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 우리에게 낯설지 않았던 언어(2)
전-철학적인 경험 - 구역질
모든 철학적인 질문과 모든 이론적인 진술 이전에 어떤 철학자 안에 존재하는 전-철학적인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어떤 경험1)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하이데거적인 용어로 ‘기분’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하이데거에게 여러 기분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 불안이었다면,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에게 그것은 기분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의 방식으로 ‘구역질’2)로 드러난다.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의 이 우연한 철학적 개념의 행복한 일치는3)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철학적 전개를 보장하지 않는다. 서로 다르지 않은 전-철학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두 철학자가 서로 다른
모습의 철학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이 전-철학적인 경험이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결과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떤 결정론도 없다. 이것은 한 개체로서의 단독자가 철학적 사유의 보편의 한 중심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아감벤이
말하듯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동시대를 산 철학자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항상 동시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4)
사르트르가 메를로-퐁티와 연대와 논쟁, 그리고 결국 결별에 이르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면,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이 두 철학자는 생존시 별다른 교분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철학자는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또 그
만큼 서로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비슷하면서 그토록 다른 길을 가도록 만들었을까?
첫 눈에 두 철학자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구역질』에서 사르트르가 나의 실존과 더불어 모든 존재의 우연성을 폭로하는 마로니에 나무 아래에서의 존재의 경험과 레비나스가
『탈출』에서 기술하고 있는 “나의 존재에의 못 박혀 있음”에 대한 수치의 경험에서 드러나는 순수존재의 경험이 모두 존재의 익명성, 레비나스가 나중에 “있음(l'il y a)”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혐오의 감정으로 두 철학자에게 동일한 신체적 징후, 구역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익명성, 비인간적인 경험은 두 철학자에게 모두 하이데거에서 근본적인 존재론을 가능하게 했던 존재의 시간성에 대한 거부로
드러난다. 이런 존재에 대한 경험은 하이데거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심리적 상태에 대한 주관적인 채색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
아니 하이데거와 정반대로 존재의 의미의 부재를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두 철학자에게 존재는 하이데거처럼 존재를 내어 주는 ‘관대함’으로서 의미로의 열림도
의미의 기원도 아니며, 다자인을 시간적인 존재로 만들면서 동시에 존재에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또한 존재는
헤겔처럼 본질의 자기실현으로서의 존재도 아니다. 이 존재는 차라리 데카르트의 영악한 천재의 가설을 닮았다. 데카르트의 자아론이
자아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처럼, 후설의 자아론도 마찬가지로 자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지적하듯이
“영악한 천재의 경험은 코기토의 앞선다”5). 두 철학자가 각각 도달한 익명적 존재로부터 두 철학자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철학 안에 주체성을 다시 도입한다. 여기서 ‘다시’는 물론 데카르트나 칸트의 주체성의 철학으로 돌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근대
형이상학적 주체성에 대한 비판 ‘이후’에만 비로소 도래할 수 있는 주체성을 의미한다. 그 이후가 의미하는 것은 탈주체화의 경험
이후에만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주체성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는 “주체 없는 초월론적인 장”(EN, 291, TE,
74, 77)이라는 이름으로 주체 없는 주체성을, 다른 하나는 나와 자기의 분리와 회귀의 운동으로서 주체의 주체성을 주장한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하나는 자아 없는 주체성을 다른 하나는 자아의
주체성을 말하고자 한다. 이 근본적인 선택의 다름은 그들의 철학의 다름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선택의 다름을 결정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밝히는 것은 첫 눈에 유사해 보이는 두 철학자의 구역질의 경험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두 철학자의 초기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존재의 익명성에 대한 두 철학자의 반응이 ‘구역질’이라는 동일한 현상으로 들어났다고 할지라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꼭 같은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같은 의미의 폭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구역질은 그 유명한 마로니에 아래 벤치에서 로껑땅이 체험하는 그 존재와 더 나아가 나의 실존의 우연성과 잉여성, 더 정확히 말하면 정당화되어질 수 없는, 아무 이유도 없이 존재하는 우리 실존의 부조리성 앞에서의 신체적 징후였다면, 레비나스에게 그것은 “나의 존재에의 못 박혀 있음”이라는 수치의 경험이 순수한 상태에서 몸을 얻은 경우이다.
“지난 1월부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이해했다. 구역질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곧 떠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병도, 환상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다. 좀 전에 나는 공원에 있었다. 마로니아의 뿌리가 내가 앉아 있던 벤치 바로 아래로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더 이상 그것이 정말 뿌리였는지 기억할 수조차도 없었다. 그 때에 말들이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서
사물들의 의미, 사물들의 사용방식, 사람들이 사물들의 표면에 새겨놓은 허약한 표지들이 사라졌다. (...) 사물들의 다양성,
그들의 개별성들은 단지 겉모습, 니스였을 뿐이다. 그 니스가 녹아내려 괴물처럼 물컹물컹한 무질서의 덩어리로 공포스럽고 음란한
벌거벗음만이 남았다”(N, 180-182. 나의 강조)
“구역질, 그것은 우리가 있는 바의 것일 수 없는 불가능성 자체인데, 그 안에서 우리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 못 박혀있다. 우리는 숨통을 막는 조여드는 원환 안에 끼어있다. 우리는 거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해 볼 것이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이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다 소진되었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 그 자체이다.”(E, 116)
위에서 사르트르가 기술하는 모든 존재자들이 그 이름과 외적 표지들을 잃고 가공 이전의
벌거벗은 상태인 원초적 존재 덩어리(l'être brut)로 사라지는 마로니아 나무 아래 공원 벤치에서의 이 존재 체험은
레비나스가 위에서 기술하는 구역질의 체험보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그가 불면을 기술하면서 “있음(l'il y a)”이라고 부르는 존재자 없는 익명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의 체험에 가깝다. 이
익명적인 존재의 경험이 그렇다고 위의 레비나스의 인용문에서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 안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잃어버리는 탈주체화의 탁월한 경험으로서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으로 그려진다. 이 존재에 대한 순수한 경험은 구역질로 체험된다. 구역질은 그 자체 전적으로 모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있는 바의 것일 수 없는 불가능성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못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구역질은
주체의 탈주체화에 대한 주체의 저항과
동시에 처음부터 이미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우리 자신의 토대가 우리의 숨통을
막기”(E, 115)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존재는 다름 아닌 내가 발 딛고 있는 나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역질과 우리와의 관계는 극복해야 하는 혹은 비켜 가면 그만인 거리를 지닌 장애물, 내 앞에 놓인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정반대로 헤겔이 말하듯 “구분되지 않는 것의 구분”6)처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붙어”( E,115)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역질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그것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헤겔처럼 “밀쳐내는 힘이 있는 만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7)고
말하지 못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116)이다. 그런데 이 노력은 이미 처음부터 절망적인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로부터 레비나스 철학의 출발인 탈출의 명령이 나온다.
“더-이상-아무-것도-해-볼-것이-없다”라는 것은 한계-상황의 지표로 여기서 모든 행위의 무용성은 정확히 탈출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최상의 순간의 지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순수 존재의 경험은 동시에 그것의 내적 대립의
경험인 탈출의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E, 116)
사르트르는 “구역질은 나다”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도
“그것은 우리에게 붙어있다”고 말한다. 그들 모두에게 구역질은 나와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나에게 붙어있는 것으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신체적 징후로 나타나는 최초의 이 존재에 대한 경험은 그 근본에서 같은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사르트르에게 나의 실존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부조리성, 우연성이 구역질을 일으켰다면, 레비나스에게 반대로 이 존재의 필연성,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이 나에게 붙어있는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이 존재의 필연성이 구역질을 유발한다. 전자에게 이 우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이, 후자에게 이
필연성을 떼어낼 수 없음이 그치지 않는 구역질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나의 죽음조차도 이 잉여(de trop)이기”(N, 183)때문이고, 레비나스가 말하듯, 그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존재의
현전”(E, 117)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자의 가능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의 출발의 차이는 그들이 각각 이 구역질로부터
탈출하는 방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하나는 이 우연성을 근거지우고자 하는 노력으로 다른 하나는 이 필연성, 이 숙명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각각의 노력은 하나는 자유의 철학자로 다른 하나는 이 자유를 문제로 삼는 철학자로 만든다.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실 이러한 차이 아래에는 이 차이를 만드는 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두
철학자의 근본적인 문제의 지평의 차이이다. 사르트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현상학의 문제의 지평을 떠나 있으며, 반면에 레비나스의
논의는 현상학의 한계 위에서, 그 이전과 그 너머를 말한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자. 그것은 사르트르의 전 철학을 지배하는
그의 최초의 철학적 직관인 존재의 잉여성 혹은 우연성에 대한 그의 신념,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과 관계한다. 시몬느 드 보부와가
증언에 의하면, 사르트르는 레비나스의 『후설 현상학 안에서 직관의 이론』을 읽은 후, “레비나스가 형식적이고 모호하게 기술하는
우연성은 후설의 체계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말은 후설이 우연성에 대해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우연성의 이념을 다 발견하지 못했다”8)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구역질』에서
사르트르가 기술하고 있는 우연성의 이념은 후설이 다 발견하지 못한 우연성9)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자들의 무더기였다. 우리는 여기에 존재할
최소한의 이유도 가지지 않았다. 우리들 각각은 서로 혼동되고, 서로에 대해 잉여라고 느꼈다. 이것은 나무들, 울타리, 자갈들에
대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 그리고 나 - 우울한 사유를 되새기고 그 안에서 흔들리고 아무런 힘도,
의지도 없는 음산한 - 나 역시 잉여였다.”(N, 183)
그가 베를린에 머물면서도 계속 썼다고 전하는 이
소설은 단순한 소설이기를 그치고 그 당시 그의 현상학에 대한 이해와 그의 철학의 미래를 예비한다. 존재의 잉여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경험 안에서 사르트르는 이미 후설 현상학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의 지향적 활동 한 가운데에서 작동하는 비-의미, 사물의 저항을
발견하면서 현상학의 중심에 최초의 균열을 일으킨다. 아니 차라리 현상학의 지평을 전적으로 이동한다. 후설의 지향적 의식의
의미부여(donation du sens)의 활동에 동화되지 않는 의식의 상관자의 저항, 나중에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가 불운의
계수(coefficient d'adversité)라고 부르는 이 사물의 저항은 “우리의 예측과 상관없이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EN, 569), 우리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불운을 말한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전제로 『존재와 무』에서 존재의 독립성(selbsträndigkeit)과 이에 반해 의식 존재의 의존성으로 이해된다.
이미 여기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사유를 사로잡았던 실재론적인
철학의 경향과 만날 수 있다. 정확히 마흐나 제임스,
화이트헤드로 대표되는 신실재론도 아니고 물론 그렇다고 고전적인 실재론도 아닌 것으로 사물의 우연성과 즉자존재의 우월성을 말하는 이
이상한 실재론적인 경향은 그가 “소화철학”으로 선고했던 관념론에 대한 혐오와 그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실재론적 경향과 현상학을 결합하고자 하는 사르트르의 욕구는 분명 후설 철학에 일단의 변형을 가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욕망은 후설 현상학의 구호가 되어버린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라”를 실재하는 외적 사물로의 돌아감으로 이해되며, 또한 후설
지향성은 “저 밖의 사물로의 파열”로 즉각적으로 해석된다. 현상학의 노에시스의 상관자인 노에마의 질료성을 혐오했던 사르트르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말하듯 사르트르를 사로잡았던 두 철학적 직관은 “비존재의 호수와 질료의 끈적임”10),
다시 말해 무로서의 의식과 존재의 우연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최초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경험은『존재와 무』에서
즉자존재의 형식으로 다음의 설명을 얻는다.
“즉자존재는 가능도 불가능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한다. 그것이 잉여라고 말하는 것, 그것도 다만 인간 중심적인 용어로
의식이 표현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의식은 그것을 무엇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다. 다른 존재로부터도, 어떤 필연적인
법칙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다. 창조되지 않고,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떤 다른 존재와의 어떤 관계도 없이,
즉자존재는 영원히 잉여이다.”(EN, 34)
“존재는 존재한다. 존재는 즉자이다. 존재는 있는
바의 것이다.”(EN, 34) 그것이 존재했고, 존재 할 것이라는 것은 나로부터 오는 것이지 그것은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자에서 발견하는 변화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도, 새로운 존재의 탄생도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그러했고, 더 이상 그러하지 않고, 그것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간성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간성은 다만 의식에만 속할 뿐이다. 존재는 이러한 “시간의 허약성”(N, 188)을 가지지 않는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이해는 다시 한 번 그의 하이데거로부터의 근본적인 단절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그의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에의 충실을
드러낸다. 그것은 단지 존재한다. 그것은 단지 거기에 있다. 창조가 없다는 것은 죽음도 무도 창조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무는 인간으로부터만 세계에 도래할 뿐이며, 존재는 그 자체 현실태로 자신의 충만성 안에서 타자성도 시간성도 모른다. 존재로부터
시간성을 탈취해 내는 사르트르의 태도는 칸트의 단지 내감의 형식이었던 주체의 “시간을 존재에 다시 도입하면서 주체와 존재 사이의
구분을 제거하려고 한 헤겔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현대 철학의 한 거대한 흐름의 물길을 돌린다. 레비나스는 “그들은(헤겔과
하이데거) 존재의 본질에 환원불가능한 주체성의 이념을 비판하며,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넘어서 그들 간의 상호관계를 끌어내고 그들에
의해 인간중심적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존재의 양태로 환원한다”11)고 말한다. 이렇게 존재로부터 시간성을 떼어내는
경향은 사르트르와 레비나스가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각자가 그 구체적인 전개의 방식에서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현상학을 수용하면서 특히 하이데거와 취한 근본적인 거리는 두 철학자로 하여금 새로운 주체성의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의식은 어떻게
도래하는가? 존재는, 사르트르에게, 절대적인 동일성인 한에서 즉자이다. 그것은 자기와의 관계가 아닌 자기이다. 그것은 자기와의 거리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충만’이다.
여기에는 어떤 변증법도 없다. 그것은 "자기를 실현할 수 없는 내재성이며, 스스로를 긍정할 수도 없는 긍정이다. 행위하지 않는
순수한 현실태"( EN, 32)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어떤 거리도 없이 조밀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시간도 어떤 모험도 없다. 이러한 경우, 세계에 타자성, 부정성은 어떻게 도래하는가? 이 질문은 어떻게 의식이 세상에 도달하는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마치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이 자기의 긍정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존재가 자신의 압축을
느슨하게(décompresser)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일어난다”(EN, 32)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마치 즉자존재가 그 자신의
대립인 - 그것이 아닌 것이고, 있는 바의 것이 아닌 - 대자존재, 즉 그 존재의 무화인 대자존재를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탈압축의 요청은 “마치 ...인 것처럼”이 지시하듯이, 하나의 '말하는 방식'일 뿐이다. 존재의
무화로서의 탈압축의 요청, 자기에의 현전의 요청은 이미 그것이 스스로를 근거지우는 대자로부터만 가능하다. 여기에 “존재의 무에
대한 사실적 우선성(primauté)과 구분되는 무(의식)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리적 우선성(priorité)”(713)이
자리한다. 왜냐하면 즉자는 위에서 말했듯이 자기에의 압축이기 때문에 어떤 것과도 관계를 스스로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하나의 대답이 가능하다. “마치 즉자가 자신을 근거지우고자 하는 기도에서 대자로의 변형을 스스로에게 주는 듯이
일어난다”(715)12). 이
가설은 고유하게 형이상학자에게 속한 것으로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가설로 남는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현상학적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사물들은 전적으로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 뒤에는 ... 아무 것도 없다”(N, 140)는 의식의 사실, 즉 “현상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의식의 존재와 의식의 지향의 대상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13) 이어서 이 둘의 관계를 기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있는가?" 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러한 질문은 다만 존재 이후에만 오는 것”(713)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구역질』에서 사르트르는 이와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은, 이 거대한 존재의 현전은 다만 꿈이었는가? 나는 그것이 ‘세계’였다는 것을 안다. 벌거벗은 세계가
갑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는 이 거대한 부조리성에 대한 화로 인해 숨이 막혔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물을
수도 없었다. 더욱이 왜 아무 것도 아니고 어떻게 무엇인가 존재하는지를 물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세계는 어디에나, 앞에 뒤에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것 앞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Rien).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한 순간도 발견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물론 그것, 이 흘러내리는 용암이 거기에 존재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생각 불가능 했었다. 무(néant)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거기에, 이
충만한, 두 눈을 부릅뜬 그리고 살아있는 이 세계 안에 있어야만 한다. 무는 내 머리 속에 있는 이념, 이 거대함 안에서 흔들리는 이념일 뿐이었다. 이
무는 이 존재에 앞서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였다. 그것은 다른 많은 것들 후에
나타났다." (N, 191, 나의 강조)
이렇게 대자는 “존재의 무로서의 자신의 존재”의
토대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존재의 무임를 끊임없이 근거지운다는 의미에서 대자는 즉자의 독립적인 절대에 비해 비-실체적인
절대로서 “의존적인 절대(un absolu
unselbständig)”(EN, 713)라고 불린다. 물론 이 정의는 후설의 『이념 I』의 §49의 “존재하기 위해 다른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는 절대”로서의 후설의 절대적인 순수 의식에 대한 근본화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반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아의 초월성』에서 이 의식 안에 자아마저도 의식 밖으로 내 몰면서 의식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후설의 의식의 절대성의
극단화라면, 이 의식을 의존적인 절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후설에 반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의 현실이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질문하는 데 있는”(713) 대자는 무화라
는 이 자기의 타자성에 의해 항상 유예상태로 머문다. 왜냐하면 대자가 자신의 존재와 결합한다면, 타자성과 더불어 가능성, 인식
그리고 세계는 즉각적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르트르의 의식은 철저히 이중구속에 빠져있다. 존재임에 대한 욕구이면서,
동시에 그것임에 대한 혐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안절부절 못하는 의식은 구역질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나는 마로니아의 뿌리였다. 아니, 나는 전적으로 그의 실존에 대한 의식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것으로부터 떼어져 있었다 - 왜냐하면 나는 그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 그런데 나는 그것 안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의식(une conscience mal à l'aise) (,,,)실존은 떨어져서 생각되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갑자기 당신을 덮치고, 당신 위에서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짐승처럼 당신의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거나 - 그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N, 187-188)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즉자존재의 우선성을 긍정한다. 그런데 이 즉자존재의
경험, “구역질의 경험은” 레비나스도 말하듯 “의식존재를 전적으로 비인격화하지 않는다”14). 다시 말해 의식의 부정하는 힘마저도 제거하지 않는다.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한
기록에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한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나를 미쳤다고 믿지 않을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대상들과 관계된 모든
변화들,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명백히 본다. 적어도 이것이 바로 내가 확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N. 14. 나의 강조)
데카르트는 제
2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 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럼에도 자신의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나를 속이는 아주 강하고 아주 영악한 자가
있다. 따라서 그가 나를 속이는 한에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 점의 의심도 없다. 그리고 그가 나를 그가 원하는 만큼 나를
속인다는 사실, 그는, 내가 어떤 것을 생각하는 한에서, 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도 한 점의 의심도 없다. (...) 이로부터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je suis,
j'existe)는 것은 내가 매번 그것을 발음할
때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 내려야 한다”(데카르트 제 2성찰)
위의 두
인용문에 그들이 미친 사람과 다른 이유는 딱 하나이다. 그것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상한 것에 대한 체험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나는 ‘생각되어진 것’으로부터 ‘생각하는 자’의 존재의 확실성에 이르며,
다른 하나는 ‘생각되어진 것(이상한 것)’이 있다는 확실성으로부터 “그것이 내가 아니다”라는 확실성에 이른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사르트르의 모든 종류의
자아론(égologie)에 대한 비판과 무로서의 의식의 정의와 만나다. 우리는 여기서 최소한 이 ‘아니다’의 확실성 안에서 마치 데카르트가 자아의 확실성으로부터 학의 가능성을 근거지웠듯이 어떤
구원의 가능성을 예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확실성은 사르트르에게 어떤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의 불가능성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해 마련된다. 우리가 『존재와 무』에서 만나는 모든 종류의 동일성의 획득을 위한 기도의 실패를 말하는 그의
비극적 존재론의 그림을 이미 여기서 그려진다. 우리가 사물에 부여한 하나의 의미나 정의가 더 이상 그 의미나 정의와 일치하지 않을
때, 마로니에가 더 이상 마로니에이기를 그치고 질료 덩어리로 사물의 벌거벗음으로 드러날 때, 더 나아가 나라고 하는 것도,
너라고 하는 것도 저 세계 안의 마로니에와 그 지위에 있어서 다르지 않을 때, 다시 말해 나도 너도 모두 하나의 잉여일 때, 더
이상 여기에도 A = A라는 그 오래된 동일성의 원리도 타자와의 어떤 종류의 일치도 상호주관성도, 소통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원리가 오랜 철학의 원리를 따라서 형상의 원리를 따른다면, 반면에 무엇이 무엇 이상임은 항상 질료의 과잉에
돌려진다. 이러한 잉여성은
우리의 모든 감각경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각되는 것과 시각의 관계에서 후자가 추상적인 인간적 발명이라면, 전자는 이에 비해
항상 잉여로 드러난다. “나는 검정을 보지 않았다. 시각, 그것은 추상적인 발명, 말끔히 청소되고 단순화된 이념, 인간의 이념일
뿐이다. 여기에 있는 비-형상적인 검정은 이 시각, 이 후각, 이 미각을 넘어서 멀리 갔다.”(186) 이것은 존재의 벌거벗음에 대한 긍정일 뿐이다. 그 외에 모든 형상, 형태, 질서는 모두 인간적인 부가일
뿐이다. 저것들을 잉여하고 부르는 것조차 인간적인 각색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러한 경우, 나의 유일한 존재의 확실성은 내가 이 끔직한 존재를 생각한다는 사실, 이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 뿐이다.
“나의 사유, 그것은 나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정지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을 막을 수가 없다. 이 순간조차도....끔직하다. 만일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삼킨 무를 나에게 끌어내는
것은 나, 바로 나다: 증오, 존재하는 것에 대한 혐오. 그것들은 또한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들이고, 나를 존재 안으로 나를
몰아넣는 것이다. 사유들이 마치 현기증처럼 내 뒤에서 태어난다. 나는 그것들이 나의 머리 뒤에서 태어나는 것을 느낀다.” (N, 145. 나의 강조)
내
뒤에서, 나의 머리 뒤에서 태어나는 사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르트르가 『자아의 초월성』에서 그리고 『존재와 무』에서 익명적인 자발적 의식이라고 부른 괴물스런 의식의 있음(il y a)만이 남는다. 구역질의 마지막 장에서 로껑땅은 부빌을 떠나기 위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그 도시가 자신을 버렸다고, 자신은 전적으로 영원히 이 도시에서 잊혀졌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실히 존재하며, 나는 여기에 있다”(239)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비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나는 전적으로 잊혀졌다. 실제로 남아있는 것은 내가 실존한다는 느끼는 실존뿐이다. (...) 누군가에 대해서, 엉뚜안 로껑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의식은 벽들 사이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지속한다. 누구도 그 안에 거주하지 않는다. 좀
전에 누군가가 나라고 나의 의식이라고 말했다. 알려진 색깔과 냄새를 가진 말하는 저 거리 이외에 익명적인 벽들과 하나의
익명적인 의식만이 남는다. 벽들이 있으며, 벽들
사이에 생생한 그리고 비인격적인 작은 투명성만이 있다. (...) 의식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의식은 벽들 사이에서 비어진 조용한,
그
안에 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더 나아가 더 이상 인격이 아니기에
괴물스런 자신을 발견한다. (...) 저 부인에
대한 의식, 역 가게에 대한 의식이, 살인자에 대한 의식 등등이 있다(il y a). (N. 239-240. 나의 강조)
『자아의
초월성』과 같은 시기에 써진 이 글에서 자아를 의식 밖으로의 추방하고 남은 비인격적이고 개체적인 자발성(spontanéité individuée et
impersonnelle)(TE, 78), 혹은
전반성적인 코기토라고 부르는 것을 만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벽들 사이”라는 이 비유는 단지 비유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소통할 수 없는 벽들 사이에 놓여있는 저 거리들, 저 즉자존재를 제외하고 무엇이 남는가? 벽들, 나와 소통할 수 없는
벽과 같은 타인들, 그리고 나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체적인 하나의 익명적인 의식만이 남는다. 이제 로껑땅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제
그는 어떤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잡고 있었던 모든 것을 놓았다. 그가 쓰던 역사책,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떠났다. 새로운 다른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그는 아직 젊고 아직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에서 다시
시작해야하는지 모른다. 모든 과거는 죽었다. “홀로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자유는 죽음을 닮았다.” (N, 221) 이 자유는 『존재와 무』에서 “존재의 구멍”이라고
말해진다.
“대자는 즉자의 무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존재 한가운데에 구멍과 같다. (...) 대자는 마치 존재의 중심에서 자신의 기원을 가지는 무화로서
나타난다. 즉자에 어떤 총체적인 전복이 도래하는 것은 이 무화로 충분하다. 이 전복은 바로 세계이다. 대자는 즉자의 무화 이외의 다른 현실을 가지지 않는다. 대자는 즉자 일반의 무화가 아니라, 개체적인 단독적인 즉자의 무화이다.
마찬가지로 대자는 무 일반이 아니다. 그것은 단독적인 결여(privation singulière)이다. 대자는 여기 있는 이 존재의 결여 안에서 구성된다.”(EN, 711-712. 나의 강조)
사르트르의
구역질은 이렇게 끝난다: “홀로 자유로움”. 이 책의 머리 인용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인용문은 이유 없이 놓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는 셀린의 소설의 한 구절을 책머리에 놓았다: “그는 집단적인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한 소년이며, 단지 한
개인일 뿐이다.” 사르트르에게 이 “홀로 자유로움”, 이 개인과 자유의 가치는 사르트르의 최초의 철학적 선택이었고, 『존재와
무』에서, 그리고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융합집단'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이 개인과 자유의 가치는 그 의미의 폭과 깊이를
상실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의식의 홀로 자유로움이 마치 하이데거의 존재의 홀로 자유로움의 반대
짝이라면, 그 둘은 같은 논리에서 각각 다른 두 극을 말한다. 여기에 레비나스의 고독에 대한 질문이 놓인다.15)
그의 고독에 대한 질문은 개인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질문이며 시간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다고 사르트르에게
타자성에 대한 질문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존재와 무』 말미에서 이중적인 타자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한편으로 즉자존재가 아님으로서의 대자가 가지는 즉자존재의 타자성,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타자성 - 그렇지 않을 경우
대자는 주어진 것으로 즉자가 될 것이기에 - 다시 말해 대자 스스로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se faire autre)(712) 타자성,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가 ‘절대’라고 부르는 이 대자가
지니는 타자성, 이 “공허는 ‘일 이 아(il y a)’의 익명적이고 그치지 않고 들리는 부스럭거림으로 곧 이어서 다시 채워지지
않는가?”16)
이 자리에서 사르트르에게 다시 어렵게 물어야 한다. 그가 본 존재의 타자성, 자기에의 타자성이 다시 돌아서 존재에로 돌아간다면,
레비나스와 더불어 “존재의 타자”에 대해서, 외재성에 대해서 다시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을 다시 묻기 위해서는 사르트르의
주체성과 그의 자아의 문제와 직면해야 한다.
주
1) 엄격한 의미에서 현상학적으로 말해서, 더 정확히 후설적인 의미에서 ‘존재에 대한 경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후설이 자신의 현상학을 초월론적인 현상학으로 정의하면서, 그가 처음 한 것은, 그의 환원의 방법이 보여주듯이, 모든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대한 모든 주장들을 괄호 안에 넣으면서 현상으로, 다시 말해 존재의 나타남으로 철학의 시선을 전향한다. 이로부터 후설에게 가장 일반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들의 학은 “대상 일반의 본질학”(후설,『이념 I』, § 10)으로서 단지 ‘형식 존재론’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이 형식 존재론의 틀 안에서 존재에 대한 경험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공허한 개념”(하이데거,『존재와 시간』, § 1)으로 남는다. 이러한 부재는 그의 철학의 불충분성이 아니라 그의 방법의 엄격성의 표현일 뿐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의 과제는 의식에 주어지는 것, 즉 대상과 지향하는 의식과의 지향적 관계들을 기술하는 데에 놓인다. 이 경우 존재는 대상 일반의 공허한 형식을 지시하는 한에서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후설 이후의 현상학자들의 발걸음은, 이미 하이데거에서부터 후설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존재론적인 전향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존재에 대한 경험을 다시 발견한다.
2)사르트르의 소설, Nausée는
이미 우리에게 『구토』라는 익숙한 제목으로 굳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구역질』로 옮긴다.
사르트르의 구역질(Nausée)이 구토(Vomissement)로 옮겨지면서 우리는 불행하게도 하나의 정확한 철학적 개념을 갖을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역질은, 레비나스의 『탈출』에서 묘사되는 구역질과 마찬가지로, 구토에 이르지 못하는
불가능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구역질은 생리적인 구역질의 현상을 넘어서 하나의 철학적인 개념의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우리는 최소한의 정확한 철학적인 개념을 가질 권리가 있지 않은가?
3) 두 철학자의 ‘구역질’이라는 주제의 행복한 일치 사이에는 어떤 영향 관계도 없다. 그 개념이
레비나스에게 나타난 것은 1935년 『철학 연구』(35-36, tome V)에 실린 레비나스의 “탈출”(De
l'évasion)에서이며, 사르트르의 『구역질』이 출판된 것은 1938년이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시몬느 드 보부와의 증언에 의하면 31년부터 36년까지 써진 것이라고 전한다. 이 책의 본래의 제목은 '구역질'이 아니었다.
듀레의 판화의 제목을 딴 '멜랑콜리아(Melancholia)'였다. 이 책의 표지가 이 그림을 달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원고는 처음 37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판거부를 당했다. 전하는 이유로는 너무 길고, 표현의 생경함 그리고 음란성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샤을르 듀렝과 피에르 보스트의 중재로 이 책은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 가스통 갈리마르에 의해서 제안된
'구역질'이라는 제목을 달고, 50여개의 단락이 삭제된 후에 38년 출판된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BNF/Gallimard
(2005)에서 최근에 나온 자료집, Sartre p.
44-45를 참조할 수 있다.
4) 아감벤, 「동시대적이란 무엇인가?」 in Nudité, Paris, Payot, 2009.
5) Michel Foucaut,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tel Gallimard, p. 209.
6) 헤겔, 『정신 현상학』, Phénoménologie
de l'Esprit I, trad. fr. Hyppolite, Paris, Aubier, 1941, 1999,
p. 139.
7) 헤겔, 위의 책, pp. 130-131.
8) 시몬느 드 보부와, Simone de Beauvoir, La force de l'â̂ge, Paris,
Gallimard, 1960, p. 158.
9)사르트르가 현상학에서 발견한 혹은
발명한 그의 철학의 한 핵심을 형성하는 존재의 ‘우연성’에 대한 주제의 기원을, 시몬느 보부와의 증언을 토대로, 33년 아롱의
충고로 사르트르가 책을 사서 길에서 걸으면서 읽었다고 하는 레비나스의 『후설 현상학 안에서 직관의 이론』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46쪽에서 레비나스는 후설의 『이념 I』의 § 46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사물들의 존재(existence)는
그것이 주어지는 방식에 의해 필연적인 것으로 요청되지 않으며, 반대로 일단의 방식으로 항상 우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문장은 사르트르의 전 저작에 드러나는
존재의 우연성에 대한 사유와 후설의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앞 뒤 페이지를 읽다보면 사르트르가
고심하는 이 실존의 우연성의 위험은 즉각적으로 사라진다. 여기서 후설의 의도는 사물의 실존은 의식의 초월적인 것으로 사물의 본질
파악의 첫 단계로 외적 사물의 존재 그 자체에 본질적으로 속한 것으로 내적 지각과 구분되는 외적 지각의 성질을 규정한다. 같은
곳에서 레비나스는 환원의 의해 도달한 내적 지각과 외적 지각의 이중성은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질 수
없으며, 사물의 외적 존재는 현상의 무한계열과 혼동되며, 이 존재의 우연성은 “즉자존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이 존재의 내적
규정”(48)으로 현상과 사물의 일치가 필연적인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10) 들뢰즈, 위의 책, p. 112.
11)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Le livre poche, biblio essais,
p. 34.
12) 사르트르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가설은 형이상학자에 속한 것으로
현상학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이 『존재와 무』의 결론 부분을 읽다보면 우리는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가 익명적 존재로부터 존재자의 출현을 끌어내는 자기정립을 예감할 수 있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의 철학을 출발한다.
13) 『존재와 무』의 서문에서
사르트르가 질문하는 두 개의 초(전이)현상성들(transphénoménalités) - 존재와 무 -을 지시한다. 여기서
trans는 너머의 의미이면서 그것이 뒤에 감춤의 의미가 아닌 현상과 존재, 현상과 무(의식)을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전이를
의미한다.
14) Emmanuel
Lévinas, De l'existence à l'existant,
Paris, Vrin, p. 100.
15) 고독의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16)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의 본질을 넘어서』,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La Haye, Martinus Nijhoff, (1974), Le livre de poche, biblo essais 1991, p. 14.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는 우선 존재의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질문은 물론 서양 철학사 내에서 한 번도 존재의 타자를 부정성 이상으로, 다시 말해 논리적인 다름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철학적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의 결론 부분에서 의식의 타자성을 말하면서 그는 플라톤의 그 유명한 플라톤의 부정성을 불러 자신의 다름으로서의 의식의 무성을 설명한다. 그가 철학에서 만난 타자성은 결국 의식이 만난 존재와의 다름 이상이 아니다. 레비나스의 질문은 이 자리에 존재한다. 이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존재의 타자를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