에 의하면 죽음처럼 강한 주인은, 죽음을 통해서도 도망칠 수 없는 죽음 보다 더 강한 주인이며, 주인과는 어떤 화해도 없다. 물과 공기의 욕망은 목마름과 숨쉴 수 없음을 욕망한다. "나는 바라볼 수도 바라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 이 불가능성은 모순을 통해 사라질 수 없다. (65-67)



블랑쇼는 <Je ne pouvais ni regarder, ni ne pas regarder.>, "나는 쳐다볼 수도, 안 쳐다볼 수도 없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불가능성은 모순된 것으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삶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때의 그 불가능성이다. 이 삶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있는 것일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 존재는 이 불가능성을 실현한다: un exil sans espace pour accueillir les exilés.  유배, 유배된 자들을 환대할 공간이 없는 유배."(Sur Maurice Blanchot, 67) 탈출, 이를 곳이 없는 탈출, passe-impasse, 막다른 골목, 더 이상 길이 없는 길, 벽. 불가능성. 라캉이 유일하게 도달한 곳, l'impossibilité, 불가능성. 레비나스가, 블랑쇼가 낮의 투명성, 대낮의 투명성,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정오의 태양의 지옥, 이 불가능성, 이 삶의 불가능성, 모순된 것으로, 행복하게, 사라질 수 없는 이 불가능성. 이 존재의 불가능, "il faut sortir", 탈출해야 한다, sortie, 탈출, 독일어 Ausgant, sortie,issue 출구, 탈출, 동시에 impasse, fin, 막다른 골목,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 불가능한 탈출의 시도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해 볼 것이 없을 때, 이 존재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 인정했을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머물 수 없을 때, 숨 막힘으로 인해, 단 하나의 명령이 주어진다. 탈출해야 한다. 어떻게? 충만 안으로의 후퇴, 혹은 접힘, 내재성 안의 초월성, 이라고 후설이 가르쳐 준 것.



그리스로부터 온 빛은 진짜 밝음이 아니라면, 자기의식, 우리의 역사에 의해서 정복된 이 의식도 아직은 취기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경계심을 넘어서 각성, 깨어남을 찾는 이성은, 모든 밝음 보다 더 밝음을 찾는 이성은 이미 하나의 상태l'état이고 이미 국가L'Etat 라면 그것을 끄고자 하는 위협 아래에서 봄의 고양. 창조의 7일의 빛은 여전히 역사의 약속에 의해 저물지 않는다 ."


"내재성 안의 초월성 혹은 내재성 안의 목조르기", 이 자기 안으로의 초월, 하향초월은 마약에 의한 거짓 이 라고 말해야 하는가? Sans issue, 출구 없음,  누가 그 말의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 출구 없음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예측했는가?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비-공간으로, 충만으로, 이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는 곳으로 밀어낸다. 고통을 넘어서, 지옥은 바로 이 공간의 역전이다. 이 영원화 된 시간의 지나갈 수 없음(impasse), 이 순수한 이성의, 그것의 직관의, 그것의 자기 안으로 감김 distorsion., 낮의 광기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해볼 것이 없다." 이 불가능성은 추상적인 여러 진술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성의 조건 혹은 비조건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여기에, 이 불가능성 위에 레비나스의 다른 인간의 인간주의가, 윤리가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