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데카르트, 길을 내면서

aurorepark 2010. 5. 26. 06:00

삐에르 게난시아, Pierre Guennancia, Desacartes, chemin faisant, <데카르트, 길 만들기, 길을 내고 있는 데카르트> chemin faisant, 한 발 한 발 나아가면서 만드는 길. 길을 만드는 일은 도약이 불가능한 작업이다. 길 만들기, 길 없는 곳에 길 만들기, 어렵게 어렵게 한 발 한 발 내 딛으면서 길 만들기. 숲 한 가운데에서 어떤 길의 흔적도 없을 때, 어디론가 나아가야 하는데, 어찌 할 것인가? 그는 조금씩 조금씩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서 길을 만든다. 길을 만드는 데카르트. 게난시아, 그는 여기서 데카르트의 길을, 이미 만들어진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더 이상 세상을 이전의 눈을 가지고 바라 볼 수 없는 시대에, 더 이상 그것을 가지고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시대에, 갈릴레이가 도래한 그 근대에,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가지고는 그의 의미를 가지고 더 이상 세계를 말할 수 없었을 때, 그 길 없음 앞에서 길을 만들고 그가 처음 삽질을 시작하는 순간과 그 고단함과 삽질 중에 만나는 바위들과 더 이상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위기들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나아가는 그의 노동, 그의 사유의 노동을 그대로, 그 흔적을 쫓아서 데카르트의 사유의 흔적을 따라서 몇 년간 한 발 한 발 길을 만들면서 이룬 연구의 흔적들이다. 


목차를 보면, <데카르트에 대한 폴 발레리의 독서>, 또 <푸코와 데카르트 : 주체성과 주체>라는 글도 있다. <주체성과 영혼의 열정>이라는 제목도 보인다. 첫 장은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의미의 원천으로서 자연>이라는 제목도 보인다. <경험>과 <표상>과 <상상력>과 <열정>에 대한 글들도 있다. 항상 그렇듯이 그의 정치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고, 데카르트는 사변적인 형이상학자라기 보다는 실천적이라고 믿으면서, 인간에 대한 질문과 그의 철학적 연구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성찰의 끝에 그가 그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그를 기억하면서, 이전의 데카르트와 홉스, 데카르트와 파스칼을 다룬 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데카르트의 상대자로 마키아벨리>를 다룬다, 그리고 스웨덴의 공주 <엘리자베트>와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한계>와 이어서 이 책, 끝낼 수 없는 책을 끝내면서, <형이상학에서 철학으로> 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끝낸다.  


                                                                        *


1946년 엘리자베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나에게, 내 삶을 인도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가장 신중하게 따랐던 교훈은 다만 대로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본적인 정확성은 이 정확성을 고갈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서문>의 몇 구절을 읽는다.


12개의 연구는 데카르트의 중심적인 질문들과 관계한다.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영혼의 본성에 대한, 영혼, 생각하고 원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이 사물의 본성과 관계된 질문들, 데카르트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이 이 책의 전반부에 놓인다. 이어서 정치적인 질문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데카르트의 해석, 그리고 엘리자베트의 자문으로 그는 삶의 지혜, 삶의 인도, 행복의 본성, 열정의 지배 등등 데카르트의 의해서 열려진 채, 그 이후로 그치지 않고 물어진 질문들을 다룬다: 영혼과 신체의 결합, 하나의 실체가 다른 것에 미치는 영향의 본성. 성숙한 데카르트가 취한 문제들의 중요성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그가 희망했던 것처럼, 사변적이기 보다는 실천적인 철학이 아니가를 물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밝혀 말하고자 하는expliquer* 것은 체계적이고 순수하게 사변적인 그런 데카르트, 이미 다 이미 만들어진 데카르트가 아니라, 문제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기를 만들고 있는 데카르트이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에서 다른 질문으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쉬지않고 나아가면서 공들여 만들고 있는 사유이다. 이러한 살아있는 사유는 현재도 생생하게 미셀 푸코가 데카르트의 주체를 가지고 벌이는 논의들에서, 그리고 발레리의 "기념비적인 자아"에서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철학적인 생동은 철학이 직면한 문제의 본성을 인지하는 데에 있다. 이미 주어진 답변을 적용하는 것도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데카르트가 그에게 제기된 반박들에 대답할 때, 그는 그의 대화자를 <성찰>을 보라고, 그 안에 이미 다 말해졌다고, 마치 그의 사상의 법처럼, 그들을 <성찰>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기한 질문을 다른 길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반박들>은 그런 점에서 <성찰>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 그의 철학이 세기를 거쳐서 말해지고 물어지는 것은 그의 철학이 철학의 '역사'가 아닌 철학의 '문제들의 원천들'로부터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이 철학은 박물관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철학적 문제들이 경험되는 사유의 도구로서의 본성을 갖는다.


* expliquer : faire connaître, faire comprendre nettement en développant. 상대가 잘 알수 있도록 밝혀 말함.


제 2 성찰의 한 구절,


<이 앞에 있다고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별 어려움 없이, 나는 인간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말할 것인가? 확실하지 않다: 동물이 무엇인지, 이성적인 것이 무엇인지 우선 밝혀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질문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로 무한히 다른 보다 어려운 문제로 떨어진다. >


<생각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이 사물>의 본성에 대해서, 그 이후에 무수한 철학자들이 셀 수 없이 이 생각에 대해, 이 상상에 대해, 이 감성에 대해서 무수히 말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이 '사물'에 대해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