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

자라더 - 네메시스의 인내(1)

aurorepark 2009. 12. 8. 06:46

마를렌 자라더(Marlène Zarader)의 <네메시스의 인내>의 그녀의 서문을 읽었다. 그녀는 여전하다. 그녀 읽기는 한없는 즐거움이다. 블랑쇼를 읽을 때, 데리다를 읽을 때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


이 책은 그녀가 말하듯 철학과 비-철학의 교차에 놓여 있다: 둘 사이의 간격, 둘 사이를 오고 가는 끝없는 운동 안에 존재한다.


<한 철학자가 자신의 영토를 벗어나서 문학, 시, 그림 혹은 영화 안으로 모험을 시작할 때, 그의 시선은 철학적이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러면 거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둘 사이의 교신이 발생한다: 철학자가 고려하는 작품은 마치 어떤 개념들의 빛에 의해 새로운 얼굴을 갖게된다. 같은 방식으로 이 개념들은 작품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삶을 획득하게 되며, 개념은 그것에 잘 조화되는 새로운 개념이 된다. 우리가 읽을 책은 이러한 만남들을 이야기 한다.>


데리다가 철학이 아닌 문학을 한다고 비판하는 무지 앞에서는 이런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철학은 이념의 획득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이야기는 별로 흥미가 없을 것이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그 표현의 양태가 달라도 그들은 모두 삶의 본질을 건드린다. 앙리의 삶의 체험, 스스로 자기를 시험하고 증언하고 증명하는 것이 철학 안에서 이론으로 말해진다면 아르또는 직접 그의 희곡을 통해, 그의 연극을 통해 그것을 증언하고 스스로 시험한다. 철학자가 미처 말하지 못하는 것을 시인은 시인의 언어를 통해서 말해준다. 시인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철학자는 설명한다. 이 만남, 이 교차는 아름답지 않은가! 소위 프랑스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나의 공부의 적을 두게 된 것은 바로 이 만남들을 철학자들의 책에서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만남은 많은 경우에 풍요롭고 아름답다. 사르트르, 레비나스, 앙리, 데리다 그리고, 블랑쇼. 


<따라서 이 책은 이중의 내기에 의존한다: 철학을 다른 곳에서 연습하기 위해서, 그리고 철학에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철학의 토대에서 철학적인 반성을 거두워 내는 것, 그것은 종종 풍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다른 한편 이러한 풍요한 결과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아닌 곳에서, 다시 말해 사유의 엄격성 의해서 말해지는 문학 작품 그 자체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만나게 하는가이다. 그녀는 하나의 원칙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주제의 단일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 그것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한계에 대한 질문. 우선 이 용어, 한계가 무엇인지를 먼저 잘 이해를 해야한다. 한계는 본질적으로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의 관점에서 이해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에 한계는 구성하고 조합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었으며, 그것이 긋는 울타리의 형식 안에서 모든 것은 자신의 형식을 보증받았다. 이러한 그리스적 한계(peras)의 개념은 "현전의 빛 아래서 형태를 나오게 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Heidegger, Principe de la raison, trad. Préau, Paris, Gallimard, p. 167) 이었다. 그런데 한계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이 (내적으로)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외적으로) 금지하는 것에 의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한계는 충만의 조건이라기 보다는 결핍의 지표로서 드러난다: 칸트적인 용어로 우리의 유한성으로서 우리가 지시할 수 있는 것을 표시하는 선.>


그녀는 한계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면서, 현재 우리 동시대에서 이 한계의 개념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물으면서 데리다의 작업을 불러낸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데리다는 이미 <Tympan>에서 예전부터 철학이 어떻게 한계를 생각했는지를 헤겔을 예로들어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데리다는 한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여 준다.


<그로부터 철학은 위협하는 자신의 외재성을 제거하면서, 한계를 자신의 한계로서 자기화한다. 따라서 데리다는 <한계의 욕망>(바르트가 <중성의 욕망>에 대해서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길을 연다: 한계는 넘어서면 안 되는 경계로서 인정되며, (이것은 과잉에서 뒤집힐 것이다),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은 한계를 길들이는 것일 것이며, 그것의 형태를 지우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더욱이 우회시킬 수 없는 것으로 (이것은 그것에 의해서 방해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대상이라가 보다는 고통이, 그것은 사유를 사로잡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며, 사유는 이 고통을 오래 오래 견디는 것만이 남을 것이다. 그것이 사유에 선고하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면서.>


<이 오래 견디기(endurance)는 매번 어떤 위험을 감추고 있다: 눈치채지 못하게 점진적으로 경계를 넘어설 위협. 한계에 가능한 가까이 머물고자 하는 노력에서,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며, 그 안으로 그 심연으로 사라진다. 우리의 현재 이 책은 이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conjurer) 것이 아니라, 이것을 활용하고자(conjuguer) 하는 데에 있다: 그 위험을 탐험하는 데에, 그것의 다양한 변용들을 재인식하는 데에, 그것의 국면들을 전개하는 데에, 결국 그것을 작동하게, 일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여기서 질문되는 작품들은 모두 바로 이 하나의 질문, 한계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들이다.>


이 하나의 질문으로 모이는 작품들은 크게 세가지의 모습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가지 형태들은 이 책의 형식을 결정할 것이다. 


1/ 우선 상호주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어떤 한계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그리고 만일 그러한 한계가 존재한다면, 그때에 한계는 금지의 형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금지의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을 구성할 것이다. 그런데 독일어에서 이 말, 잘못(Schuld, la faute)은 (갚아야 할)빚을 의미한다. (이렇게 죄와 빚은 그것의 갚음이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 갚음(restitution)의 본성에 대해서 질문할 것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돌려줄 것이 없을 지도 모른다, 다만 흔적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다만 한계만이, 잊혀졌던, 몰랐던 혹은 무시되었던, 그것의 인정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흔적들을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 라스코니코프(3장)에서, 다으덴 형제의 (영화 <약속>) 젊은 이고르(Igor)에서(7장)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어서 상징의 체계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어떤 한계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이 존재한다면, 여기서 사유, 언어 그리고 욕망이 문제가 될 것이다. 한계는 이곳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기도 혹은 반대로 밀쳐내는 하나의 '지평'으로, 다시 말해 언제나 그것을 건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건너 뛰고자, 가로지르고자 욕망하는 비물질적인 '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 앞선 경우에서의 금지가 아닌 불가능성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가능성을 우리는 여러 작품들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특히 불량쇼의 오르페(오르페우스)를 생각한다. 이 작품들에서 한계는 마치 자석처럼 인물들을 끌어당기려 결국 그를 불태우는 그런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우리가 거기에 머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역설적인 내기가 존재한다: 국경에 머물기, 그것이 두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고자 하는 내기. 이러한 내기는 특히 파트리스 세로(Patrice Chéreau)의 영화 <욕망의 사건>에서 가장 탁월하게 육화되어 드러난다. 그런데 가장 모호한 방식으로, 이 영화는 문학에 사로잡히기를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여기서 문학을 한정지우기 때문이다. 블랑쇼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었다. 오르페가 유리디스를 보고자 했을 때처럼 - 보이지 않는 그녀를 보고자 했을 때 -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작품이 아니다. 말해질 수 없는 것(l'indicible), 그것은 언어의 한계이다. 여기서 언어의 밖과 그것의 부름(vocation)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시인들은 이 욕구하고 싶은, 그런데 불가능한 이 한계를 증언한다. 이러한 증언은 루이-르네 데 포레의 '수다'에서(단어들의 나눔, 4장)에서, 그리고 같은 한계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로 폴 슬렝의 침묵의 방식으로(침묵의 자장자리에서, 5장)에서 그리고 드 시리코(De Chrico)의 형이상학적 그림에서(그늘의 부분, 6장) 다양하게 드러난다. 


<한계에 대한 질문은 이렇게 다른 두 방향으로 활용된다. 그런데 이 둘을, 금지와 불가능의 형상들을 연결하는 것, 그들을 역설적인 단일성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넘어서 가기, 위반의 유혹이다. 여기서 다루는 모든 작품들은 이 유혹을 반복한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제시하는 읽기는 이중의 배려를 지닌다. 우선 작가들의 내밀성에서처럼 같은 방식으로 인물들에서 그들의 열정 혹은 수난(passion)을 당신들이 듣도록 노력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 열정이 촉발하는 반감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읽을 장들은 우리가 건널 수 없는 선에 저항하고 그것을 다시 읽고자 하는 데에 사용될 것이다. >


<하나의 경계가 그것의 다른 한계를 감춘다는 것을 망각함이 없이 나아가지 위해서는 우리가 만나는 한계들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을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가 (미친듯이) 건너고자 하는 한계가 자신을 조용히 유지한다: 이것은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다른 한편, 우리가 (역시 미친듯이)정립하고 하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원함과 달리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의 핵심은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계에 의해 제한된, 더욱이 그것을 지배할 수 없는, 자기화할 수 없는 그 한계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그늘, 그림자가 만드는 선(la ligne de l'ombre)"(2장)은 우리의 다른 유한성들 중의 하나의 기로가 아니다. 그것은 유일하게 가능한 유한성의 현시이다. 이 선은 우리를 한정지우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의 결핍으로 인해(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 부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한계들을 고정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한계를 넘어섬(démesure)이다. 유한성의 부인.>


3/ 처음과 나중의 한계와 구분되는 제 3의 한계의 모습, 이것은 그녀의 제안이다. 앞선 두 개의 한계들과 달리, 여기서 한계는 존중해야 할 것도(금지) 피할 수 없이 만나는 것도(불가능성) 아닌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장소에 고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것(ce que l'on ne peut établir)이다. 앞서의 두 형상들은 근거지우는(fondatrice) 경계이다. 그것은 국경처럼 우리를 조인다. 그로 인해 그것은 우리를 규정한다. 반면에 나중의 형상은 방어적(défensive)이다: 그것은 타자(그것의 얼굴이 무엇이든지 간에)를 포함하면서우리에게 속한 능력, 힘을 무한으로 연장하고자 한다. 한계를 부인하는 이러한 몸놀림, 위엄을 가지고 한계를 고정하고자 하는 이러한 몸놀림은 앞의 것과 같은 운명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공통의 운명을 나는 여신, 네메시스의 기호 아래 놓고자 한다. 그녀는 모든 한계를 넘어섬(démesure/hybris)을 벌한다. 그녀의 이름은 자주 복수와 연결된다. 나는 그녀를 디케(Dikè), 정의로부터 태어난 여신으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네메시스의 인내는 무한하다. 밤의 딸, 그녀는 그 밤에 깨어 있다: 그녀의 시간은 물론 새벽에 이를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 그들의 욕망에서, 그들의 행위에서. 그들의 존재 그 자체 안에서 - 잘못 정해진 영토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그들의 면밀한 모든 측정을 즐긴다. 그녀는 그들이 불가능성을 욕구하도록 내버려둔다. 금지를 행진하도록 하며, 그들의 나눌 수 없는 그 흐미한 선을 그린다. 그런데 그녀는 항상 <나타남(apparaître)>으로서만 끝이난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moira)을 나눠주기 위해서 - 각자의 유한한 몫. 이 나타남의 필연성은 여기서 측면들(facettes)에 의해서만 접근된다. 매번 각각의 작품들의 단독성을 통해서. 내가 그것을 극단에서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순간에 그것은 하나의 책으로 주어졌다. 『존재와 중성』. 그것은 오늘 이 책에서 그 책의 전사(préhistoire)를 구성한다 - 그리고 그 책을 연장한다. >